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이 아군과 적군으로 분열된다. 누군가 어떤 말이나 주장을 하면 당장 ‘편 가르기’ 좋아하는 이들이 몰려가서 그가 누구 편인지 규정부터 하고자 한다. 설령 그에게는 굳이 특정 진영에 설 의지가 없더라도, 각 진영에 있는 이들이 그를 ‘우리편’ 혹은 ‘적편’으로 알아서 규정한다. 이럴 때 실수로 몇몇 부분에서 모호한 태도를 취할 경우, 양 진영 모두로부터 적으로 낙인 찍히는 일도 쉽게 볼 수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가장 손쉽고도 자극적이며 강렬한 방법은 이분법적으로 보는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을 반으로 나누는 일에는 모종의 쾌감이 동반된다. 누군가를 ‘규정’하거나 ‘낙인’ 찍는 순간 우리에게는 어떤 인식의 쾌락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스스로가 어떤 ‘통찰력’을 가졌다는 착각에서 비롯된다.
통찰력이란 일종의 힘이다. 타인을 규정할 힘, 누군가를 꿰뚫어보았다는 자부심, 나아가 아군과 적군을 나누어 마음대로 공격할 수 있다는 즐거움이 이 일에 동반된다. 이런 쾌락이 이제 우리 사회 전체를 돌아다닌다. 그러나 사실 타인을 낙인 찍는 능력은 통찰력과 무관하다. 그것은 가장 두뇌를 단순화시켜 원초적인 수준에서 손쉽게 악의적인 힘을 즐기는 일에 불과하다.
오히려 고도의 지적 활동은 아군과 적군 사이에 존재할 제3지대의 가능성을 발굴하거나 더 큰 맥락에서 화해를 모색하고 더 지속적인 관점에서 미래를 고민하는 일이다. 아군과 적군을 나누는 일은 사자나 물고기, 아메바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것을 고민하며, 전체 맥락을 고려하고, 다층적 입장을 이해하는 건 고도로 지능이 발전한 동물만 가능하다.
편을 가르는 일의 효율성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건 아니다. 어떤 현실적이고 즉각적인 문제에서 때로는 편을 갈라 싸우는 게 확실히 좋은 효과를 거두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런 방식이 정의에 가까운 어떤 일을 해내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강서구 특수학교 문제에서 많은 이가 ‘장애아동 부모편’을 들었고, 그로 인해 그 문제는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싸움은 인간성의 최소한이자 근본을 위한 투쟁 같은 것이지, 진영싸움 혹은 이권투쟁이라 볼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 혹은 인권을 위한 싸움에서 이분법은 있을 수 없고 오직 ‘인간편’만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 경우를 제외한 거의 전 영역에서 일상적·항시적으로 모든 관점에 관해 아군과 적군이 갈라지는 사회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편을 가르는 쾌락이 모든 사람에게 전염되고, 통찰력을 지녔다는 착각 아래 낙인이 수시로 이루어지고, 마녀사냥과 집단린치가 일상화되는 사회라면 이제 다른 문제가 된다.
요즘 내가 가장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쉽사리 어떤 편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 볼 때는 나 역시 편파적이고, 어떤 진영에 속해서, 부당하게 다른 진영을 낙인찍고 공격하는 사람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보이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나는 스스로를 배신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가능하면 올곧은 시선에서 내가 생각하는 진실의 곁에 머물고자 온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이런 노력이 언젠가 대단한 인정을 받을 가능성이란 거의 없다. 오히려 언젠가 온갖 낙인이 찍힐 가능성만이 높다는 건 안다. 이미 내가 어떤 말을 할 때마다, 아니 숨쉴 때마다, 살아 있다는 걸 내보일 때마다 낙인은 찍힌다. 이 사회는 그런 사회다.
그러나 스스로 낙인 찍히는 일을 너무 두려워하지는 않으려 한다. 그보다는 누군가를 낙인 찍는 일이 더 두렵다. 나는 끊임없이 판단을 유보할 것이다. 누군가가 적군 혹은 악마라는 확신은 가능하면 미루고자 할 것이다. 그리고 내 안의 여유가 허락하는 한, 많은 이를 이해하고자 할 것이다. 그들이 놓인 맥락과 입장을 헤아려보고자 할 것이다.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누군가를 이해하거나 상처주는 일 정도라면 이해하는 쪽을 더 택하고 싶다. 그냥 그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다. 이 전쟁 같은 세상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원문: 정지우 문화평론가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