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흔히 소설은 지루해하고, 게임은 즐거워한다. 그 이유야 분명하다. 게임에는 ‘상호작용’이 있다. 소설은 그저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지만, 게임의 이야기는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관람객과 독자, 게이머의 기본 태도는 바로 그 부분에서 달라진다.
여기에 한 소설이 있다. 이 소설은 90년대에 유행하던 게임 북이 아니다. 미로 게임을 풀고 나면 몇 페이지로 가세요, 같은 안내문도 없다. 하지만 그 어떤 게임보다도 높은 자유도로 수십 가지의 엔딩을 우리 눈앞에 펼쳐내는 ‘상호작용’의 책이다. 저자는 악명 높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다.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그 첫 문장으로 우리 모두에게 기억되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은 『롤리타』다.
주석의 줄다리기, 당신의 진엔딩은 무엇인가요
지금 소개하고자 하는 책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또 다른 장편소설, 『창백한 불꽃』이다. 그렇다. 이 책의 표지는 분명 이것이 ‘장편소설’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이 소설이라는 점에는 명백히 이견이 없지만, 이 책은 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지 않다는 것도 언급해두어야 한다. 책은 머리말, 시, 주석, 색인으로 구분되어 있다. 999행의 서사시와 그 서사시의 몇 배가 되는 압도적으로 긴 주석. 이 책은 ‘주석’의 책이다. 국어사전에서 주석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 주석 註釋 [ 주ː석 ] 낱말이나 문장의 뜻을 쉽게 풀이함. 또는 그런 글.
그러므로 주석이란 어려운 낱말과 문장에 달라붙어 있는 보조 장치 같은 것이다. 원전에 달라붙어서 원전을 조금 쉽게 이해하게 해주는 ‘설명’은 원전보다 낮은 권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주석을 쓰는 이는 원전을 쓴 이에 비해 언제나 한 단계 아래에 앉아 있다. 하지만 주석을 쓰는 이에게는 한 단계 아래에 앉은 이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압도적인 권력이 있다. 바로 ‘해석을 독차지하는 것’이다. 해석을 전유할 수 있다면, 원전이 강력한 힘을 가지면 가질수록 그 뒤에 숨어 포악한 입을 크게 벌릴 수 있다. 때로 주석은 허수아비인 왕을 좌지우지하는 대신과도 같다. 그때 주석은 원전의 아래에 있는 게 아니라, 원전의 ‘메타meta’가 된다. 이 소설은 바로 한 단계 위에 선 주석의 이야기다.
『롤리타』는 전형적으로 ‘믿을 수 없는 화자’를 등장시킨 작품이다. 주인공 험버트 험버트는(무려 주인공인데 이름이 험버트 험버트라는 것부터 도무지 이런 놈을 믿어주고 싶지가 않다) 롤리타가 자신을 유혹했다느니, 롤리타의 성적 매력이 얼마나 압도적이었는지를 지나치게 유장하고 선정적인 어조로 묘사하지만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돌로레스’의 고통이 깊숙하게 자리하고 있다.
험버트의 입장에서 ‘롤리타’에 대한 선정적 묘사를 읽어내려가다가 문득 ‘울고 있는 돌로레스’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독자는 섬뜩한 자기혐오와 쇼크를 함께 느낄 수밖에 없다. 내가 이입하고 있던 이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끔찍한 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독자는 글 안에서 소외당하고 독자의 시선은 글의 윗 단계로 훌쩍 뛰어오르게 되어버린다.
거장의 솜씨로 완성한 독자혐오, 『창백한 불꽃』
『창백한 불꽃』은 『롤리타』보다 훨씬 세련되고 아름답게, 그야말로 거장의 솜씨로 완성한 독자혐오라고 할 만하다. 소설의 화자인 찰스 킨보트는 머리말에서 강력한 선언을 한다. 이 시대가 낳은 가장 훌륭한 시인인 존 셰이드의 원고가 제대로 읽히게 하기 위해서 이 원고를 독점했다고. 이미 고인이 되어버린 존 셰이드는 자신의 원고에 대한 입을 잃어버렸다. 오로지 원고만으로 말할 수 있는 상태에서 존 셰이드의 부인인 시빌 셰이드는 이 원고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이 원고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자신뿐이라고 단언한다. 독자는 찰스 킨보트를 믿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존 셰이드가 얼마나 굉장한 시인인지도 잘 모르지만, 찰스 킨보트의 안내를 믿고서 더듬더듬 존 셰이드의 시 속으로 기어들어간다.
