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사장이 ‘사장님’이 되고, 석사가 ‘박사님’이 되는 요지경 세상
대학생 시절 국내에서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매체 중 한 곳에서 인턴기자로 일한 적이 있다. 그 언론사가 주최한 행사에 참여했을 때, 사소하지만 이해가 쉬이 안 되는 말을 반복해서 듣게 됐다. 그날 부사장이 자리를 함께했는데, 행사 사회자와 현직 기자는 물론이고 내빈 중 한 명이었던 모 지자체장도 자꾸 그 부사장을 가리켜 ‘사장님’이라 칭했다.
부사장이라고 멀쩡하게 소개를 해놓고 사람들 앞에서는 사장님이라고 불렀다. 사장은 따로 있었다. 아마 듣는 사람 기분 좋으라고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부사장도 충분히 높은 직책이긴 하지만, 뭔가 자꾸 ‘부(副)’자를 붙이는 게 괜히 실례인 것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부’가 무슨 주홍글씨도 아닌데, 부국장에게 ‘국장님’이라고 부르던 광경도 기억난다. 호칭은 정확하게 불러줘야 한다. 그게 예의다. 특히 직급, 직함은 회사에서 공식적으로 부여한 것이다.
물론 회사에 따라서는 ‘대표이사 부사장’이 있기도 하다. 이럴 경우 그를 대표님이라 부르는 것은 문제가 없으나, 부사장을 사장으로 부르는 것은 틀린 호칭이다. 정작 그 부사장은 ‘참칭(僭稱)’할 생각이 없었는데 말이다.
박사님! 박사님?
학력을 호칭으로 쓸 때 이런 문제는 더욱 두드러진다. 박사 학위가 없는 사람한테 ‘박사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말 결례다.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는 손석희 JTBC 사장에게 ‘손 박사’라고 자주 부르곤 했다. 그것도 방송에서 말이다. 손 사장의 최종학력은 석사 학위다. 손 사장은 박사 과정에 진학하지도 않았고, 박사 공부를 할 의향조차 없을 수 있다. 또 손 사장 본인이 어디 가서 박사 학위가 있다고 떠들고 다닌 적도 없는데, 그런 그에게 손 박사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다.
시사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정관용 국민대 특임교수의 경우는 어떠한가. 박사 학위 수료를 한 그에게 패널들이 왕왕 ‘정 박사님’이라고 부른다. 정 교수라고 부르든가 아니면 사회자라고 부르면 될 것을 말이다. 그 역시 자신을 박사라고 불러 달라고 말하지 않았는데, 괜히 듣는 사람만 겸연쩍게 만드는 이런 호칭 인플레는 상대를 높여주는 것이 아니라 외려 곤란하게 만드는 처사다.
화자 입장에서 멋대로 부르는 호칭이 나중에 그 말을 들었던 당사자가 학력위조를 한 것으로 이상하게 비화될 수도 있다. 왜 박사인 척했냐고 따져 묻는 것. 그런데 방송 중에 “저기, 저 박사 학위 없는데요”라고 어떻게 일일이 대응하겠는가.
이런 호칭 부풀리기로 자주 피해받는 또 다른 인물은 진중권 동양대 교수다. 박사 학위가 없는 그는 한 칼럼에서 “대개 강연을 하면 주최 쪽에서는 자신들이 부른 강사를 대단한 사람으로 부풀려야 한다. 실제로 내가 박사 학위를 받은 적 없다고 수정을 해주면, 청중 중에는 실망하는 눈빛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들도 보인다”라고 말한 바 있다. 박사 학위가 없어도 연구하고 강연하는 데 아무런 문제를 못 느끼는 진 교수의 학력을 자기들 입맛대로 위조하는 일이 왕왕 발생했다고 한다. 그는 이런 일에 모욕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런데 지난해 성남시청에서 열린 그의 강연 포스터에는 ‘독일 베를린자유대학 언어철학과 박사’라고 작지 않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연사를 초청해놓고 그에게 ‘모욕감’을 준 주최 측은 반성해야 한다.
또 TV 토론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각종 연구소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자주 패널로 나오곤 한다. 연구위원, 수석연구원, 센터장, 실장 등 해당 연구소에서 지정한 공식 직함이 있기 마련. 그런데 사회자나 반대 자리에 앉은 패널들이 편의상 박사라고 부르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정책을 다루는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고, 공부를 많이 한 분으로 보이니 박사라고 높여 불러주는 것이라고 선의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지양해야 할 언어습관이다. 석사급 연구원도 많고, 박사과정에 등록해놓고 공부와 연구를 병행하는 연구자도 있고, 박사수료 상태로 연구원에 자리 잡은 경우도 있다.
이런 개개인의 상황을 다 고려해달라는 얘기가 아니다. 직급, 직함이 번듯하게 있으면 그대로 불러주는 게 맞다. 개인의 석박사 학력은 남이 왈가왈부할 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별없이 ‘박사님’이라 부르지 말자는 것이다.
물론 예전과 달리 박사가 많아졌지만, 배운 사람에 대한 동경이 ‘박사님’을 부르는 심리 기저에 놓여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 박식한 사람에게 척척박사, 만물박사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괜찮지만, ‘박사님’이라 호명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척척박사, 만물박사도 학위 논문은 없을 것이다. 레토릭으로서의 박사와 호칭으로서의 박사는 엄연히 다르다.
호칭은 사회언어에서 제일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일 터. 과장하지 말고, 틀리게 부르지 않으며, 정확하게 불러주는 게 가장 예의 바른 언어 구사임을 잊지 말자. 상대를 어쩌다가 ‘참칭’하고 다니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무분별한 호칭 인플레, 이제는 진짜 예의 있게 정확한 호칭을 사용하도록 하자. 그것이 상대를 진정으로 높여주는 길이다.
원문: 석혜탁 님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