솔직히 말해봅시다. 세상만사 거의 모든 문제는 감정의 문제예요. 우리가 답을 모르는 게 아닙니다.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다들 알고 있어요. 그것대로 하기가 불안하고 내키지 않을 뿐이죠. 어떻게 해야 회사에서 주목받을지 알고 있죠. 근데 그러려면 더 신경 쓸 것도 많고 퇴근 후에 집에서 잔업을 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내 워라밸이 망가지죠. 내키지 않아서 하지 않을 뿐입니다. 어떻게 해야 여자친구와 남자친구의 화를 풀 수 있을지도 알아요. 그런데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거든요. 괜히 괘씸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할 뿐이죠.
영화 <달콤한 인생>의 나레이션을 알고 계실 텐데요. 흔들리는 나무를 바라보며 제자가 스승에게 묻습니다. 스승님, 저건 나무가 흔들리는 겁니까, 바람이 흔들리는 겁니까. 스승이 대답하죠. 흔들리는 것은 나무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고, 무릇, 네 마음뿐이다. 결국 마음의 문제예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내 안에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이 감정이라는 놈은 내 뜻대로 잘 통제가 안 됩니다. 통제되었으면 작심삼일이라는 말은 없었겠죠. 다이어트, 금주, 금연이 어려운 이유입니다. 공부가 어렵고 계획의 실천이 어려운 이유죠. 그럼에도 우리는 무언가를 해내기 위해서 감정을 적절히 통제해야 합니다. 항상 쉬고 싶고 항상 놀고 싶은 마음을 누그러뜨려야 해요. 이건 최근에 저에게 주어진 미션이기도 했습니다. 요 몇 달간 브런치에 꾸준히 글을 써야 했거든요. 그래서 감정을 통제하기 위한 이런저런 방법들을 시도해왔어요. 그중 제가 예전부터 사용해왔고, 또 가장 효과가 좋은 방법을 세 가지로 정리해 소개하려고 합니다.
1. 반어법 쓰기 – 정말 아름답네.
중학교 때 재밌는 습관이 있는 친구가 있었어요. 모든 상황에서 반어법을 쓰는 건데요. 그날따라 맛없는 급식이 나왔습니다. 식판을 들고 줄을 서서 영혼 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 정말 맛있겠네. 정말 기대가 된다 그치? 그러면 옆에서 다른 애들이 피식하거든요. 이런 농담을 습관처럼 하던 친구였습니다.
몇 년 뒤 친구들과 통영에 같이 놀러 갔어요. 그런데 날을 잘못 잡았던 겁니다. 우중충한 날씨에 바람은 불지 시야는 흐리지. 동양의 나폴리라고 해서 찾아갔는데 완전 실망했었어요. 쓰레기가 나뒹구는 해변을 보면서 뻘쭘하게 서 있는데 그 친구가 나긋하게 말합니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그치? 역시 동양의 나폴리. 순간 정적을 깨는 농담에 서 있던 친구들이 낄낄댑니다. 야 밥이나 먹으러 가자. 우리는 시시덕거리며 근처 횟집으로 이동했죠.
사실 그때 말은 안 했지만 저는 무척 깊은 인상을 받았었어요. 기운이라는 게 있잖아요. 특히 같이 여행할 때는 사소한 기운이 중요하죠. 사소한 실망이 여행 전체를 망칠 수도 있어요. 우리의 기운은 실망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의 어두운 기운을 반어법 농담 하나로 재치있게 뒤바꾼 겁니다. 낄낄대는 기운으로 바꿔버린 거죠. 저런 건 배워야겠다. 정말 좋은 습관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며칠 전 글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도저히 글을 쓰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지만 써야 했어요. 앉아서 빈 화면만 쳐다보다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습니다. 하… 재밌네. 순간 내가 무슨 말을 한 건지, 혼자 피식했는데, 의외로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 기분이었어요. 그래서 더 말해봤습니다. 정말 재밌지. 글 쓰는 거 징글징글하게 재밌어.
