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2년 스이코(推古)가 일본 역사 첫 여성 천황에 오른다. 일본 불교를 진흥시키며 호류사(法隆寺, 법륭사)를 창건한 쇼토쿠(聖德, 성덕)태자의 고모다. 스이코 천황이 죽고, 조카손자 죠메이(舒明서명, 재위 629년-641년)천황을 이어 그의 부인이던 고쿄쿠(皇極황극, 재위641년-645년, 655년-661년)가 두 번째 여성 천황이 된다.
632년 신라에도 진흥왕의 손자 진평왕이 죽고 딸 덕만 공주가 선덕여왕(재위 632년-647년)으로 즉위한다. 647년 화백회의 의장인 상대등 비담이 반란을 일으킨 데 충격을 받고 선덕여왕이 숨지자, 6촌 동생 승만 공주가 진덕여왕(재위 647년-654년)으로 왕위에 오른다.
655년 당나라에서는 측천무후가 황후가 돼 황제 고종을 대신해 전권을 쥔다. 측천무후 때 660년 백제,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킨다. 아들 4명을 모두 황태자로 만들고, 그중 2명을 황제에 올렸던 절대권력 측천무후는 690년 직접 황제가 됐다.
흥미롭다. 신라 진덕여왕 때 당에 백제정벌을 요청하고, 당의 측천무후는 백제 정벌군을 보내고, 일본의 고쿄쿠 여성 천황은 백제 구원군을 보냈으니 말이다. 전쟁이 횡행하던 7세기 동양 3국의 여성 군주를 주인공으로 영화를 만들면…
초원을 호령하던 기마민족 스키타이도 여성 권력자나 종교지도자가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금관의 기원과 관련 있어 더욱 그렇다.
가야와 일본의 고대 여성 신관
금관가야 시조 김수로왕의 무덤이 있는 경산남도 김해시로 가보자. 부산과 김해 공항 방향에서 경전철을 타면 시가지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해반천과 나란히 달린다. 해반천 오른쪽으로 난 해반천길을 따라 수로왕릉, 대성동고분군, 국립김해박물관, 수로왕비 허황옥릉이 차례로 탐방객을 맞는다.
대성동고분군에 있는 대성동 고분박물관으로 들어가면 가야 시대 고분 제작과정을 묘사한 복원 모형이 기다린다. 봉분을 조성한 뒤 액운을 막고 영생을 비는 항아리 깨기 의식 묘사가 이색적이다. 의식을 지휘하는 인물을 보자. 오른손에 나뭇가지를 들고 왼손에 태양을 향해 구리거울을 들어 올린 여성이다. 하늘, 신과 통하는 영혼의 중재자인 신관(샤먼)이 여성이었던 거다.
무대를 일본 오사카 근교 카시하라 고고학자료관으로 옮겨보자. 고대 하늘에 제사 지내는 의식을 묘사한 복원모형이 눈길을 끈다. 사람들이 제물을 가득 담은 제기를 차려놓고 엎드려 절한다. 맨 앞에는 커다란 사슴 한 마리를 제물로 바쳤다. 그 앞으로 커다란 나무가 높이 솟았다. 나뭇가지 아래 신관이 구리로 만든 큼직한 종인 동탁(銅鐸)을 매단다.
신관을 보자. 머리를 뒤로 길게 묶은 여성이다. 가야와 일본에서 여성 신관 복원모형은 무슨 근거로 만든 것일까? 남성이 정치나 종교 분야 권력을 쥐었을 것 같은 고대사회 여성도 종교 영역에서 권위를 가질 수 있다는 증거를 찾아 나서 보자.
평창 하리 2호 석곽묘 여성 신관 추정 유골
강원도 춘천 강원대박물관에 특이한 전시물이 탐방객을 맞는다. 평창군 하리에서 2016년 발굴한 청동기 말기(초기 철기 시대) 석곽묘 9기 가운데 2호 묘를 발굴 당시 모습대로 복원해 놓았다. 진품 덮개돌은 박물관 마당에 전시하고, 덮개돌 아래 있던 석곽과 유골, 부장품은 모형으로 만들어 박물관 현관 안쪽에 설치했다.
전시실에 놓인 발굴 당시 2호 묘 사진을 보면 석곽묘의 구조를 이해하기 쉽다. 큼직한 덮개돌 아래로 얇은 자연석을 직사각형으로 세워 만든 석곽이 잘 보인다. 그 안에 시신을 펴서 누인 뒤, 각종 부장품을 넣었다. 한반도는 물론 유라시아 각지에서 보는 전형적인 석곽묘다.
