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다’
나는 교사들이 학생들을 대상으로 사용하는 평가적인 표현 중 ‘착하다’라는 형용사가 가장 널리 쓰인다고 생각한다. 마치 교사들이 착한 학생의, 착한 학생에 의한, 착한 학생을 위한 교육의 전사처럼 양성되었나 하고 착각할 정도다. 가히 교무실과 교실에 ‘착하다’가 범람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학생이 공부를 잘한다. 착한 학생이다. 공손하게 인사를 잘한다. 당연히 착한 학생이다. 교사 말을 고분고분 잘 따른다. 최고로 착한 학생이다. 교실 청소를 잘한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릴 만한 착한 학생이다. 수업 중에 자주 떠들던 학생이 어느 날 조용하다. 놀랍게 착한 학생이다. 늘상 말썽을 부려 골치를 썩이던 학생이 잠잠해졌다. 또 다른 의미에서 최고로 착한 학생이다.
착한 학생, 착한 아이는 (이른바 ‘어른’인) 당신이 바라고 내가 바라고 우리 모두가 바라는 바 아닌가. 나쁜 학생보다 착한 학생이 이 세상에 가득 퍼져야 갈수록 정글 같은 곳이 되어 가는 우리 사회가 조금이라도 따뜻해지지 않겠는가.
그렇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다만 지금 나는 어른들에게 온통 ‘착하다’는 말로 평가를 받는 학생들이 주변 사람을 바라보는 그들 각자의 시선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지 함께 생각해 보자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학생들이 그런 시선으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고 말하고 싶다.
감성 지능과 감성 지각력
우리에게 감정 개념이 ‘기분이 아주 좋다’와 ‘기분이 더럽다’ 두 개밖에 없다고 가정해 보자. 당신과 나는 각자 감정을 경험하거나 다른 사람의 감정을 지각할 때마다 오직 이 거친 붓으로 범주화하게 될 것이다. 이런 사람은 감성 지능이 높을 수 없다. 감성 지능이 낮으면 감정 지각력이 떨어져 행동과 주변 환경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기 힘들다. 심리학자 리사 펠드먼 배럿이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2017, 생각연구소)에서 주장하는 주요 내용이다.
배럿의 말을 좀 더 들어 보자. 감정 지능은 새로운 감정 개념을 획득할 때 높아진다. 이를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새 단어를 학습하는 것이다. 단어는 개념의 씨앗이 되고, 개념은 예측의 원동력이 되며, 예측은 신체 예산을 조절하면서 기분을 좌우한다.
감정 입자도(Emotional granularity; 감정 경험과 지각을 섬세하게 또는 거칠게 구성하는 능력)가 더 높은 사람들은 병원을 덜 방문하고, 약을 덜 먹고, 병에 걸려 입원해 있는 기간도 더 짧다. 이것은 마술이 아니다. 이것은 사회적인 것과 신체적인 것 사이의 경계가 꽉 막혀 있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 리사 펠드먼 배럿 씀‧최호영 옮김(2017),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생각연구소, 337쪽.
높은 감정입자도가 가져오는 효과
감정 개념을 풍성하게 하여 감정 입자도의 스펙트럼을 넓히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새로운 단어를 최대한 많이 학습하라. ‘행복한’에만 만족하지 말고 ‘황홀한’, ‘감동적인’, ‘환상적인’ 같은 단어를 찾아 사용하라. 감정 개념을 조합해 사회적 실재를 구성하는 능력을 발휘하여 각자만의 감정 개념을 발명하라. ‘홀로 오솔길을 걷다가 짙푸른 그늘 아래서 느끼는 해방감’ 같은 식으로 하면 된다.
감정의 섬세한 범주화와 이에 따른 높은 감정 입자도가 가져오는 효과는 실로 놀랍다. ‘기분이 더럽다’의 50가지 뉘앙스를 아는 사람들은 감정을 조절할 때 융통성을 30퍼센트 더 발휘했고, 스트레스를 받아도 과음을 덜 했으며, 마음의 상처를 입힌 사람에게 공격적인 보복을 덜 했다는 연구가 있다고 한다.
감정에도 지문이 있다
감정 본질주의가 있다. 감정마다 고유의 신체 지문이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행복하면 미소를 지어야 하고 화가 나면 노려본다는 것들이 감정 고정 관념에 터 잡은 감정 본질주의다. 배럿은 감정 구성주의자다. 감정 구성주의는 감정 본질주의 반대편에 자리 잡는다. 감정은 사회적 실재이며,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고 본다.
배럿은 아이에게 감정을 가르칠 때 본질주의적인 고정 관념에 얽매이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권고한다. 실제 세계는 다양하며, 가령 미소가 맥락에 따라 행복, 당혹감, 분노, 심지어 슬픔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감정 개념 체계는 다양하고 풍성할수록 좋다. 예일 감성지능센터에서 수행한 연구에 따르면 초등학생에게 매주 20분~30분 동안 감정 단어에 대한 지식을 넓히고 감정 단어를 사용하는 시간을 가지라고 가르치자 사회적 행동과 학업 성적이 모두 향상되었다고 한다. 이 교육 모형을 적용한 학급은 단합도 잘 되었다고 한다.
다시, ‘착하다’
배럿에 따르면 부모와 교사가 풍부하고 다채로운 감정 용어로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자녀와 학생의 학업 성적을 개선시킬 수 있다. 아이들의 행동에 대한 피드백에도 이와 똑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예를 들어 보자. 칭찬은 구체적인 표현으로 하라. 청소를 잘하는 학생에게 ‘착하구나’라고 말하는 대신 그가 한 행동을 칭찬하라. “청소 시간에 바닥을 열심히 쓸더구나. 덕분에 우리 교실이 한결 더 깨끗해졌구나.”
글 첫머리에 던진 생각할 거리로 돌아가자. 학교와 교실에 ‘착한’이 범람하는 까닭은 교사들이 학생들을 ‘착한-나쁜’이라는 거친 붓으로 채색하듯 바라보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이제 ‘착한-나쁜’이라는 거친 붓은 학생들의 정신에 선악이라는 단순하고 이분법적인 세계관을 심어 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가 그런 거친 시선으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기를 바라는 교사가 없을 것이라고 본다. 나는 ‘착하다’는 말이 별로 착해 보이지 않는다.
원문: 정은균 님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