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야구는 9회 말 2아웃부터”라는 말을 “야구는 7회 말 2아웃부터”로 바꿔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마이너 국제 대회 때는 그렇게 바뀌게 됩니다. 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WBSC)은 이탈리아 로마에서 현지 시간으로 20일, 이사회를 열고 국제 대회 규정을 손질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25일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했습니다. WBSC에서 트위터에 게시한 것처럼 제일 중요한 건 역시 7이닝제 경기 도입입니다.
이제부터 WBSC에서 주관하는 대회는 7회까지 치르는 게 기본 옵션입니다. WBSC에서 이번 발표 때 예외로 언급한 대회는 딱 세 개. 12세 이하 야구월드컵은 원래 하던 대로 6회가 끝이고, 프리미어12와 올림픽도 원래 하던 대로 9회까지 경기를 진행합니다. 아시안게임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었습니다.
제일 먼저 7이닝제로 경기를 치르게 된 건 2020년인 내년 열리는 23세 이하 야구 월드컵입니다. 이 대회에는 아마추어뿐 아니라 프로 선수도 참가하며 세계랭킹을 정할 때 프리미어12,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다음으로 배점이 높습니다. 이어서 18세 이하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도 2021년부터 7이닝으로 진행합니다.
WBSC에서 이렇게 결정한 것과 별개로 ‘야구는 9회까지 해야 제맛’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분명 계실 겁니다. 저도 아니라고는 말 못 합니다. 그런데 만약 계획대로(?) 일이 풀렸더라면 야구는 원래부터 7이닝제였을 겁니다.
야구는 왜 9회까지 할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야구 규칙은 대부분 1857년 1월 22일부터 16개 뉴욕 지역 구단 대표가 모여 만든 ‘(The) Laws of Base Ball‘(사진)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고스톱 규칙이 지역마다 다른 것처럼 당시에는 구단마다 다른 규칙으로 경기를 진행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에 규칙을 통일하자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고 결국 니커보커스 클럽을 중심으로 규칙 제정 위원회를 꾸리게 됩니다. 이렇게 만든 규칙 제26장에 “경기는 9이닝으로 구성한다”는 표현이 처음 등장합니다.
이전까지 야구는 한 팀이 21점을 먼저 기록하면 그 이닝을 마지막으로 끝내는 게임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한 팀이 지금 표현으로 6회 초까지 총 23점을 냈다면 6회 말까지는 진행을 한 다음 이때까지 나온 점수로 승패를 결정하는 것. 당시 투수는 그저 타자가 공을 때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에 가까웠기 때문에 이렇게 점수를 많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투구 기술이 발전하면서 점점 21점을 뽑기가 어려워졌습니다. 1856년에는 연장 16회까지 경기를 하고도 해가 지는 바람에 12-12 동점으로 경기를 마무리해야 하는 일도 생겼습니다. 그래서 점수를 기준으로 하는 대신 이닝 제한을 두자는 의견이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21점제 경기는 보통 6회 또는 7회에 끝나는 게 일반적이었습니다. 이 회의를 소집한 니커보커스 클럽에서 7회까지만 경기를 하자고 제안한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른 구단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고 21점제 대신 7이닝제를 도입하기로 했다는 언론 보도도 나왔습니다. 그때 니커보커스 회원 자격으로 이 회의에 참가한 루이스 F 워즈워스(1825~1908)가 9이닝제 카드를 꺼내 들고 열심히 사람들을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갑자기 분위기가 9이닝제 쪽으로 기울게 됐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니커보커스 클럽
여러 구기 종목 역사를 소개한 책 『더 볼(The Ball)』은 니커보커스 클럽과 이 클럽 창설에 깊숙이 관여한 알렉산더 카트라이트(1820~1892) 대해 이렇게 소개합니다.
카트라이트는 여러 해 동안 동료 상인과 은행원, 그리고 기타 견실한 중산층 남자들과 오후 3(시)만 되면 일을 마치고 모여 훗날 첫 번째 매디슨 스퀘어 가든이 들어설 지점 근처 27번가와 파크 애비뉴 공터에서 야구를 해왔다. 그들은 몇 해 전 워싱턴 어빙(Washington Irving)이 필명으로 사용해 유명해진 네덜란드 이름을 따서 자신들을 니커보커스 야구 클럽이라 불렀다.
(중략)
모든 기록을 살펴보면 니커보커스는 위대한 야구 역사가 해럴드 시모어(Harold Seymour)가 말하듯 “다이아몬드 위에서의 방망이와 공보다는 경기 후 연회장에서의 나이프와 포크 사용에 더 전문가”였다.
그러니까 니커보커스 클럽은 야구를 매개로 한 친목회 ‘사교클럽’이었던 셈입니다. 1845년 이미 다른 야구 클럽에서 쓰고 있던 규칙을 참고해 니커보커스 규칙을 정하면서 내세운 제1~3조를 봐도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래는 고 박기철 스포츠투아이㈜ 부사장의 번역입니다.
