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두 세계가 만나면서, 허물어지는 일
사랑은 두 세계가 만나면서, 허물어지는 일이다. 때론 두 세계 모두가 허물어지며 뒤섞이기도 하고, 어느 한쪽의 세계만 부서지기도 한다. 또한 어느 한 세계만이 더 단단해지고, 다른 한쪽의 세계는 온통 엉망만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사랑의 과정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는 그 사랑이 시작되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다. 또한 그것이 어느 쪽이 부서지고, 어느 쪽이 상승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손해와 이익으로 계산된다고 말할 수도 없다. 파도의 높낮이에 손해와 이익이 없듯이, 사랑도 그저 일어날 뿐이다.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기도 한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한 연인의 사랑을 처음부터 끝까지 무척 밀착감 있게 보여준다. 남자를 만나도 마음에 무언가 “없다”고 말하던 아델은 어느 날 길에서 지나가다 푸른 머리의 한 여자를 보게 된다. 그날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 여성을 상상하며 혼자 자위를 한다. 그리고 남자친구에게는 이별을 통보한다. 학교의 동성친구와 키스를 하다가 거절당하는 등의 혼란을 겪던 중, 그녀는 친구를 따라 게이바에 가게 된다. 그리고 혼자 레즈비언바까지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종전의 그 푸른 머리 여자, 엠마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자신이 순수미술을 전공하고 있다고 소개한다. 그렇게 두 세계의 만남이 시작된다.
먼저 엠마는 아델을 자신의 화폭에 초대한다. 바람이 잔잔하게 불고, 햇빛이 밝은 어느 오후, 벤치에 앉아 아델의 크로키를 그린다. 그렇게 아델은 그녀의 세계에 들어선다. 엠마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의 말을 아델에게 알려준다. 그렇다, 적어도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에 본질은 실존 앞에서 할 말이 없다. 원래 ‘나’라고 믿었던 것은 주장될 여지가 사라지고, 이 순간의 감각, 감정, 느낌이 나의 전 존재를 이끌고 간다. 옷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하얀 살결, 도톰한 입술, 푸른 눈동자, 콧방울의 모양이 전부가 되고, 그 순간이 삶을 통째로 이끌어 버린다. 우리는 내가 믿어왔던 모든 인생의 기준, 나에 관해 믿고 있던 정체성, 세상의 옳은 관념 같은 것들, 말하자면 ‘본질’을 버린다. 대신 눈앞의 ‘실존’을 따라나선다.
실존은 본질을, 육체는 관념을 탈각시켜 버린다. 둘은 서로의 육체에 탐닉한다. 비로소 아델은 자기 안에 무언가 ‘가득 참’을 느낀다. 남자를 만나면서는 키스를 하고 섹스를 해도 느낄 수 없었던 무언가가 마음에 생긴다. 감각의 강렬함이 그녀를 휘감아돌고, 그녀의 모든 것이 된다.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고, 삶의 전부가 된다. 영화는 그들의 삶에 관해 많은 것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들이 무슨 대화에 몰두하고, 어떻게 거리를 거닐고, 어떤 여행을 떠나고, 어떤 추억을 쌓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말하자면, 그들의 사랑을 이해하는 데 ‘그럴싸한 추억의 장면’ 같은 것은 그다지 제시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어떻게 서로의 몸과 각자의 감각에 탐닉하며 몰두하는지를 오랫동안 보여준다. 감각 속에 관념은 들어설 여지가 없다. 감각이 이끄는 삶에 본질은 부차적인 것이 된다.
