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외환위기로 어려운 경제 상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전국적으로 ‘아나바다’ 캠페인이 호응을 얻었다.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자’는 절약과 재활용 운동이었다. 이 운동이 최근 새로운 의미로 다시 등장했다. 자주 쓰지 않는 공구나 차량, 주거와 사무 공간, 경험과 지식까지 나눈다는 ‘신(新) 아나바다 운동’, 즉 공유경제다.
과거의 아나바다가 자원을 아껴 쓰자는 목적이 강했다면 공유경제는 공급자에게 새로운 이익의 기회를, 소비자에게는 싸고 편리한 대안을 제공하면서 교통체증 해소나 환경개선 등의 사회문제 해결까지 겨냥한다. 자가용을 사서 90% 이상의 시간을 주차장에 세워두는 대신 필요할 때마다 ‘쏘카’ 같은 공유차량을 이용하는 것이 대표적 사례다.
이런 공유차량 이용자가 늘면 주차공간 부족 등 여러 교통·환경 문제가 개선될 수 있다. 하지만 공급자, 소비자에게 모두 좋은 이 대안이 기존 산업의 생존권을 위협할 때 사회적 갈등이 생긴다.
시대적 흐름 ‘공유경제’, 누군가에겐 생존권 위협
숙박공유 서비스 에어비앤비와 승차공유 서비스 우버가 세계 각국에서 갈등과 분쟁을 낳은 것처럼 국내에서도 공유경제의 파도에 휩쓸릴 위기에 놓인 숙박업계, 택시업계 등이 사생결단의 저항에 나서고 있다.
1월 10일 서울 광화문 광장 인근 도로변에서 택시기사 임 모 씨(64)가 카풀 서비스에 반대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했다. 2018년 12월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택시기사 최 모 씨(57)가 분신한 이후 두 번째다. 이런 극단적 사태에 놀란 카카오모빌리티는 지난해 12월 7일부터 시작한 카카오 카풀 시범서비스를 중단했다. 그리고 정부와 여당, 택시업계, 카카오모빌리티가 사회적 대타협기구를 만들어 대안을 모색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들의 첫 합의가 ‘택시 카풀’이다. 당초 카카오 카풀의 사업모델은 택시를 잡기 어려운 출퇴근 시간대에 자가용 운전자와 탑승객을 연결해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택시 카풀은 자가용을 배제하고 택시를 대상으로만 카풀 중개 서비스를 하겠다는 얘기다.
대타협기구의 설명은 법인택시의 경우 운행률이 50~60%에 그치고, 개인택시는 강제 휴무일이 있는 만큼 남는 택시를 활용해 카풀을 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택시업계는 기존 영업 외에 카풀 영업도 할 수 있으니 이 안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법으로 금지된 택시 합승을 합법화 하겠다는 얘기인가’라며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다. 이런 타협책은 운전자 혼자 타는 자가용의 활용도를 높이면서 승객에게 더 값싸고 편리한 대안을 제공한다는 공유경제 취지와 큰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혁신성장’ 외쳤지만 근본 대책 소홀했던 정부
이렇게 어정쩡한 합의가 나온 것은 정부가 ‘혁신성장’과 ‘포용성장’을 함께 외치면서도 ‘공유경제의 피해자’를 어떻게 끌어안을지 치밀하게 고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카풀 서비스 같은 공유경제 서비스가 본격화할 경우 벼랑에 몰리게 될 택시기사 등 기존 산업 종사자를 어떻게 지원할 것인지 대책이 없었던 것이다. 사납금 제도와 택시 감차 문제 등이 그토록 오래 논란이 됐는데도 어정쩡하게 방치하다가 ‘목숨을 건 저항’이 나오니 깜짝 놀라, 이번엔 공유경제의 취지를 외면한 대안을 내놓은 셈이다.
유럽,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은 택시가 많지 않고 요금도 비싼 대신 비교적 고급 교통수단으로서 친절한 서비스를 기대할 수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택시 수가 많고 요금이 싼 데다 사납금을 뺀 나머지를 기사가 가져가는 구조인데 평균 수입은 생활급에 못 미친다. 그래서 고객이 몰리는 특정 시간대에 ‘골라 태우기·승차거부’가 빈발하고 난폭운전과 불친절도 많은 게 현실이다.
지난 2017년 전주에서 한 택시기사가 사납금 폐지와 완전월급제를 요구하며 510일간 고공농성을 했던 것도 이런 맥락이다. 이 문제를 수술하지 않는다면 카풀과 관련한 어떤 합의안이 나와도 승객의 불만과 기사들의 생활고를 해결하기 어려울 것이다.
전현희 더불어민주당 택시·카풀 태스크포스 위원장은 택시 카풀 합의안을 발표하면서 “해외에 우리와 비교할 수 있는 나라가 없어서 우리나라만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우리에게 맞는 공유경제 체계를 만들기 위해 정부는 ‘혁신’과 ‘포용’을 놓치지 않는 근본적 접근을 고민해야 한다.
택시업계 눈치를 보느라 ‘자가용 활용도 제고’와 ‘소비자 선택권 확대’라는 공유경제 정신을 버리는 건 혁신이라고 보기 어렵다. 택시업자가 아닌 기사들의 관점에서 사납금 문제 등을 적극적으로 해결하지 않는다면 포용의 의지를 의심받을 것이다. 승객 편의 중심의 카풀 서비스로 창출되는 이익 중 일부를 택시기사 처우 개선에 활용하는 등의 ‘한국형 해법’이 사회적 대타협기구에서 도출되기를 기대한다.
원문: 단비뉴스 / 필자: 오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