1. 선수단(members)은 경기를 위해 합의된 시간을 준수하고 참석 시간을 엄수해야 한다.
2. 시합을 위해 모였을 때 회장이, 회장이 결석했을 때는 부회장이 심판을 지명한다. 심판은 모든 법률과 규칙 위반 사항을 기록한다.
3. 임석 임원이 두 선수를 주장으로 임명한다. 주장은 경기에서 제외되며 시합을 진행하는 데 주력한다. 주장은 서로 상대하는 선수들이 가능한 한 같도록 감독하고 편 가르기는 추첨으로 한다.
이 규칙 제6조가 재미있습니다. 박 부사장은 “경기를 시작하기로 한 시각에 구단에 필요한 숫자의 선수가 없으면 선수가 아닌 신사가 대신 참가할 수 있다”고 번역했는데 원문은 조금 더 깁니다.
If there should not be a sufficient number of members of the Club present at the time agreed upon to commence exercise, gentlemen not members may be chosen in to make up the match, which shall not be broken up to take in members that may afterwards appear; but in all cases, members shall have the preference, when present, at the making of the match.
여기서 일단 중요한 표현은 ‘선수가 아닌 신사(gentlemen not members)’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냥 ‘구경꾼’이죠. 그러면 ‘구단에 필요한 숫자의 선수(a sufficient number of members of the Club present)’는 몇 명이었을까요? 이 클럽 회원 생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습니다. 한쪽에서는 클럽 회원 14명이 나오면 외부인을 받지 말고 7인제로 경기를 치르자고 주장했고, 다른 쪽에서는 18명이 되지 않으면 외부인을 포함해 9인제로 경기를 치러야 한다고 맞섰습니다.
7인제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정기적으로 회비를 내는 ‘클럽 회원끼리’ 경기를 치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9인제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경기 퀄리티를 유지하는 게 그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양쪽 모두 양보할 생각이 없자 니커보커스 클럽은 결국 1856년 8월 22일 투표를 통해 ‘구단에 필요한 숫자의 선수’를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개표 결과 7인제를 주장하는 쪽이 13-11로 승리를 거뒀습니다.
이 숫자가 중요한 건 경기 참가 인원이 이닝 숫자도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7인제 경기를 지지하는 쪽에서는 7이닝이면 경기를 끝내고 음주가무를 즐기기에 적당하다고 생각했고, 9이닝제는 9이닝을 주장했습니다. 결국 니커보커스는 야구를 7명이 7이닝까지 하는 경기라고 규정했던 겁니다.
그래도 지9는 돈다
문제는 이듬해(1857년) 규칙위원회에 참가한 니커보커스 회원들 생각은 달랐다는 것. 규칙 초안을 쓴, 유격수라는 포지션을 발명했고 스스로 그 자리를 맡았던 대니얼 ‘닥’ 애덤스(1814~1899)는 아예 12명-12이닝 지지자였고 이 투표 때 9이닝 쪽에 표를 던졌습니다. 그래도 클럽 대표로 참석한 이 규칙위원회에서는 클럽 결정을 따랐습니다.
이 포스트 주인공 워즈워스는 달랐습니다. 클럽 내부 투표 때 9이닝제에 표를 던졌던 워즈워스는 다른 클럽 관계자를 설득하기 시작했고 결국 9이닝제에 대한 공감대를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면서 애덤스 역시 9이닝제 도입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고, 결국 ‘Laws of Base Ball’은 9명-9이닝 시스템을 채택하게 됐습니다.
니커보커스 클럽에서 이 결정을 불편하게 느낀 게 당연한 일. 워즈워스는 1857년 6월 8일 경기에 출전할 예정이었지만 구장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다시 경기에 나선 건 6일 뒤였습니다. 이때 그가 1루수 수비를 맡은 팀은 니커보커스가 아니라 워즈워스 니커보커스로 건너오기 전에 뛰던 고담스였습니다. 결국 니커보커스를 떠나고 말았던 것. 그래도 야구는 9명이 9회까지 한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워즈워스는 1845년 고담스에서 니커보커스로 소속 클럽을 옮기는 과정에서 사례금을 받았습니다. 이 때문에 워즈워스를 첫 번째 프로야구 선수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워즈워드는 이때 우리가 흔히 ‘다이아몬드’라고 부르는 야구장 도안을 가지고 오기도 했습니다. 이때는 아직 베이스 사이 거리를 90피트(약 27.4m)라고 확정했던 건 아닙니다. 이 거리를 정한 건 애덤스였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아는 야구는 누군가 한 사람이 어느 날 구슬치기에 한창인 아이들을 불러모아 흙바닥 위에 막대기로 다이아몬드 모양 필드를 그린 다음 자신이 발견한 새로운 경기 규칙을 설명하면서 시작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논쟁과 투표 그리고 그 결과를 뒤집는 배신 끝에 지금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야구 종주국을 자처하는 미국은 각국 주재 대사관 홈페이지에 자랑스레 “야구는 민주적”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진짜 자랑하고 싶은 건 조금 다른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야구 규칙이 민주적으로 발전한 건 틀림없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