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맛 우유는 목욕탕에서 쭈글쭈글해진 손으로 마셔야 진리다”
목욕탕의 바나나맛 우유. 이 녀석이 있었기에 아빠의 모진 때밀기 스킬(?)을 견뎌낼 수 있었다. 일찍 목욕을 마치고, 엄마와 누나를 기다리며 마셨던 바나나맛 우유는 행복의 맛이었다. 여전히 바나나맛 우유를 마실 때면 그때의 달콤한 기억이 올라오는 듯하다.
바나나맛 우유는 요즘에는 목욕탕이 아닌 기차역에서 가장 잘 팔리는 음료가 되었다고 한다.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목욕탕을 가던 어린이들이 다 커서 기차를 타기 때문이 아닐까?
오늘은 하루에 60만 개가 팔리는 전 국민의 추억 꿀단지 바나나맛 우유에 대한 이야기다. 항상 그 모습 그대로일 것 같은 이 음료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화학회사가 왜 우유를 만들어?
서울우유가 한국 우유의 역사라면, 바나나맛 우유는 한국 가공유의 산증인이다. 지난 「한국 우유의 역사」에서 이야기했지만, 60년대 후반은 ‘우유소비장려’ 정책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문제는 한국사람은 소화효소가 부족했다는 것. 하얀 우유는 화장실 직행 티켓과 다름없었다.
그래서 유행한 것이 가공유(우유+성분이나 향미 추가)다. 귀한 과일이었던 바나나향을 가지고 ‘바나나맛 우유’를 출시한 것이다. 당시 어린이들에게 인기폭발. 목욕탕에 갔을 때 바나나맛 우유를 마신 것은 “키가 크려면 우유를 마셔야 한다”는 부모님의 입장과 “맛없는 것은 마실 수 없다”는 아이의 입장의 중재안이 아니었을까?
바나나맛 우유는 처음의 형태와 맛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출시 당시에는 ‘빙그레’ 바나나맛 우유가 아닌 ‘퍼모스트’ 바나나맛 우유라는 것이 함정(이거 알면 아재가 아니라 할아재라고…). 바나나맛 우유는 대일 유업에서 퍼모스트와 기술제휴를 하면서 나온 음료였다. 하지만 제품도 나오기 전에 통장이 바닥을 쳤다.
이때 등장한 곳이 한국 화약 주식회사. 줄여서 ‘한화’다. 한화의 창업주이자 국내 최초 다이너마이트를 생산해 ‘다이너마이트 킴’이라고 불리던 김종희 전 회장이 우유사업을 고민한 것이다. 굉장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당시 농림부 장관까지 나서 설득을 했다고 한다.
1973년, 한국 화약 주식회사는 대일 유업을 인수한다. 그리고 다음 해에 ‘바나나맛 우유’와 ‘투게더’가 출시된다. 다이너마이트… 아니 복권이 터진 것이다(83년에는 요플레, 92년에는 메로나까지). 70년대 말 퍼모스트와 제휴기간이 끝나면서 상표가 ‘빙그레’로 바뀐다. 1992년부터는 한화그룹과 분리되어 경영이 되고 있다.
눈으로 먼저 마시는 단지의 비밀
1974년 출시된 바나나맛 우유는 현재까지 가공유 판매 1등을 놓쳐본 적이 없다. 맛 때문일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독특한 ‘포장’이 한몫했다. 코카콜라, 앱솔루트처럼 병만 봐도 그 음료를 알아볼 수 있는 것. 이러한 포장 용기를 ‘트레이드 드레스(Trade Dress)’라고 부른다.
왜 이런 모양을 만들게 되었을까? 먼저 1970년대 산업화 시대에 농촌에서 대도시로 온 이들이 많아서 그들을 겨냥한 고향생각 디자인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연구팀이 도자기 박람회에서 본 ‘달 항아리(백자대호)’를 보고 영감을 얻은 것은 분명하다고.
