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극한직업은 예상과는 달리 상당히 재미있는 형사 코미디물이었다. 감독은 관객의 관습적 기대를 잘 파악하고 있었고, 그 기대들과 밀당을 하며 재미를 뽑아내고 있었다. 적당히 치밀하고 적당히 무능한 주인공 형사들은 열심히 범인을 추적하지만 결국 범인은 마을버스가 잡아낸다. 그들은 실적 부진으로 팀이 해체되기 직전 팀의 명운을 걸고 마약 조직의 거물을 잡기 위해 잠복을 하는데 잠복을 위해 인수한 치킨집이 지나치게 잘 되면서부터 이야기는 꼬이기 시작한다.
그러다 조금 특별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장면은 도청 중이었던 범죄조직의 조직원들끼리 결투를 하는 장면이었다. 그 조직은 폭력범들과 마약범들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건물 안에서 텔레비전 채널 다툼을 하다 투닥거리고 있었다. 지켜보던 중간보스는 서열정리를 하라며 싸움을 시킨다. 조직원들은 웃통을 까는데 모두들 대단한 근육질이었고, 격투 장면들은 상당히 격렬하게 연출되어 있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감독은 왜 이 부분에서 힘을 주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전체 이야기 구조에서 아무런 중요성도 없고, 앞으로 극 전개에 있어서도 별다른 기능이 없다. 물론 코믹한 상황 연출로서 재미를 주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로 힘을 줄 필요는 없었다. 극적 효과를 예상하지 못한 채 만들어진 둔한 장면이라기에는 감독은 매우 능수능란했다.
사실 가벼운 상업 코미디물의 장점은 서사에 빠져듦으로써 생겨나는 긴장감이 덜하다는 점이다. 관객 누구도 범인을 잡지 못할까봐, 주인공이 죽을까봐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 속의 액션은 눈요기, 그러니까 사실상 액션 그 자체를 위한 액션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한 걸은 더 나아가 액션에서 극적인 맥락을 완전히 거세해 버림으로서 눈요기를 전면화 시킨다. 이는 의도치 않게 장르 속 액션의 기능을 전시함으로서 객관화하는 효과를 낳는다.(이런걸 모더니즘 영화의 특징이라 했던가?)
감독은 거의 강박적으로 자신의 영화가 어떤 사회적/미학적 의미에 사로잡히는 것을 피해가고 있다. 가벼운 장르 코미디물이야말로 어쩌면 사회적 맥락에 기대었을 때, 이를테면 이 영화에서는 자영업 과잉시대의 사장님들의 애환과 같은, 훨씬 더 효과적으로 공감을 얻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감독은 그런 사회적 요소들을 철저히 배제하거나 순간적인 코드로 이용하고 있을 뿐, 영화 전체를 지배하게 하지 않는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 철저함이야 말로 감독의 자의식을 드러내고야 만다. 어쩌면 감독은 완전히 의미가 휘발된 완벽한 ‘충무로 상업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 영화를 극장에서 고르는 순간 다른 관에는 뺑소니 검거반을 다룬 ‘뺑반’ 이라는 영화의 예고편이 보였는데, 나는 그 영화와 이 영화를 거의 구분할 수가 없었다. 이 영화가 유일한 조조 가격에 체크카드 할인 3,000원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영화를 보지 않았을 것이다. 감독은 극장에 놓인 자신의 상품에 대한 배치에서부터 내용물까지 계획대로였음이 분명했고 성공했다. 하지만 멸균에 가까운 무의미, 아니 그보다는 마치 메이웨더와 같은 감독의 현란한 아웃복싱은 그것을 하지 않음으로써 의미를 노출해 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아마 감독의 의미에 대한 본능적인 알레르기 반응처럼 보인다. 그것은 스스로 그 의미를 감당할 수 없기에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것일 수도 있으며, 어설픈 의미를 설파하는 것에 대한 반감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그는 엉뚱한 상황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며 어처구니없는 말들로 잠시라도 (관객들) 스스로를 돌아보며 진지할 수 있는 싹을 밟아 버린다. 그러니 그의 서사적 달변은 근본적으로 능력자의 회피 반응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한국영화라는 맥락에 가져와 보면 기억할만한 움직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지난 10여 년 간의 한국영화는 사실상 사회적 억압에 대한 반작용으로서의 과잉된 사회의식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적 코드는 쇼비즈니스에서 흥행의 코드로 이용되기도 했다. 노무현의 죽음에 대한 울분을 적절한 시간 우아하게 스크린으로 옮겨낸 ‘광해’와 그 들어오는 물에 노를 저은 ‘변호인’을 떠올려보라.변호인의 감독은 탄핵 이후 북핵 위기에 맞춰 ‘강철비’를 그렸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가?
그와 같은 ‘극한직업’의 어떤 반응은 한국영화의 잔여로서의 ‘영화적인 것’ 혹은 좀 더 원초적인 영화적 ‘재미’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나는 영화를 보며 무척 유쾌했다. 이는 재미난 시나리오, 연출과 훌륭한 연기의 힘이기도 했지만 어떤 태도에 대한 즐거움이기도 했다. 조금 과장하면 스스로의 힘으로 걸어 들어온 post촛불 시대의 영화 같았다고나 할까? 하여간 서사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만 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