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비수들을 끌고 다니면서 공간을 열어줘야 할 에이스는 내려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고 빌드업은 실종되었으며 게임을 풀어나가야 할 선수는 고립되었다. 그 과정에서 패스를 받기 위한 움직임도 거의 없다 보니 볼을 가진 선수들은 고립되기 일쑤였다.
돌파하는 선수들 주변으로 다른 선수들이 파고들며 공간을 견제해 주지 않다 보니 상대 수비수들은 손쉽게 우리 공격수에 대해 수적 우위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돌파로 균열을 만들 수 있는 선수마저 빠져 있다 보니 공격 루트도 단조로워졌고 체력 부담을 가진 수비수들은 종종 실수를 연발했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에이스 손흥민의 존재감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지난 중국전에서 대표팀의 경기력이 살아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뭐니 뭐니 해도 손흥민의 존재감 때문이었다. 손흥민이 최소 2~3명의 수비수를 끌고 다니면서 상대 진영 깊숙한 곳에서 움직이는 바람에 깊숙이 내려앉아 있던 상대의 수비수들은 포지션을 유지할 수가 없었고, 그 균열이 생긴 틈 사이로 우리 선수들이 움직이며 많은 공격 찬스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여전히 빌드업을 담당할 수 있는 기성용의 대체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측면 높은 곳에서 플레이하는 이청용이 플레이 메이커처럼 움직이며 빌드업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세계적인 선수를 보유한 팀이 내려앉아서 수비하는 팀을 상대로 공격의 물길을 낼 방법이다.
그런데 이번 카타르 전에서는 손흥민의 움직임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평소 본인이 위치하던 상대의 하프 스페이스보다도 훨씬 더 내려앉은 자리에 위치한 공격수는 그게 아무리 세계적인 선수라 하더라도 상대방에게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 선수가 돌파할 때 하프 스페이스를 노리고 들어가며 상대 수비를 견제해 줘야 할 때조차도 손흥민의 움직임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컨디션 난조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보통 그런 포지셔닝은 라인 브레이킹을 하기 위한 포지셔닝인데 라인 브레이킹은 우리보다 강한 팀을 상대로 할 때, 그래서 그 팀의 수비 라인이 끌어 올려졌을 때나 가능한 얘기지 이번 대회에서처럼 대부분 팀이 잔뜩 움츠리고 수비 라인을 내렸을 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손흥민의 움직임이 없다 보니 손흥민이 위치한 왼쪽 라인의 파괴력도 무뎌졌다. 김진수는 활발하게 움직였지만 쉽게 고립되었다. 돌파하더라도 패스를 받아줄 선수가 없었고, 수비를 견제해 주지 않다 보니 종종 2명 이상의 수비수에 둘러싸여 급한 크로스를 올리거나 빼앗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왼쪽의 공격이 무뎌지자 이청용-이용의 오른쪽 라인으로 공격이 집중되었고, 그만큼 공격 루트는 더 단조로워졌으며, 이청용에 대한 견제도 집중되면서 중국전에서와 같은 플레이 메이킹도 나오지 않게 되었다.
이럴 때 닥돌을 하며 상대 수비 라인의 균열을 유도할 황희찬의 부재도 아쉬웠다. 마무리가 좋지 않고 실수가 잦아서 많은 팬들의 원성을 사고 있지만, 수비 라인을 잔뜩 내린 상태로 좁은 공간에 몰린 약체팀을 상대할 때 황희찬 같은 닥돌형 선수들의 가치는 생각보다 크다. 특히 지난 경기처럼 우리 선수들이 많이 움직여 주지 않을 때 황희찬 같은 선수의 닥돌은 공간을 여는 기폭제가 된다. 하지만 그 황희찬마저 부상으로 이탈했고, 그 역할을 할 다른 존재인 이승우의 투입은 경기가 기울어진 뒤에 이뤄졌다.
황인범은 탈압박 능력이 좋고 전진 패스가 뛰어난 선수지만 몸싸움에 능한 타입은 아니며 개인 전술로 공간을 창조하는 스타일도 아니다. 기성용처럼 빌드업이 가능한 선수가 뒤를 받쳐줄 때라면 몰라도 그게 아닐 때에는 수비형 미드필더의 보호를 받아야 게임 메이킹이 가능한 스타일이다. 그래서 벤투 감독도 두 명의 수비형 미드필더를 배치했는데, 주세종과 정우영이 바로 그 역할의 담당자들이었다.
