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3년을 포함해, 총 10여 년을 회사에 다니며 직원으로서 또 경영자로서 ‘좋은 조직이란 무엇일까’하는 고민을 인생의 화두처럼 찾아왔다. 나는 어떤 조직에 다니고 싶고, 나는 무슨 일을 하고 싶고, 조직은 어떨 때 강해지고 어떨 때 약해지며, 조직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질문들 말이다. 어떨 땐 주주가치가 아닐까도 생각했고, 매출 극대화, 영업이익 극대화, 존속 가능성 극대화, 직원들의 복지후생, 행복도, 장기근속 가능성, 성장 기회 및 동기 부여, 비전, 사회적 임팩트, 고객 가치 극대화, 이런 것들이 아닐까 생각도 했다. 물론 모두 부분적으로 맞다. 또한 목구멍이 포도청이어서 어쩔 수 없이 뭔 짓이라도 해서 먹고 살아야겠기에 존재하는 하부구조적인 구성체라고 해도 상당 부분 맞다.
그러나 언제나 그런 설명에 더 나은 합리적 대안이 있었다. 예컨대 사회적 임팩트를 높이고 싶으면 비영리 기업을 하면 되고, 주주가치를 높이고 싶으면 우리 회사보다 더 좋은 주식에 투자하라고 유도하면 되고, 매출을 극대화하고 싶으면 카드깡을 하거나 역마진으로 유통업을 하면 되고, 복지후생은 비단 회사에서 책임질 게 아니라 훌륭한 개인사업자가 되도록 도와주면 되고, 장기근속 가능성이란 게 사실 뭔지 잘 모르겠고, 나 같으면 개인의 행복을 위해 인터넷 잘 되는 부탄 같은데 들어가서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돈 되는 공부해서 먹고 사는 게 결과적으로 더 큰 행복을 줄 것도 같다. 모든 생각에는 제법 적절한 대안이나 반론이 존재했다. 무엇 하나가 답이라 이야기하기 힘들다.
조직은 왜 존재해야 하며 우리는 개개인으로서 어디에 다다르고 싶은 것일까. 물론 기업으로서 우리는 굉장히 중요한 고객들을 모시고 있고 그 고객들의 삶이 결정적으로 바뀌는 경험을 선사하고 싶다. 그렇게 함으로써 업계도 사회도 바뀔 것이고 더 나아가 세상이 바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 가슴을 뛰게 하는, 하루의 원동력이 되는 일이며, 그 누구보다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일이다. 우리가 없으면 세상은 조금이라도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우리’는 두물머리라는 법인격체로 상징되는 것이고, 구성원 모두의 삶을 아주 직접적으로 정의하지는 않는 것 같다. 지금까지 떠난 사람들, 앞으로 떠날 사람들, 새로 들어올 사람들은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우리 모두는 개인으로서 결국 회사를 떠날 것이다. 그렇다면 남아있는 회사가 우리인가 우리의 각자의 삶이 우리인가, 나의 주식이 우리인가 이 추억이 우리인가 이 학습과 성장이 우리인가 어느 특정 시점만이 우리인 것인가. 구성원 각자의 야망, 각자의 희망이 모여 이러한 조직이 된 것이다. 모두가 법인격의 꿈만 먹고 영원히 살아갈 순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자리에 모여서 어떤 하루하루를 살고 싶은 것일까? 선배에게 기분 나쁜 인격모독 듣지 않고, 바보 같은 명령에 복종하지 않아도 되고, 약간의 시간적 자유나 원했던 책임과 권한을 받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겐 충분히 좋은 회사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당연한 권리만으로 궁극적인 행복은 달성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것이 ‘매우 우수한 인력과 어깨를 같이 하며 일할 수 있는 즐거움’이라고 다소 막연히 정의했었다. 내가 열심히 창의적으로 일할 줄 알고 더 큰 성장에 목 말라 있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만 모아놓으면 그 자체로 행복이 달성될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이것도 상당히 강력한 동력이다.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 되어주고, 서로가 서로에 대한 존중감으로 출근한다는 것은 대단히 희소한 문화이다. 그러나 일주일에 한두 번씩 감사를 느끼는 이런 마음만으로도 부족하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있고, 더 우수한 인력이란 무엇이며, 함께 추구해갈 문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 구체화되지 않았다.
