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스트레스, 이미지로 풀어낸 소셜벤처 ‘스트레스컴퍼니’
어둠 속에서 눈가에 쌍심지가 들어있는 일명 ‘분노 캔들’을 켠다. 심지가 타오르면서 사람들은 하나둘 분노의 순간들을 떠올리고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마음속 켜켜이 쌓여 있지만 가까운 친구나 가족에게도 쉽게 털어낼 수 없었던 속내들이다.
애 봐주기 힘들다는 친정엄마를 졸라 애를 맡겼어요. 얼마 전 친정엄마가 돌아가셨는데 저 때문에 그런 건 아닌지 자책감에 괴롭습니다.
남편 때문에 자살을 생각해본 적도 있어요.
겉으로 보기엔 ‘저들에게 무슨 고민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남부럽지 않게 사는 사람들. 그러나 말문이 트이기 시작하자 저마다 꽁꽁 싸매 두었던 상처들이 하나 둘 수면 위로 떠 올랐다. 이야기를 꺼낸 사람이나 듣는 이나 한바탕 울음바다가 된다.
이남희 스트레스컴퍼니 대표가 전해 준 분노 캔들이 만들어낸 마법 같은 순간이다.
직장 스트레스 풀려다 창업
스트레스를 상품화해 돈을 벌겠다는 엉뚱한 생각은 이 대표 스스로 겪었던 직장 스트레스에서 비롯됐다. 당시 다니던 회사의 대표는 성격이 불같았다고 한다.
많이 가르쳐주고 베풀어도 줬지만 상처도 많이 줬습니다. 한 번은 제가 인쇄 사고를 쳤는데 밥을 같이 먹다 그 소식을 접한 대표는 유리잔을 내동댕이쳤어요. 식당에서 식사하던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전 잘못했다고 빌어야 했지요. 일하면서 크고 작은 스트레스가 쌓여만 갔지만 전 대놓고 말하는 성격이 못됐어요. 예민하다 보니 남들보다 쉽게 상처를 받은 점도 있고요.
스트레스컴퍼니란 개념은 당시 너무 힘들었던 상황을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을지 혼자 생각하며 상상했던 아이디어였다.
당시 몬스터 주식회사란 영화를 보고 나서 괴물로도 주식회사를 만드는데 스트레스로 주식회사를 만들면 어떨까. 그러면 나처럼 고통받는 직장인들의 마음을 달래주고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결국 퇴사를 선택했고 땅에 떨어진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 디자인 공부를 계속하다 커뮤니티디자인이란 세상에 눈을 떴다. 커뮤니티디자인이란 디자인의 힘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교류를 이끌어내고 우리 사회가 직면한 과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향상하는 것을 말한다. 그는 “내가 하고 싶은 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을 갖게 됐다” 고 말했다.
분노 캔들에서 시작, 감정 카드·극복 양말 등 치유 상품 30가지 제작
스트레스컴퍼니는 2013년 시작해 올해로 7년 차를 맞았다. 첫 상품은 분노 캔들이었다. ‘초를 태운다고 스트레스가 풀리냐?’ ‘회사 이름이 그게 뭐냐. 스트레스를 만드는 회사냐? 이름부터 바꿔라‘라는 등 별별 비아냥거림을 다 들었다. 당시에는 심리 상담이 성행할 때도 아니어서 디자이너가 심리 관련 사업을 한다고 하니 우려의 목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디자이너로서 나만의 브랜드를 갖고 싶었던 이 대표는 처음엔 그저 ‘난 세상에 없는 걸 만들 거야’라는 일념뿐이었다. 스트레스를 푸는 사탕이나 초콜릿, 껌 등을 시도해봤지만 실패했다.
그러다 친구가 이야기했다. “초를 태우면 어떨까” 그 물음에 무릎을 탁 쳤다. 그는 그길로 방산시장에 가서 온갖 재료를 사다가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지금의 형태인 밀랍 시트를 손으로 말아서 만드는 분노 캔들을 만들었다.
화란 게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보이게 만들자. 이를 태우며 화가 사라지는 걸 느끼면 스트레스도 사라지지 않을까.
기발한 상품을 만들었다는 자기만족도 잠시, 도매시장에서 사다 놓은 재료들이 집안 가득 쌓이자 한숨부터 나왔다. 너무나 두렵고 겁도 났다고 한다.
처음엔 호기 좋게 잘 팔리면 이주여성이나 저소득층 그리고 할머니들과 함께 초를 만드는 사회적 기업을 만들면 좋지 않을까 상상했어요. 하지만 팔리지 않으니 한낱 몽상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신제품을 개발할 때마다 제작비 마련을 위해 6-7차례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했고 다행히 소액이지만 그의 제품에 호응을 주는 고객들이 있어 힘을 얻었다.