이제 석곽 내부를 꼼꼼하게 살펴보자. 완전한 형태로 남은 유골은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돌렸다. 몸통은 반듯하게 누운 상태다. 두 팔을 가지런히 모아 가슴에 올렸다. 오른손바닥이 왼손등을 덮었다. 두 다리는 살짝 구부린 채 고개처럼 오른쪽으로 돌린 모습이다. 눈길을 갈비뼈 위로 돌리면 왼손 어깨와 팔꿈치 뼈 사이에 놓인 부장품이 눈에 들어온다.
구리로 만든 청동검. 청동기 시대나 초기 철기시대 정치지도자나 신관 같은 지배계급 석곽묘나 고인돌에서 출토되는 권력과 권위의 상징이다. 형태는 현악기 비파(琵琶)를 닮았다고 해서 비파형 동검이라 부른다. 만주 요령(遼寧) 지역에서 주로 출토된다고 해서 요령식 동검이라는 그릇된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고조선의 영역에서 주로 발굴되므로 고조선식 동검이란 이름이 더 적확하다.
동검 외에 오른다리 아래 화살촉과 구슬, 토기도 나왔다. 동검과 화살촉 같은 무기가 출토됐으니, 무덤의 주인공은 남성 지배자일까? 유골 조사 결과 20대 여성으로 밝혀졌다. 동검은 권력과 권위의 상징이므로 여성 신관으로 보인다.
파지리크 카펫, 여성 신관에 예의 갖추는 남성 전사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그 에르미타쥬 박물관으로 가보자. 러시아 알타이 공화국 파지리크의B.C5-B.C4세기 스키타이(혹은 월지)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된 카펫유물이 전시돼 있다. 무덤으로 물이 스며 꽁꽁 얼어붙은 뒤, 수 천 년을 동결상태로 남아 썩지 않았다.
카펫 등장인물을 보자. 먼저 왼쪽 등받이 의자에 신관이 앉았다. 머리에는 삼각형 디자인이 들어간 관을 썼다. 금관인지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가슴에는 사슴뿔 관을 쓰고 날개를 단 반인반마(半人半馬)의 신성한 인물이 장식됐다. 왼손은 입가로 올리고, 오른손은 꽃이 달린 나뭇가지를 들었다. 긴 드레스를 입은 여성 신관이다.
여성 신관 앞에 서 있는 인물은 말을 탔다. 안장을 얹었고, 말 머리와 가슴에 장식이 달렸다. 콧수염에 곱슬머리. 코가 큰 백인 남성이다. 목에 감은 목도리를 뒤로 휘날리며 말 달리는 스키타이, 혹은 월지 전사다.
중요한 점은 강한 전투력을 뽐내는 기마민족 전사가 여성 신관에게 예를 갖추는 대목이다. 여성이 종교 권력을 갖는 여성 신관문화가 초원에 일반화된 풍속이었을까? 초원 기마민족의 상징 스키타이의 본거지 흑해 연안으로 가서 확인해 보자.
우크라이나 스키타이 금관 속 여성 신관과 전사
만주 서쪽 내몽골에서 시작하는 유라시아 초원지대는 흑해 지나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헝가리 초원지대에서 끝난다. 이 지역을 오간 기마민족은 실체가 드러난 것만 B.C6세기 이후 흑해에서 동쪽으로 온 스키타이, 2세기 이후 몽골초원에서 흑해연안으로 이동한 훈(흉노)족, 그리고 13세기 몽골이다.
흑해 북부 연안 우크라이나는 스키타이와 훈, 몽골의 유물이 동시에 출토되는 지역이다. B.C5세기-5세기 1,000여 년 동안 스키타이와 훈이 남긴 빼어난 황금유물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그 에르미타쥬 박물관과 우크라이나 수도 키에프 라브라보물관이 소장한다.
하지만 에르미타쥬 황금관은 별도 요금을 내고 예약한 탐방객만 가이드 투어로 제한 공개하고, 무엇보다 촬영을 엄격히 금지한다. 이에 반해 키에프 라브라보물관은 자유롭게 탐방하는 동시에 제한적이나마 촬영도 허용한다.