최근에야 정리가 되었다. 어쩌면 애플의 문화에서, 브릿지워터 어소시에이츠의 문화에서, 제이피모건의 문화에서 이미 다 들어 알고 있었던 내용이었다. 우수한 사람들이 모여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서로 ‘아이디어’ 혹은 ‘의견’으로 자유롭게 싸울 수 있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닐까. 애초에 21세기의 일이란, 서로의 물리적인 업무 성과만이 아니라 ‘아이디어의 교환’을 통한 논리의 정교화, 그리고 그것의 실행일 것이다.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이란 머리를 써서 논리들을 검토하고 때론 직관도 활용하여 더 나은 답을 도출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서로의 지혜를 합쳐볼 필요가 있고, 그 지혜를 합칠 때 한 개인의 지혜보다 높고 강한 지혜가 발생한다. 그러나 이렇게 일을 하기는 쉽지가 않다.
첫째는 일반적으로 서로 간의 토론 없이 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토론과 개선을 요하지 않는 일에 더 익숙하다. 일반 회사에서는 업무의 종류에 따라 많게는 99%가 그런 일들로 채워지기도 한다. 나에게 익숙한 업무와 관행의 옳고 그름을 치열하게 고민할 일이 별로 없으니, 남의 의견을 들어야 할 일도 일반적으로 별로 없다. 게다가 윗사람이나 전임이 업무의 범위와 목적을 정확하게 지적해줬다면 더욱이 할 일만 하면 되는 식이 된다. 토론 자체의 여지가 없다. 생각하지 않고 그저 몸으로 혹은 자동화된 사무 능력으로 때려 넣어야 되는 노동, 그런 노동이 너무 많아 아이디어의 조화를 느낄 일이 없다. 게다가 나마저도, 혼자 그렇게 달려나가는 것이 능력이라고 믿어 왔던 것 같다.
둘째는 자존심과 정치 때문이다. 정치라 하면 해당 개인이 특별히 남에게 아첨하고 싶은 마음이 유달리 커서는 아니다. 그저 자신의 ‘입지’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설명하기 이전에 아이디어의 형태를 조금 더 해부해보자.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족이나 친구나 직장 동료에게 의견을 제시하는 데는 몇 가지 층계가 있다. 특히 ‘논리 과정’과 ‘내 입장’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협상학에서 ‘내 입장’은 position이라 하는데, 한마디로 그냥 내 입장과 내 결론과 내 주장이다. 논리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보자.
주말에 놀이공원을 놀러 가기로 했는데, 남편은 ‘나는 가기 싫어’라고 하면 논리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지만 그냥 입장이다. 부인이 ‘나는 가고 싶어’라고 해도 역시 입장이다. 두 입장이 다르니까 이제 누가 양보하느냐의 감정 문제나 배려의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러다가 ‘나 방금 기분 나빠졌어’라는 말이 나오면 이 역시 입장이고, 이런 싸움은 대개 ‘나는 그 말 듣고 더 기분이 나빠졌다. 나 무시함?’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이런 주장과 입장이 난무하는 자리는 피곤하다. 반면 ‘주말에는 놀이 공원에 사람이 너무 많으므로 차라리 평일에 휴가를 내고 함께 가면 어떨까?’는 ‘논리(아이디어)’와 ‘대안’으로 이뤄져 있다. 서로 아이디어를 모아서 찬반론을 모을 수 있으면 더 좋은 결론에 도달하기 쉽다.
물론 어떤 친구나 어떤 배우자나 어떤 상사는 이렇게 따박따박 논리를 펼치는 사람을 극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결국 ‘자기주장’만 관철되기를 바라고 논리적 근거들을 함께 펼쳐보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신호다.
내가 결국 원했던 일상은, 뛰어난 논리들을 함께 테이블 위에 펼쳐놓고 최선의 지적 활동을 할 수 있는 문화이다. 내가 누구이든, 이 테이블 위에 작으나마 무언가를 일분일초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하고 자유롭게 하는 것 같다. 누군가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듣고 받아들여야 하는 입장이 아니라, 혹은 나의 주장을 펼쳐서 남에게 강요해야 하는 입장이 아니라, 수십 명 혹은 수백 수천 명이 모여서 아이디어를 덧대고 올려서 집단지성을 극한으로 발휘하는 것이 우리 모두가 꿈꾸는 삶이 아닐까. 그러니 돈을 받지 않아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스스로들 기여를 하는 것 아닐까.
사실 생각해보면 답은 간단했다. 실무자라면 무의식적으로 원하는 업무환경이 다 비슷하리라 생각한다. 개발자, 설계사, 예술가, 심지어 운동선수마저도. 아이디어를 쌓아놓고 여러 의견의 이점들을 꼼꼼히 살펴 논리적 허점이 없는지를 보고, 무엇이 더 합리적인지를 살피는 것이 팀워크의 즐거움이다. 서로의 관점과 관점이 더해져 더 넓은 스펙트럼의 지혜로 모아지는 것 말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역시 쉽게 발생하지 않는다. 주장과 아이디어의 차이를 구분 못 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주장이 난무하다 보면 결국 어느 순간 위에서 얘기한 자존심 싸움이 된다. 또한 정치 싸움이 된다. 어느 흔한 대기업의 상황을 생각해보자.