그러자 마음의 부담이 확 줄었습니다. 농담하기 전에는 표정이 굳어 있었어요. 글을 쓰지 못하니까 무력감에 지쳐있었고, 스스로 실망해있고, 결국 글을 쓰는 걸 오늘은 반드시 끝내야 하는 과업으로 생각하게 되었죠. 그런데 농담 한마디에 정말로 마음이 풀어졌어요. 내가 지금 이게 뭐라고 이렇게 심각하게 앉아있나. 이렇게 농담하듯이, 재밌게 쓰자. 기대를 줄이고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작업할 수 있었죠.
가벼운 마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하자 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주제가 떠올랐어요.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글쓰기가 막막했었는데, 막상 글을 쓰니 영감이 얻어지더라고요. 글쓰기가 글쓰기를 촉진하고, 이어서 폭포수처럼 글을 쏟아냈습니다. 결국 글 쓰는 것을 가로막고 있던 것은 다른 게 아니라 내 마음의 벽이었어요. 진지함과 심각함으로 가득한 벽에 작은 구멍을 뚫자 벽은 금세 금이 가고 쉽게 무너져 내렸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이 지나치면 우리는 걱정하고 염려하고 의심합니다. 의심이 지나치면 생각이 많아지고, 많은 생각은 더 많은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켜요. 악순환인 거죠. 저는 오랜 친구로부터 그 악순환의 고리를 살짝 뒤트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반어법으로 농담하기. 별거 아닌 것 같아도 큰 효과가 있어요. 사람의 뇌는 생각보다 단순해서 말하는 대로 감정이 움직입니다.
그런 말 있죠.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한 거라고. 정말이에요. 이게 습관이 되면 더 좋습니다. 부정적인 상황이 닥칠 때마다 그걸 희화화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상황의 심각함이 희석되면서 큰 문제가 작아 보입니다. 만만해 보여요. 그러면 뭔가 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일은 일단 해보면 해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2. 존재 인정하기 – 그거 말 되네. 놀릴 수도 있지 뭐.
그런데 제가 더 크게 효과를 본 건 사실 이 두 번째 방법입니다. 이건 초등학생 때 엄마한테 배운 건데, 이제는 습관이자 태도가 되었습니다. 제 피부가 까무잡잡해서요, 어릴 때 까맣다고 놀리는 애들이 진짜 많았거든요. 한 번은 엄마한테 울면서 따졌습니다. 나는 왜 까매요. 애들이 놀린단 말이에요. 뭐라고 놀리니? 마이콜이라고 놀려요. 엄마가 웃으면서 대답합니다. 그거 말 되네. 놀릴 수도 있지 뭐. 웃긴데 같이 웃어봐.
순간 놀랐어요. 아 놀릴 수도 있구나. 그렇지. 말이 되기는 하지. 그렇네. 그리고는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는 거예요. 저는 애들이 놀리면 당연히 기분이 나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놀리면 당연히 기분이 나쁘죠. 누군가를 놀리는 건 나쁜 행동이야. 그런 건 있을 수 없어. 내가 놀림당하는 일도 있을 수 없어. 이렇게 생각했던 거죠.
그런데 잘 생각해보니까 놀릴 수도 있거든요. 그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나는 가만히 있어도 누군가가 나를 놀리면 나는 놀림 당하거든요. 그런 일은 비록 좋지는 않지만 나와 상관없이 일어난다. 이 사실을 깨달은 겁니다. 놀림을 당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냥 놀림의 존재를 인정하고 같이 웃으면 되는 거예요.