하지만 수비형 미드필더들의 움직임은 부족했거나(정우영) 자신의 롤을 망각한 채 엉뚱한 곳에서 이뤄졌으며(주세종) 그 결과로 황인범은 상대 미드필더들과 수비수들의 거친 압박에 종종 고립되어 기량을 펼치지 못했다. 그리고, 기성용이 사라진 경기장에서 높은 빌드업을 담당했어야 할 황인범의 이런 고립은 게임을 풀어나갈 선수가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종 나타났던 선수들의 실수는 체력 관리에도 문제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트래핑 실수와 같은 기초적인 실수는 물론이고, 경기 중 자주 보였던 성급한 태클과 몸 날리기와 같은 큰 동작은 상대 선수를 꾸준히 따라갈 체력에 부담이 있을 때 보이는 현상들이다. 비록 전 경기에서 연장전까지 치루는 부담이 있긴 했지만 상대는 피파랭킹이 북한보다 낮은 바레인이었다. 토너먼트를 진행하면서 1~2번의 연장전은 각오하는 게 정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대표팀의 체력 프로그램을 점검해 봐야 할 필요가 있는 지점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이처럼 투입된 선수들이 체력적 부담을 크게 느끼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보다 한 수 아래라고 생각되는 기량의 팀을 만났을 때, 딱 지난 경기와 같은 양상이 연출된다. 상대의 기량이 높지 않다 보니 긴장감이 떨어지고, 그 상황에서 체력적 부담이 있다 보니 볼을 가진 선수가 혼자서 해결하기를 바라거나 혹은 다른 선수가 도와주길 바라며 자신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감독의 전술적 선택도 아쉬웠다. 보통 전력 차가 나는 상대가 내려앉아서 자물쇠를 잠그면 전력 상 우위에 있는 강팀들은 최대한 많은 선수를 전진시켜 물리적인 기회 자체를 늘린다. 한마디로 가둬 놓고 두들기기를 시전한다는 얘기다. 물론 그렇게 최대한 많은 선수를 전진시키면 역습에 의한 카운터의 가능성도 만들어진다.
하지만 우리 선수들의 전진으로 인해 수비 라인이 극단적으로 올라가면 그만큼 역습 거리도 길어지고 전진 압박에 의한 커팅에 대한 부담으로 급한 패스로 역습이 진행되기에 성공 가능성은 그만큼 낮아진다. 지난 아시안 게임에서 대부분의 팀에게 압도적인 전력 우위를 가진 대표팀을 운용했던 김학범 감독의 기본적인 전술 기조도 바로 ‘최대한 많은 선수를 전진시킨다’였다.
하지만 지난 경기에서 벤투호는 처음부터 지나치게 전형적이고 안전한 전술 시도를 했다. 비슷한 전력을 가지고 있거나 약간의 열위를 가진 팀을 상대로 할 때의 전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얘기다. 특히 지난 경기에서처럼 선수들이 체력적 부담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리고 그 상황에서 상대 팀이 우리 팀의 전력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좀 더 적극적인 전진을 요구할 필요가 있었다.
선수들이 움직여주지 않는다면 빠른 선수 교체를 통해서라도 이를 주문했어야 했다. 포워드지만 볼을 운반할 수 있고 공간을 넓게 파고드는 지동원, 닥돌을 하며 수비수들의 라인에 균열을 만드는 이승우가 들어오고 난 뒤에 공격이 다소 활력을 찾은 건 선수 교체의 효과도 있어서긴 하지만 그 지점이 카타르전 대표팀 공격력이 무기력했던 지점이라는 얘기다. 8강전의 부담을 감안하더라도 지나치게 보수적인 운용이었다.
다시 하는 얘기지만, 한마디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체력적인 부담으로 인해서 상당수의 선수들이 움직이지 않는 상황에서 그나마 움직여 주는 선수들은 동료의 도움을 받을 수 없어서 모두 개인 전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타개해줄 전술적 변화도 부족했다. 에이스는 보이지 않았고, 대회 내내 팀의 발목을 잡았던 빌드업의 실종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비록 결승 골은 불운도 작용된 결과였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져도 이상할 게 없는 경기였다는 얘기다. 불운은 그럴 때 만들어진다.
이번 대회에서 노출된 가장 큰 문제점은 기성용의 빈자리에 대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래부터도 대표팀의 경기력은 기성용의 부재 여부와 기성용의 경기력에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지만, 특히 벤투처럼 낮은 빌드업을 기반으로 경기를 펼치기 위해서는 기성용과 같은 선수의 존재가 필수다.
하지만 기성용은 이미 전성기를 지났고 그 자리를 대체할 것으로 기대되었던 장현수는 불미스러운 일로 더 이상 대표팀에 합류할 수 없게 되었다. 황인범은 과거 구자철이 그랬던 것처럼 높은 위치에서 플레이하는 선수지 기성용처럼 스스로 볼을 간수하면서 낮은 빌드업을 하는 선수가 아니다.
기성용의 부재는 가장 기본적인 빌드업의 공백으로 이어졌고 이는 감독 부임 초반 만들어졌던 팀의 기본적인 색깔, 즉 낮은 빌드업을 기반으로 한 빠른 측면 돌파를 무너뜨렸다. 이번 대회 들어 앞선 평가전들에서와 달리 답답한 경기력을 보인 이유다.
낮은 빌드업은 세계적인 추세다. 보통은 커맨드형 수비수들이 담당하지만 한국 축구는 뛰어난 자질을 가진 선수들이 수비를 회피하는 오랜 축구 환경의 문제로 인해서 이런 빌드업을 담당해 줄 커맨드형 수비수들이 부족하다. 그런 와중에서 그 역할을 해오던 기성용이 없을 때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 고민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벤투 감독의 거취와는 별개로 한국 축구가 앞으로 더 나아가기 위해 해결해야 할 지점이다.
원문: 손원근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