999행의 아름답지만 걷기 편하진 않은 언어들 사이를 간신히 헤치고 나왔을 때, 그때부터 독자는 어리둥절의 수렁으로 빠져들게 된다. 이때까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주석을 4분의 1정도 읽었을 때 여러분은 반드시 앞쪽으로 다시 돌아가서 작가의 이름을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그렇다. 이 작가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였던 것이다. 『롤리타』에서 우리를 무려 그 미친 험버트 험버트에 이입하게 만들었던, 독자혐오의 대가.
주석 속에서 찰스 킨보트가 미친놈이라는 예시는 끝도 없이 발견할 수 있지만, 한 가지만 예시를 들어보자. 존 셰이드는 자전거에 대해서 말하며 ‘렘니스케이트 곡선’을 언급한다. 찰스 킨보트는 아무렇지 않게 이 서술을 넘어가면서 ‘나는 자전거와 렘니스케이트 곡선 사이에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고, 아무래도 운율 맞추려고 아무 말이나 쓰는 실수를 한 것 같다’ 라는 식으로 말한 뒤 휙 넘어가버린다. 렘니스케이트 곡선이란 직각 쌍곡선의 접선에 쌍곡선의 중심에서 내린 수선의 발의 궤적으로 주어지는 평면 곡선이다. 이렇게 말하면 뭔지 알 수 없으니, 그냥 렘니스케이트 곡선이 무엇인지 한번 보도록 하자.
자전거 바퀴와 렘니스케이트 곡선의 공통점은 전혀 파악조차 못하는 주제에, 시를 해석할 유일한 자격이 있다는 이 사람은 도무지 시와는 상관이 없어 보이는 ‘젬블라’라는 나라의 마지막 왕 카를에 대한 이야기는 모든 시 구절구절마다 떠들어댄다. 주석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젬블라 왕족의 이야기도 깊어져간다. 젬블라의 마지막 왕 카를, 카를을 시해하려는 그라두스, 이 젬블라 왕족의 복잡한 가정사를 이 시인이 기묘하게 시 속에 감춰두었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에 대해 말하기 위해 고드름 얘기를 했더니만, 고드름과 국왕 시해의 스펠링이 비슷하다는 말(‘stillicide’와 ‘regicide’의 각운이 일치한다면서!) 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국왕 시해 얘기를 하려고 했다고 주장하는 식이다. 주석 앞쪽에서 초고에 있다가 지워졌다고 주장한 두 행이, 사실은 없었다고 주석 중간쯤에 가서 고백하는 뻔뻔스러움에 이르러서는 이 주석을 처음부터 끝까지 믿을 수가 없어진다.
시인의 불행한 딸 이야기도, 시인의 고모 이야기도, 모조리 젬블라의 국왕 이야기로 환치되는 즈음에 가서는 이미 젬블라 왕족 이야기가 시와는 완전히 무관하다는 걸 눈치 못 챌래야 못 챌 수가 없다. 이 소설의 화자는, 우리가 믿고 따라왔던 찰스 킨보트는 독자혐오 작가가 어김없이 만들어낸 미친놈이었다.
저번엔 열몇 살짜리 소녀가 펑펑 우는데도 불구하고 강간을 하면서 ‘얘가 날 유혹했고, 얘도 좋아했다’고 헛소리를 지껄여대서 독자들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화자를 내세우더니만, 이번에 등장한 화자는 유명한 노시인에게 집착해서 매일 몰래 집을 훔쳐보고, 우체통을 뒤지고, 휴양지를 알아내서 그 옆집으로 자기 휴양지를 예약하고, 노시인이 자기를 우연히 발견하면 즐거워할 거라고 망상하고, 그런 주제에 이 시는 자기만 해석할 수 있다면서 노시인이 사랑한 부인으로부터 원고를 강탈해서 헛소리를 써제끼고 있었던 것이다. 나보코프 선생님, 독자혐오를 멈춰주세요. 시인의 동료 교수들과 부인이 원고를 빼앗아가려고 부당한 협박을 지속했다는 부분에서는 남편의 마지막 유고를 웬 광인에게 빼앗긴 부인이 진심으로 안타까워진다.
독자혐오를 당하면서도 이 책을 놓을 수 없는 이유
하지만 독자가(그러니까 나를 포함한) 독자혐오를 당하면서도 계속 이 주석을 읽고 있는 이유도 명백했다. 이 미친놈의 ‘젬블라 왕족 이야기’는 그 나름대로 하나의 훌륭한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와 아무 상관이 없긴 하지만, 도무지 사실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이 젬블라 왕족의 이야기도 섬뜩하고 아름답고 읽는 이를 매료시키기 때문이다. 왕과 왕의 주변에 있는 잘생긴 남성들 사이에서 노골적으로 등장하는 성적 흐름들, 노시인의 부인을 지나치게 평가절하하면서 노시인에 대한 기이한 집착을 보이는 찰스 킨보트의 모습은 불안하고 매끄럽게 겹쳐진다.
