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에는 눈썹 모양만 달라도 전쟁이 터질 태세다. 오늘의 주제는 디카페인 커피이고 친척들은 갑론을박을 벌인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것은 잘못되었지만, 디카페인 커피는 커피가 아니야!”, “맛도 향도 똑같은데 커피가 아니라니요!”, “반쪽짜리를…”
음료계의 거목 마시즘은 어디 있을까? 쪼랩이어서 믹스커피를 타고 있다. 하지만 나 역시 디카페인과 사투를 벌인다. 아까 믹스커피가 떨어져서 초록색 맥심(디카페인이다)을 탔는데. 뭐가 디카페인 커피일까. 어쩌자고 이런 걸 만들어서 우리를 헷갈리게 하는 걸까?
커피에서 카페인이 분리될 때
1819년, 문과와 이과의 역사적인 만남에서 카페인이 발견된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작가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가 페르디난트 룽게(Friedrich Ferdinand Runge)라는 화학자에게 궁금증을 던진 것이다.
몇몇 문헌에는 ‘와인을 좋아하는 괴테가 커피가 유행하자 이 녀석의 정체를 알려달라’라고 문의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괴테 역시 단골 커피 하우스가 있었고, 하루에 20~30잔까지 마셨다는 기록을 보면 그것은 아닌 모양. 괴테가 문학으로 유명하지만 과학자이기도 했기에 나온 자연스러운 의문으로 보인다.
괴테의 문의를 받은 룽게는 커피 열매에서 쓴맛이 나는 하얀색 분말을 분리한다. 카페인(Kaffein, 영어 Caffeine)의 발견이다. 커피 안의 카페인은 중추신경계를 자극해 졸음을 쫓고, 뇌를 각성시켜 야근을 하게 만드는(?) 효능을 가지고 있다.
디카페인의 탄생은 복수극?
커피는 유럽 사람들에게 축복 같은 음료였다. 하지만 동시에 커피 의심론자들도 늘어났다.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3세는 커피가 독약이라고 믿고, 사형수에게 매일 마시게 하기도 했다. 물론 사형수가 구스타프 3세보다 오래 살았다는 것이 함정.
독일의 루드빅 로젤리우스(Ludwig Roselius)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는데. 아버지의 사망원인을 과도한 카페인 섭취(그의 아버지는 직업적인 커피 시음가)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커피 때문에 아버지를 잃은 루드빅 로젤리우스 역시 커피계에서 일을 했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1903년, 루드빅 로젤리우스가 운송하던 커피 원두가 바닷물에 침수되는 일이 벌어진다. 겨우 육지로 건져온 커피 원두로 커피를 만들었는데 특유의 각성효과가 없어진 것을 발견한다. 그는 연구팀에 이를 알렸고 새로운 형태의 커피를 만든다. 바로 디카페인 커피(Decaf coffee)다.
그는 소금물에 커피콩을 찐 후, 벤젠이라는 용매를 이용해서 카페인을 제거했다. 드디어 아버지의 목숨을 잃게 한(?) 카페인을 없애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그가 사용한 벤젠이 발암물질이었다는 것이 함정. 물론 현재는 벤젠을 이용해 디카페인 커피를 만들지 않는다.
디카페인에는 카페인이 남아있다?
‘커피의 맛과 향을 보존하고 카페인만 제거한다’는 발상은 많은 커피 연구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현재는 다양한 방법으로 커피콩 안의 카페인을 제거한다. 쉽게 증발하는 염화메틸렌이나 아틸아세테이트 등의 용매로 커피콩을 세척해 용매가 카페인을 안고 공기 중으로 날아가는 방법이다(덧 : 화학용품을 쓴 디카페인 커피는 국내에 수입이 되지 않는다고).
화학물질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활성산소필터로 카페인을 걸러내는 ‘스위스 워터 프로세스’, 고압력의 이산화탄소를 쏘아 카페인을 녹여내는 ‘이산화탄소 추출법’ 등 원두의 맛을 보존하면서 카페인을 제거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다만 후자로 갈수록 점점 비싸진다는 게 함정이지만.
하지만 이런 방법으로도 커피콩 안의 카페인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한다고 한다. 이렇게 용을 써서(?) 없애보았지만 디카페인 커피에는 10mg 이하의 카페인이 남아있다고 한다. 성인 하루 카페인 섭취 허용량이 400mg(청소년은 125mg)에 비하면 적은 양. 사실 이 이상 제거하면 정말 커피가 아니라 커피 향 물이 아닐까?
디카페인, 누군가에게 고마운 한 잔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디카페인 커피’는 무알콜맥주 혹은 콩고기 같은 것이다. 아무리 잘 만들어봐야 원본을 따라한 메타몽 아닌가 싶다. 가격도 더 비싼 것 같은데, 맛은 더 부족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정말 고마운 한 잔이다. 미팅, 회의, 미팅, 회의, 야근으로 카페인에게 멱살을 잡혀 끌려가는 사람들에게 한템포 쉬어갈 수 있는 찬스가 되기도 하고, 임산부들이나, 카페인에 민감한 사람들에게는 안심하고 마실 수 있는 커피가 된다. 모든 사람이 좋아할 필요는 없다. 어떤 음료를 통해서 고마운 하루가 생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으로 그 음료는 충분히 가치가 있는 법이니까.
원문: 마시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