김 부장 : 이 프로젝트는 안됩니다. 안돼.
이 부장 : 이 프로젝트는 무조건 됩니다.
박 전무 : 아니, 도대체 왜 된다는 건지 좀 더 자세히 얘기해보게.
김 부장 : 이 부장이 하는 얘기는 다 헛소리구요, 제 20년 느낌상 이건 무조건 안 되는 겁니다. 된다고 하는 사람은 완전 멍청이죠.
이 부장 : 알다가도 모르겠네, 도대체 이게 왜 안된다고 하는 건가요, 실패할 수가 없다니깐요.
박 전무 : 아 모르겠다. 일단 하는 걸로 해볼 테니까 이 부장이 알아서 하고…(잘 안되면 각오해) 아 몰라.
이미 이런 상황이 되어버리면 아이디어를 모을 여지는 없고, 논리를 검토할 여지도 없다. 상대방이 망하지 않으면 내가 죽는 싸움이 된다. 이런 문화는 반대로 나아가고자 노력하지 않는다면 조직 안에서 언제든 어떻게든 반드시 곰팡이처럼 나타날 것이다. 아이디어를 부지런히 내고 투명하게 소통하며 진지하게 고민해보는 것이 평가의 절대 요소가 아니라면, 누구나 정치적 부담을 느낀다. 또, 혼자서 아무리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다른 팀원이 아이디어가 아닌 주장으로 서로의 입지를 건드리면 팀워크는 무너진다. 팀원 단 한 명이라도 ‘저 친구 요새 말이 너무 많네. 아이고 시끄러워. 니 말은 틀렸어 인마 알지도 못하면서 웃기고 있어’라는 뉘앙스를 주면 거기서 그 조직은 끝이다.
이를 레이 달리오는 idea meritocracy 라고 부른다. 민주주의가 아니라, 아이디어의 질에 의해서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아이디어가) 권력을 갖는 사회이다. 모든 권력은 아이디어의 질에 의해서 논조로서만 존재한다. 그러니 더 좋은 아이디어를 열심히 만들어내면 되고, 나쁜 아이디어를 아무리 많이 내거나 결과가 실패해도 상관없다. 끝없이 아이디어가 흐를 수 있고 그 누구도 정치적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최상위 아이디어 공장’을 만드는 것을 조직의 목표로 하였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직원들은 너무나 편안하고 행복하게 지낸다고 한다.
하기야 나도 그렇다. 어떤 아이디어라도 심도 있게 논의해볼 수 있고 서로 상처를 주지 않을 것이 확실한 친구와의 시간은 얼마나 즐겁단 말인가. 반대로 무슨 아이디어에도 주장만 남발하는 친구나 동료는 얼마나 부담스러웠는가. 그러나 이런 아이디어 중심주의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지 않아 아주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서로에게 전혀 다른 뜻이 없음을 어필하여 신뢰를 쌓아야 하고, 아무 때나 어떤 사안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딴 뜻 없이 아이디어를 논의할 수 있는 자세와 용기와 절제력이 필요하다. ‘이거 좀 후지지 않나?’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주장이다. ‘이거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건데 이렇게 뒤집어볼 수 있지 않나?’가 아이디어다. 그 둘의 차이를 명확히 구분해서 연습해야 한다.
인문학도들과 경영자들은 원체 직관적 판단을 강요받고 평가받아, 결국 해괴한 수직계열화의 함정에 빠지고 만다. 모든 조직이 꺾이는 시점, 정치가 살아나는 시점, 실무자들이 일이 재미없어지는 변곡점이 이때가 아닌가 한다. 아이디어를 미처 다 모으지 못했어도 결론을 팍 내려야 하는 상황 때문에, 점점 무속인처럼 더욱 직감에 의존하게 된다. 그리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직감으로 반박하거나 직감으로 무시하거나 직감으로 칭찬하고 만다. 이런 것을 적극적으로 타파하고 매일 매일 더 많은 아이디어를 쌓아 올려, 실패에서 배우고, 성공에서 함께 성취감을 느낀다면 그것이 좋은 문화이리라 확신한다.
그것이 내가 살고 싶은 앞으로의 10년이다. 매일 매일을 뛰어난 지성들과 자존심을 내려놓고 뇌의 깊숙한 곳, 세계의 드넓은 곳까지 논리의 고하를 검토하며 나아가고 싶다. 그래서 그게 우리 조직이 조직원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일상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원문: juliuschun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