문제는 출시 당시에 반대가 많았다는 것. 음료의 폭이 넓어 손으로 잡기 힘들고, 유통이나 보관하기가 불편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달항아리에 꽂힌 연구팀은 여기에 첨단 기술(?)을 쏟아 넣는다. 먼저 바나나맛 우유 중간 걸리는 돌출 턱을 만들어 손에 걸리게 한 것. 그리고 그 아래 위로 작은 돌기들로 줄을 만들어 그립감을 늘렸다. 이런 기술은 한국에서는 만들 수 없어서 독일에서 용기를 생산했다고 한다.
아시다시피 바나나맛 우유는 독특한 모양 때문에 더욱 인기를 얻었다. 70년대의 우유는 대부분 유리병 아니면 비닐팩에 담겨 있었는데 한 발 앞서 플라스틱 용기를 사용한 점이 주목받았다. 나중에는 단지 모양이 바나나맛 우유를 상징하는 모양이 되었다. ‘겉보다 속이 중요하다’는 바나나맛 우유에게는 통하지 않는 말이다.
색깔론, 바나나는 원래 하얗다
바나나맛 우유 천하는 약 30년 동안 태평성대를 이룬다. 2000년대 초반에는 ‘빙바사모(빙그레 바나나맛우유를 사랑하는 모임)’이라는 팬클럽까지 있을 정도였다. 다른 바나나맛 우유들이 있었지만 ‘단지 우유’의 아성을 넘을 수 없었다. ‘바나나는 원래 하얗다’가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2007년, 매일유업에서 ‘바나나는 원래 하얗다’가 출시된다. 이름처럼 우유색이 하얀색인 바나나 우유다. 일단 바나나의 껍질을 까 본 사람이라면 뒤통수가 얼얼한 네이밍이었다. 맞다. 바나나는 속이 하얀 과일이었지.
여기에 두 번째 콤보는 제목 옆에 달린 ‘무색소’라는 표기였다. 이 말은 즉슨 노란색 바나나맛 우유들은 모두 색소를 썼다는 것. 네이밍과 스펙이 도발적인 녀석이었다.
여기에 광고까지 곁들었다. 엄청난 광고였냐고? 아니다. 만듦새가 조악한 셀프디스 광고였다. 가정용 6mm 카메라를 가지고 만든 대화 영상이 다였기 때문이다.
- A : 이거 지금 바나나가 원래 하얗다가 말이 됩니까!
- B : 워… 원래 속 먹는 부분은 하얗거든요
- A : 그래서 어쩌라고요. 안 팔리는 걸 어쩌라고요!
<그것이 알고싶다>를 떠올리게 하는 이 광고는 리형윤 감독의 작품이다. 2007년 출시된 해에 대한민국 방송광고 페스티벌 F&D 부문에서 작품상을 수상하였다(2014년도에 유병재가 리메이크했다). 여기에 ‘원래 하얀’ 축제 등 노란색 바나나맛 우유를 만드는 회사들을 초긴장 상태로 만들었다.
아마… 한두 군데가 더 하얀 바나나맛 우유를 만들었다면 몰랐을 텐데. 아쉽게도 매일유업의 판 뒤집기는 실패했다. 사람들은 바나나는 원래 하얗다에 동의하면서도 빙그레 바나나맛 우유를 찾았다. 빙그레를 궁지에 몰았지만 사람들의 습관을 무너뜨릴 한 방…이 부족했다.
아재 음료를 넘어서
그렇게 싸운 지가 벌써 10년이 지났다. 심지어 바나나맛 우유는 불혹에 접어든 아재 음료가 되었다. 바나나맛 우유는 모양과 맛만 빼고 많은 것을 도전했다. 이를테면 ‘이제 우유를 뛰어넘는다’ 정도라고 할까?
먼저 젊은 사람들이 광고를 보지 않고 체험을 좋아한다는 것을 캐치한다. 2016년에 동대문에 ‘옐로 카페’를 만들어 핫플레이스를 만든 것은 좋은 전략이었다. 거기에 이어 올리브영과 함께 바나나맛 우유 화장품(코스메틱이 아니라 푸드메틱이라고)을 완판한다.