독자혐오의 결론은 ‘게임’으로 나아간다. 90년대 후반에서 00년대를 풍미한 게임 장르 중에는 ‘비주얼 노벨’이라는 장르가 있었다. 이 소설은 선택지도 없고 결말이 여러 개도 아니지만 그런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을 하는 것 같은 기묘한 기분을 선사한다. 독자에게 서사는 제공되지 않고, 서사 속에 있는 요소들 중 무엇을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으며, 소설 속 텍스트들이 계속 독자와 줄다리기를 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앞으로 돌아가서 시행과 주석을 비교해보지만, 이 시행이 정말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없고, 킨보트의 주석도 때로는 노시인에 대한 정보를 주기 때문에 킨보트의 말이 맞는지 틀린지도 알 수 없다. 주어진 정보들 사이에서 헤매면서 독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진실을 취사선택하는 수밖에 없다. 이것은 마치 화자 ‘찰스 킨보트’의 미친 자의식 속에서 헤매는 어드벤처 게임 같기도 하고, 그 바깥에 있는 사건의 진상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한 추리게임 같기도 하다. 무엇을 취사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이 소설의 결말과 내용은 완전히 뒤바뀌어버린다. ‘다양한 결말’을 소설 속에 가지고 있음에도, 이것은 비주얼 노벨이나 어드벤처 게임이 아니라 그냥 ‘소설’이다. 텍스트로 되어 있고, 순서대로 장수를 넘겨 읽는. 독자혐오의 결말은 최대의 자유도가 된 셈이다.
우리의 삶과 주석이 만들어내는 서사 사이
맨 처음으로 돌아가서 ‘주석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본다. 주석은 원전이 없이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서사다. 만일 주석이 독립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면 그 주석은 적극적으로 원전을 해체할 수 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원전은 말이 없다. 원전을 쓴 노시인 존 셰이드는 죽었고, 그 원고를 손에 쥔 광인은 마음껏 원전을 해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어떠할까. 독자들의 손에 주어진 광인의 서사에 주석을 달지 않고는 이 소설은 풀리지 않는다. 독자들은 나름의 밑줄을 그어가며 이 광인의 이야기에 새로운 주석을 달아나가야만 한다.
주석이 초월적인 서사가 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작품에 대한 모욕일까, 혹은 새로운 작품으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서사들을 만난다. 그 서사들은 사실일 때도 있고, 때로는 잘못 기억된 경우도 있다. 어떤 사람의 서사 속에서는 완전한 진실인 것이, 실제로 확인해보았을 때는 엉망진창으로 왜곡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인간의 뇌는 쉽게 서사를 만들어낸다.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가 떠 있으면, 쉽게 그 사이를 논리로 메워서 새로운 서사를 탄생시키고 만다. 실체적 진실과 이야기적 진실이 차이가 나는 세상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메타’로서 사유하는가.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실체적 사실 사이에 주석들을 채워가는 광인의 삶과 비슷한 것은 아닐까.
엿 먹으세요 아니, 엿 읽으세요
주석들이 쌓여서 그 자체로 서사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소름 끼치지만, 동시에 아름답기도 하다. 시의 맥락과는 무관하게 완성된 주석과 같이, 독자 역시 그 주석을 해체해서 이 소설을 하나의 서사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서사의 조각들을 그저 흩어진 광인의 헛소리 조각들로 내버려둘 만큼 인간의 뇌는 객관적 용기가 없다. 우리의 논리가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가공하고서야 안심하고 책을 덮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노시인 존 셰이드에게 찰스 킨보트가 저지른 것 같은 일을 독자는 찰스 킨보트에게 저지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소설을 어떤 형태로건 이해하는 동시에 독자는 찰스 킨보트를 경멸할 자격을 잃는다. 정말이지 다양한 형태로 작가는 독자에게 엿을 주는 셈이다.
하지만 엿을 좀 먹으면 어떠한가. 전혀 길을 제시해주지 않는 독자혐오의 웅장한 숲 속에서, 독자는 메타 서사의 늪을 헤매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 테니. 이 소설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각자의 진엔딩은 어쩌면 수십 가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몇 번씩이고 다시 읽어도 새로운 결말을 이끌어낼 수 있는 광인의 언어 속에서, 당신이 찰스 킨보트를 해체하며 찾아낸 ‘당신만의 서사적 진실’은 과연 어떤 것일까. 나의 결말은, 한 번 더 읽어보고 나서 확정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