촬영이 허용된 라브라보물관의 스키타이 금관을 보자. 금관과 그 밑에 귀걸이, 목걸이, 가슴 장식이 하나의 세트로 B.C4세기 스키타이 무덤에서 발굴됐다. 시선을 금관에 고정해보자. 가운데 의자에 앉은 인물 좌우로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 의자 인물은 머리에 관을 썼다. 머리에 쓴 관과 전시된 유물 금관이 같은 형태다. 의자 인물의 가슴 장식도 전시된 유물 가슴 장식과 같다.
손에 커다란 거울을 든 의자 인물은 머리가 길다. 여성 신관임을 말해준다. 여성 신관 앞에는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르고, 허리에 칼을 찬 강인한 인상의 전사가 무릎 꿇은 채 예를 올린다. 손에는 뿔 형태의 술잔을 들어 여성 신관에게 바친다. 전사 뒤로는 하프를 연주하는 또 다른 스키타이 전사가 나온다. 신성한 의식이 진행됨을 알 수 있다.
여성 신관과 전사는 알타이 공화국 파지리크 카펫의 여성 신관과 기마 전사 모티프와 겹친다. 파지리크 고분 주인공을 스키타이로 보거나 스키타이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월지로 보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여성 신관을 경배하는 스키타이 전사들의 풍속은 초원지대를 지나 가야와 일본의 여성 신관과도 맥이 닿는다.
기마민족의 상징 스키타이 여성 금관
키에프 라브라보물관에는 B.C4세기 스키타이 무덤도 복원해 놓았다. 두 팔을 펴고 반듯하게 누운 유골은 시신을 곧게 펴 눕히는 신전장(伸展葬) 형태다. 강원도 평창 하리 2호 여성묘와 같다.
오른쪽 다리를 바깥쪽으로 살짝 굽힌 유골 머리 부분에 큼직한 황금 부장품이 놓였다. 원통형 금관은 아니고 모자 앞면에 금판 띠를 여러 장 붙인 금관형 관모 황금장식이다. 금판에 등장하는 디자인 소재는 다양한 들짐승들이다. 초원문화의 단면을 보여준다.
팔에는 폭이 넓은 금팔찌를 찼는데, 오른손목에 2개 왼손목에 1개다. 가슴과 몸통 곳곳에 다양한 금장식을 화려하게 달았다. 목에는 구슬을 꿴 목걸이를 찼다. 금과 보석을 중시하는 스키타이 풍속이 잘 드러난다. 화려한 관모 금장식에 다양한 금장신구를 부착한 이 유골의 주인공은 여성이다. 무덤 주인공 복원 인물상을 옆에 세워 이해를 돕는다.
헤로도투스 “스키타이는 여신숭배”
라브라보물관에는 스키타이 무덤에서 출토한 여러 개의 금관(관모 금장식 포함)을 전시 중이다. 금관(관모 금장식)은 예외 없이 귀걸이, 목걸이, 가슴 장식과 한 세트를 이룬다. 여성용이란 얘기다. 그중 하나를 정밀하게 들여다보자.
맨 위에 고추처럼 생긴 금달개를 가득 달았다. 밑에는 나뭇가지 형상을 조각해 넣었다. 그 아래로 2줄에 걸쳐 날개 달린 상상의 동물을 다양한 동작으로 표현했다. 맨 밑에는 다시 나뭇가지 장식이다. 호전적이며 강력한 전투력으로 유라시아 대륙을 누볐던 기마민족 스키타이 사회에서 금관이나 관모 금장식은 여성들이 썼던 거다. 지배계급 여성이거나 여성 신관들이다.
가야와 일본의 여성 신관, 평창 하리 석곽묘에 등장하는 여성 신관 추정 유골, 파지리크 카펫의 여성 신관, 스키타이 금관 속 여성 신관. 여성 신관에 예를 바치며 숭배하는 스키타이 남성 전사들… 이런 내용을 유물이 아닌 기록으로 확인시켜주는 이가 있으니, B.C5세기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다.
그리스 민족 외에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등 주변 문명을 자세히 관찰해 기록으로 남겼던 헤로도투스는 그리스문명권 북방에 살던 스키타이 기록도 빠트리지 않았다. 우리가 주목할 대목은 스키타이가 여신을 숭배한다는 기록이다. 유라시아 초원 지역에 널리 퍼졌던 여성 신관 풍속의 기원에 스키타이가 자리하는 것이다.
스키타이 여성관모 금장식 사슴뿔 모티프
라브라보물관에 있는 여성 관모 금장식 가운데 눈길을 끄는 소재를 보자. 신라 금관과 선비족 머리 장식에 일관되게 등장하는 사슴이다. B.C7-B.C6세기 스키타이 무덤에서 귀걸이, 목걸이와 함께 출토된 고깔 형태 관모 금장식은 놀랍게도 사슴이 27마리나 된다.