2017년에는 ‘마이스트로우’ 시리즈를 만든다. 자이언트 빨대, 링거 빨대 등 갖가지 빨대 모양을 만들어서 마시즘의 주머니를 털었다. 그리고 세계 3대 광고제 중 2곳(뉴욕 페스티벌, 클리오 광고제)을 털었다. 비록 오디맛우유와 귤맛우유는 취향이 아니었지만. 장수 브랜드가 ‘요즘 브랜드’로 남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한다는 점을 몸소 보여줬다.
바나나는 원래 하얗다는 조금 ‘음료’에 집중한다. 색소 무첨가에 이어 저지방 가공우유라는 콘셉트를 가져가고 있다. 맛은 더욱 가볍게 가져가고, 향은 바나나의 느낌을 살리고 있다. 패키지도 몇 번의 변화를 거쳐서 굉장히 날씬한 형태로 변했다.
이런 부분에 투자한 덕분에 2017년에 불어닥쳤던 ‘바나나우유 제품의 25%는 우유가 아니다’라는 논란을 피했고. 도발적인 신인에서 10년 차 베테랑이 되었다. 딱히 카페나 굿즈를 만들지 않아도 대항마 이미지 덕분에 여전히 젊은 브랜드처럼 보이는 것도 장점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끝날 바하(바나나는 원래 하얗다)가 아니지.
200원 차이가 승패를 가를 수 있을까?
지난해 국회의원 연봉 인상만큼이나 충격적이었던 것은 바나나맛 우유의 가격 인상이다. 지난 6년 원유 인상가를 몸으로 품었던 빙그레가 바나나맛 우유를 1,300원에서 1,400원으로 인상시킨다는 소식에 많은 이들이 절망(?)했다. 국회의원은 마실 수 없지만, 바나나맛 우유는 마시는 거잖아!
바나나는 원래 하얗다에게는 2번째 기회다. 편의점 기준으로 1,200원에 판매되기 때문이다. 과연 수십 년 동안 마셔온 바나나맛 우유의 추억 보정을 200원이 깰 수 있을지가 올해 두 음료의 전투를 기대하게 한다.
사실 진짜로 대비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이미 우유만 마시는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다. 저출산으로 유아를 대상으로 한 시장은 줄어들고, 귀리우유나 아몬드우유 같은 식물성 우유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바나나가 저렴한 과일이 되었다. 가난한 자취생 마시즘의 데일리 과일이다.
이야기가 긴 만큼 고민도 깊어진다. 바나나맛 우유와 바나나는 원래 하얗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나는 무엇을 마시지?
번외 : 빙그레에 가고 싶다면
빙그레에 취업을 준비한다면 자기소개서, 면접에서 절대 써서는 안 될 말이 있다. 바로 ‘목욕탕에서 바나나맛 우유를 마신 추억’이다. 쓰는 순간 탈락 확정. 지원자들이 너무 많이 써서 지원동기 문항을 바꿀 정도라고 한다.
그렇다고 오래된 빙그레 야구팬이라는 것도 비추다. 그것은 당신이 보살이라는 사실밖에 증명할 수 없다…(ㅊㄱㅎㅎ)
원문: 마시즘
참고문헌
- [핫피플] 세상에 없는 맛을 만드는 사람들, Life&People, 견다희 기자
- 바나나맛 우유 인기는 독특한 용기 덕분?, 중앙일보, 김현호 국제특허 맥 대표 변리사
- 한국의 디자인 아이콘 바나나맛우유, 디자인하우스, 김민정 기자
- 역발상의 힘, “하얀 바나나우유가 말이 돼?”, 한겨레, 김은형 기자
- 더 맛있고, 더 날씬해진 ‘바나나는 원래 하얗다’, 동아일보, 태현지 기자
- 콘텐츠의 힘 빙그레 바나나맛우유 성공기, 한국금융, 신미진 기자
- 빙그레 ‘바나나맛 우유’ 6년만에 가격 인상, 중앙일보, 이지상 기자
- 빙그레, 하반기 공채 진행 신입 초임은?, 잡앤조이, 이진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