‘이러다 망하지 않을까’ ‘이일을 계속하는 것이 맞을까’ 하루에도 수차례 스스로에게 되물어보던 차에 한 잡지사에서 연락이 왔다. 스트레스컴퍼니가 재미있다며 잡지에 소개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정말 아주 조그맣게 사진이 실렸어요. 하지만 제겐 기적 같았죠. 아, 누군가 알아주는구나. 제겐 너무나도 큰 힘이 됐습니다. 시작했으니 뭐라도 해보자며 용기를 냈지요.
때마침 집밥이라는 소셜 다이닝 붐이 막 시작됐다. 집밥 모임에 나가 자신이 하는 일을 소개했더니 재밌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처음엔 교육 프로그램은 상상도 못 했어요. 그런데 초를 태우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엄청난 일들이 벌어졌어요. 그래서 분노 캔들 키트를 개발해 함께 만들어 태워 보고 스트레스를 이야기하며 화를 풀어내는 프로그램으로 발전했지요.
그는 상담 전문가가 아니다 보니 대화의 장을 펼쳐주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뿐 더 나아가지 못하는 아쉬움이 컸다. 그래서 대학원에 진학해 심리학을 공부한다.
분노 캔들에서 시작한 스트레스 해소 치유 상품은 감정 다이어리, 감정 카드, 극복의 메시지가 적힌 양말 등 30여 가지가 넘는다. 오는 3월에는 아로마 테라피 전문가와 협업으로 화를 달래주는 스프레이도 선보일 예정이다.
감정 다이어리, 치료 상담사들에게 내담자와 대화 트는 치료 도구로 인기
스트레스컴퍼니의 주요 고객들은 학교, 직장인, 정신보건센터 등의 상담 센터가 주를 이룬다. 특히 감정 다이어리와 감정 카드는 스트레스컴퍼니의 스테디셀러다.
법무부 유관기관으로 범죄 피해자들의 심리 상담을 진행하는 인천 스마일센터 배승민 센터장(가천대 길병원 정신과 교수)은 “ 스트레스컴퍼니의 감정 다이어리와 감정카드는 요즘 청소년과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이모티콘이나 캐릭터로 꾸며져 아이들의 닫힌 마음을 여는데 강력한 도구로 사용된다”고 설명했다.
아이들은 말로만 하기 힘듭니다. 감정 훈련이 안 됐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부정적인 감정은 무조건 ‘짜증 난다’로 뭉뚱그려 말합니다. 화난다, 슬프다, 서운하다, 외롭다처럼 다양한 감정이 있지만 이를 설명하지 못하니까 점점 문제가 쌓이고 공격성이 강해집니다. 감정 카드는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시각적으로 나타내 치료사와 상담자 간에 이해의 접점을 만드는 좋은 도구입니다.
- 배승민 교수
이 대표는 “스트레스 컴퍼니 제품을 상담사나 사회복지사·특수교사들처럼 전문가 집단에서 알아봐 줄 때 뿌듯함을 느낀다”고 전했다.
화병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안전망 역할
스트레스컴퍼니의 매출은 매년 조금씩 성장해간다. 그의 꿈은 스트레스컴퍼니 제품들이 정신과 치료를 필요로 하는 수준에 다다르기 전에 자신을 한 번 돌아보고 마음을 가다듬는 안전망 역할을 하는 도구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성인 프로그램을 진행하다 보면 상처의 원인이 어렸을 때의 경험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때 누군가 상처를 조금만 보듬어줬으면 이렇게까지 힘들진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로 응원해주고 등을 토닥거려주는 것이 정말 소중한 일임을 깨닫게 된 거죠.
스트레스 해소를 업으로 삼는 이 대표는 과연 자신의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까 궁금했다.
저를 들여다보니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입장에서 왠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면 안 될 것 같아 차라리 내가 욕을 먹자는 틀을 갖고 있더군요.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내가 동네 호구인가’라고 느껴질 때가 있어요. 어디까지 이를 받아들이고 어느 순간에 과감히 끊어내야 하는지 계속 마음공부 중입니다.
그는 다양한 스트레스 해소 모임을 진행하면서 자신도 이야기를 털어놓게 되고 상대방으로부터 힘을 얻는다고 덧붙였다.
어느 사람, 어느 집도 문제없는 곳은 없더군요.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부족한 점이 다른 사람에게 있으면 그것만 커 보여 부러워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그것만 가졌을 뿐 또 다른 부분은 비었을지 모른다는 거예요. 그러니 누구와 비교할 것도 부러워할 필요도 없지요. 그저 주어진 각자의 상황을 이겨내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원문: 이로운넷 / 사진: 스트레스컴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