아델은 성인이 되고, 엠마와 함께 살아간다. 같은 생활공간을 이루고, 각자의 직업을 얻는다. 엠마는 여전히 아델을 모델로 그림을 그리고, 아델은 자신이 바라던 유치원 교사가 된다. 둘 사이의 관계는 안정되어가지만, 더 이상 감각이 삶을 이끌지는 않는다. 대신 삶을 유지하는 건 두 사람의 정착된 관계성이다. 그러나 그것이 감각이 드물어지는 자리를 온전히 채울 수는 없다. 엠마는 점점 더 자신이 원래 속해 있던 예술계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걸 즐긴다. 아델은 그런 대화가 오가는 자리에 앉아 있어도, 그들의 대화를 거의 이해할 수 없다. 아델은 아이들과 하루종일 함께 보내며, 그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며 보람을 느끼지만, 그에 관해 엠마와 공유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사랑이 시작할 때는 실존이 본질에 앞서지만, 사랑이 저물어갈 때는 본질이 실존에 앞서기 시작한다. 그들이 원래 속해 있던 세계, 원래 자신의 삶이라 믿었던 것, 원래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 쪽으로 기울어간다. 엠마는 원래 자기의 세계에 속해 있던 전애인과 있을 때 더 즐거움을 느낀다. 예술에 관해 논할 수 있고, 서로의 세계를 더 공고하고 풍요롭게 만들어줄 수 있다. 아델은 그런 상황 속에서 외로움을 느낀다. 자신은 더 깊이 엠마의 세계에 속할 수는 없다. 그녀에게는 아이들을 사랑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서 보람을 느끼며, 그런 안정적인 삶이 ‘자신의 본질’에 더 맞다. 그런 자기의 본질을 내버리고, 엠마와 같은 세계에 뛰어들어, 온통 철학과 예술을 논하는 것으로 자신의 세계를 덮어씌울 수는 없다.
결국 아델은 다른 ‘감각’을 찾아나서보려 한다. 다른 유치원 남자 동료와 클럽에 가서 춤을 추고, 키스를 하고, 섹스를 한다. 그러나 감각은 쉽사리 채워지지 않는다. 다시 실존을 따라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에는 그 사실을 눈치 챈 엠마가 그녀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내 삶에서 사라져!” 아델은 그녀에게 처절하게 매달린다. 실수를 했다고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냐고 절규한다. 그러나 이미 엠마는 ‘실수’가 더 중요하다. 실수하지 않는 것, 믿음과 세계를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눈앞의 당신에게 느끼는 사랑과 감각보다는, 믿음이 깨어졌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엠마는 이제 실존보다는 관념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그가 ‘실수와 잘못’을 했다면 용서할 수 없다. 신의는 관념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사랑은 관념이나 본질을 내다 버리면서 시작되지만, 결국 관념을 지키는 일로 수렴된다. 농익은 사랑에서는, 사랑하는 사이, 관계, 믿음이 훼손되면 사랑의 감각, 실존, 육체는 무의미해진다.
몇 년이 흐르고, 아델은 다시 엠마를 만난다. 그들은 서로를 눈앞에서 응시한다. 서로가 여기 있다. 서로를 이끌었던 육체와 감각, 당신이 여기에 있다.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고, 손끝에서는 여전히 강렬한 감각이 전해온다. 그 밖의 삶이란 다 내던지고 서로에게 당장이라도 몰입할 수 있다. 아델은 다시 사랑하자고 말한다. 그러나 엠마는 거절한다. 엠마에게는 지켜야 할 삶이 있고, 구축하기 시작한 본질이 있고, 그것이 실존의 파도에 떠밀려가게 두지 않는다. 엠마는 아델에게 평생 “무한한 애틋함”을 느낄 거라고 말한다. 실존의 기억, 감각의 시간은 그리움으로 영원히 남겨진다. 그리고 나머지의 삶은 본질 그대로에 충실하며, 안정적인 세계를 구축해간다. 아델은 다시 버려진다.
사랑 후에는 삶이 온다. 사랑 앞에서 무너졌던 세계가 빨리감기처럼 다시 쌓아 올려진다. 사랑은 자신의 본질로부터 벗어나려는 투쟁이지만, 그 전쟁은 어쩌면 귀환을 예정하고 있는 원정이다. 삶이라는 건축물에는 사랑의 상흔들이 여기저기 남겨진다. 그런데 어쩌면 그 건축물은 사랑을 통해서만 지어질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랑을 딛고, 사랑을 밟고 삶을 쌓아간다.
원문: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