스키타이의 사슴은 선비족의 사슴 머리장식을 거쳐 신라 금관에는 뿔만 형상화한 형태로 나타난다. 선비족의 ‘선비’는 선비족 말로 ‘사슴’이라는 뜻을 감안하면 초원문화의 상징 사슴의 위상과 사슴 금관 장식 전파에 대한 새로운 안목이 생긴다.
루마니아 은제 투구, 사슴과 새 조각
우크라이나에서 흑해 남서부 연안으로 내려가 보자. 몰도바를 거쳐 루마니아가 나온다. 수도 부쿠레슈티 역사박물관은 루마니아 각지에서 출토한 다양한 유물을 전시 중이다. 그중 은으로 만든 투구가 관심을 모은다. 머리는 물론 얼굴과 목까지 덮는 고깔 형태의 B.C3세기 투구는 은판을 두드려 펴 만들었다.
이마 부분에 빙 둘러 나뭇가지 금장식을 붙였고, 그 아래 귀 양옆으로 금장식 새와 뿔 달린 사슴을 새겼다. 새는 부리에 물고기를 물고, 발톱에 들짐승을 잡아챈 모습이다. 사슴과 새는 일본에서 신라, 선비, 훈, 스키타이에 걸쳐 일관되게 나타나는 금관, 관모 금장식, 머리 장식 소재다.
불가리아 트라키아 초화형 금관, 그리스 영향받았나?
루마니아 남쪽 불가리아로 내려가자. 고대 트라키아로 불린 불가리아는 북으로 스키타이 남으로 그리스 문명권과 맞닿았다. 트라키아 오드리시아 왕조는 B.C4세기-B.C3세기 불가리아 카잔룩을 중심으로 여러 유적과 유물을 남겼다.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 역사박물관에 찬란하게 빛나는 금관도 그중 하나다.
금테에 초원의 포식자들 조각을 붙인 금관은 스키타이 문화의 영향을 말해준다. 트라키아는 북으로 스키타이 황금 문화와 공예 기술을 받아들인 것은 물론 남쪽 그리스 문화도 받아들였다. 그리스문화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는 현장 유적으로 가보자.
불가리아 중부 내륙도시 카잔룩은 트라키아 오드리시아 왕조의 수도였다. 이곳에 수도를 세운 세우테스 3세(재위 B.C331년-B.C300년)의 이름을 따 고대에는 세우토폴리스로 불렀다. ‘폴리스’라는 이름에 그리스 문명의 영향이 엿보인다.
카잔룩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B.C4-B.C3세기 오드리시아 왕조 무덤이 여럿 남았다. 그중 가장 큰 골야마 코스마트카는 2004년 발굴된 세우테스 3세 무덤이다. 일견 산처럼 보이는 거대 봉분이 탐방객을 압도한다. 마치 신라 황남대총 봉분을 보는 느낌이다.
봉분 안에는 돌로 만든 석실이 설치됐다. 긴 연도를 지나 석실로 들어가면 시신을 안치하던 관대(棺臺)가 보인다. 침대 형태다. 돌을 깎아 만든 관대맡에 나뭇가지를 소재로 한 금관이 놓였다. 카잔룩박물관에 전시 중인 실물 금관은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가 빼곡하게 달려 화려하게 반짝인다. 초화형(草花型) 금관이다.
트라키아 오드리시아 왕조는 B.C347년-B.C342년 그리스 마케도니아 왕국에 정복당했다. 그때 마케도니아 왕이 정복왕 알렉산더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다. 필리포스 2세에게 정복당한 트라키아의 피지배 왕조 왕으로 세우테스 3세가 B.C331년 즉위한다.
이때는 B.C336년 필리포스 2세가 암살돼 알렉산더가 왕위를 이어받고 B.C334년 페르시아 원정을 떠난 뒤다. 세우테스 3세는 알렉산더가 본국에 없는 틈을 타 마케도니아 지배에 반기를 들고 이후 독립적인 세를 유지한다.
여기서 궁금해진다. 트라키아를 정복하며 그리스 문화를 전파한 마케도니아에서도 세우테스 3세 무덤에서 발굴된 것과 같은 금관을 활용했을까? 알렉산더나 그 아버지 필리포스 2세뿐 아니라 여성들도 말이다.
원문: 단비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