이 사건은 제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조금씩 바꾸는 첫 단추가 되었습니다. 불행은 언제든 존재한다는, 불행의 존재를 인정하는 관점 말이죠. 더 자세히 말하면, 부정적인 상황이나 감정은 나와 상관없이 언제든 발생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언제든 쉬고 싶고 놀고 싶은 마음도 나와 상관없이 언제든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마음 자체를 통제할 수는 없거든요. 글을 쓰는 지금도 그래요. 그냥 이 글 쓰지 말고 맥주나 한잔하면서 밀린 영화나 볼까. 이거 써도 누가 볼까. 무슨 도움이 될까. 부정적인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그래도 글을 쓰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첫째는 내가 하기로 마음먹은 일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이런 부정적인 감정은 나와 상관없이 언제든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학교에서 애들이 놀렸던 것과 똑같습니다. 너 그거 해서 뭐 할래? 네가 뭐라도 된 줄 알아? 그러면 그냥 하지 말까, 생각하게 되죠.
그럴 때 엄마의 교훈을 떠올립니다. 그것도 말이 되긴 되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뭐. 한 번 웃고 다시 내가 하던 일에 집중하는 겁니다. 흔들리는 건 나무도 바람도 아니고 내 마음뿐이라고 했죠. 그런데 실제로 흔들리는 건 나무나 바람이에요. 깨달아야 할 것은 내가 아무리 애써도 나무를 멈추게 할 수 없고 바람을 그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윤대현 정신의학과 교수는 불안을 느끼는 현대인들이 불안을 끄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불안을 끄는 방법은 불안을 느끼지 않으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불안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말하죠. 불안을 없애기 위해서, 나는 지금 정신 차리고 공부해야 해, 불안을 없애야 해, 이러면 더 불안해진다는 거예요. 왔구나, 불안아. 아이고 귀여운 내 불안. 아이고 귀여운 나. 하하하. 이렇게 받아들이라는 것이죠. 장난처럼 들리지만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방법입니다. 놀림의 존재를 인정하고 같이 웃어보라는 엄마의 말과 데칼코마니처럼 닮아 있는 조언이에요.
친구들이 나를 놀릴 수는 없어. 내가 놀림당할 수는 없어. 이건 불안을 느끼지 않으려고 애쓰는 행동이에요. 이러면 나는 더 불안해집니다. 사실은 놀릴 수도 있거든요. 부정적인 감정을 통제하려면 그 감정의 존재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하는 거죠. 놀리는구나. 그럴 수도 있지 뭐. 지금 불안하구나. 왔구나, 불안아. 아이고 귀여운 내 불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불행이 필연이 아니라 우연임을 알게 됩니다. 필연적 불행이 늪이라면 우연한 불행은 물웅덩이예요. 우리는 늪에 빠져 움직일 수 없는 게 아니었어요. 가던 길에 잠깐 물웅덩이를 밟은 것이었죠. 걱정과 달리 발이 움직이거든요. 부정적인 감정은 나와 상관없이 발생한다는 생각, 그래서 우리는 언제든 발을 움직일 수 있다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3. 몸이 만드는 정신 – 될 때까지 속여라(Fake it ’til you become it).
윤대현 교수는 그런 믿음을 자아효능감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말만 해서는 자아효능감을 키우기 어렵다고 해요. 말로는 부정적인 감정을 해결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행동을 통해 긍정적인 경험을 조금씩 쌓아가야 한다고 말하죠.
이건 제가 반어법을 설명하면서 잠깐 이야기한 것과 같아요.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글쓰기가 막막했는데, 막상 글을 쓰니 영감이 떠올랐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반어법으로 상황의 심각함을 반전시키는 것도 좋고,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부정적인 감정과 자신을 분리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런데 이건 단지 부정적인 감정으로부터 빠져나오는 방법이에요.
부정을 회피하는데 그치지 않고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기 위해서, 우리는 말이 아니라 몸이 필요합니다. 실체적인 감각과 경험이 필요해요. 윤대현 교수는 목표를 아주 작게 잡아서 성공 경험을 극대화하라고 조언합니다. 오늘 수학 문제 100개 풀어야지, 하고 크게 목표를 잡는 게 아니라, 오늘 수학 문제 2개 풀어야지, 이렇게 허들을 확 낮추는 게 좋다고 해요. 성공할 수밖에 없도록. 실제로 성과를 내는 경험을 통해 긍정적인 감정을 키우는 방법이죠.
비슷하지만 더 쉬운 방법도 있습니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자아효능감을 키우는 방법인데요. 사회심리학자 에이미 커디(Amy Cuddy)는 우리의 자세가 자신감을 만든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파워 포즈를 제안하는데요. 어깨를 펴고 허리를 곧추세우면 정신도 따라 바로 선다고 말해요. 몸이 정신을 만든다는 겁니다. 다들 그런 경험 있으실 거예요. 헬스나 요가를 등록해놓고 귀찮아서 안 가잖아요. 근데 어쩌다 한 번 가면 이게 또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죠. 긍정적인 감정이 마구 폭발합니다. 이렇게 좋은 걸 내가 왜 미뤘지? 이젠 빠지지 않고 무조건 가야지(물론 다시 가는 건 또 다른 얘기지만요).
에이미 커디는 이런 긍정적인 몸의 활동을 일상생활에 조금씩 더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일화를 소개하는데요. 그는 19살에 자동차 사고를 당해서 IQ가 큰 폭으로 떨어집니다. 지적능력의 감퇴는 그에게 큰 트라우마로 작용했어요. 그래도 연구를 하고 싶었던 그는 남들보다 4년이나 늦게 대학을 졸업합니다. 강의도 맡게 되었어요. IQ가 낮다는 사실 때문에 자격지심에 빠지고 위축되었지만 그럴 때마다 파워 포즈와 함께 ‘할 수 있다’라고 되뇌었다고 해요.
하루는 강의를 마치고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한 학생이 다가오더니 자신은 여기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부정적인 감정에 빠져있다고 고백하죠. 그때 그는 학생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위축되어 있던 자신의 예전 모습을 보고, 과거를 이겨낸 지금의 모습을 봐요. 변하고자 했더니 어느새 변한 것이죠. 그는 되고 싶은 모습이 될 때까지 자신을 속여라(Fake it ’til you become it)라고 말합니다. 매일 몸을 크게 하고 자신감 있는 자세를 취하는 걸로 스스로 최면을 거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운동인 셈이죠.
참을 수 없는 감정의 가벼움
반어법 쓰기, 부정적 감정의 존재 인정하기, 몸의 운동을 통해 자아효능감 회복하기. 이 세 가지 방법은 우리가 쉽게 실천할 수 있으면서도 부정적인 감정을 회피하고 긍정적인 감정을 끌어내는데 무척 효과적인 방법들입니다. 그런데 혹시 눈치채셨나요. 신기하게도 이 세 가지 방법 모두는 결국 어떤 하나의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우리의 감정이라는 게 참 별 볼 일 없다는 생각 말이죠.
여행 중 실망으로 가득 찬 감정들이 반어법 농담 하나에 밝은 감정으로 바뀌었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아. 귀여운 내 감정. 하하하. 윤대현 교수가 소개한 이 방법은 감정의 존재를 귀여운 것으로 생각함으로써 그것이 나를 삼키지 않게 만듭니다. 에이미 커디의 방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몸을 통해서 감정을 속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감정은 속이기 쉽고 그래서 가변적이라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세 가지 방법을 알고 실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바로 이 한 가지 믿음을 가지는 일이겠군요. 우리는 언제든 감정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 그만큼 감정은 별 볼 일 없다는 믿음. 감정은 내 정신을 지배하고 조종하는 절대자가 아니라 내 정신과 같이 놀고 싶어 하는 귀엽고 작은 고양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감정이 하찮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예민해질 필요는 없죠. 예민해질수록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이 감정이잖아요. 마찬가지로, 둔해질수록 더 작게 느껴지는 것도 감정입니다. 부정적인 감정의 존재를 인정하되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해보세요.
한 번 지나가는 바람이에요. 놀아달라고 떼쓰는 고양이죠. 왔구나. 재밌네. 잠깐 놀아주고는 몸을 크게 하고 한 번 웃는 겁니다. 될 때까지 속여보세요. 괜찮은 방법입니다.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게 우리 마음이거든요.
원문: Discus 님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