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에서 2019년으로 넘어가던 12월 말. 지상파 방송사가 모두 겪었던 사고가 바로 ‘가요제 큐시트 유출’ 입니다. 방송 프로그램에는 방송 순서와 흐름에 따른 카메라 동선, 마이크, 출연자 정보가 담긴 큐시트가 필요합니다. 스태프와 출연진 모두 이 큐시트를 기준으로 방송을 준비하고 자기 순서에 맞춰 스탠바이를 하죠. 그래서 큐시트에는 한 프로그램에 대한 모든 정보가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프로그램에 대한 ‘기획서’가 바로 큐시트인셈입니다.
작년 연말, 가요제의 ‘큐시트’를 찾아보기 위해 10대와 20대가 손발을 걷어 붙였습니다. SBS 가요대전(12월 25일)을 시작으로 가요제 큐시트를 검색하는 10대와 20대가 늘어나더니 KBS 가요대축제(12월 29일) 큐시트 유출 사고를 기점으로 큐시트에 대한 관심이 폭발했습니다. MBC 가요대전(12월 31일)까지도 방송 큐시트가 유출되면서 이를 찾아보기 위한 10대와 20대의 젊은 세대의 검색이 크게 늘었습니다. 3사 가요제의 ‘큐시트’가 모두 네이버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 Top 5에 안착할 정도였습니다.
큐시트 유출은 엄연한 불법 행위입니다. 이를 공유하는 것 역시 불법입니다. 방송사가 갖는 저작권을 명백하게 침해하는 행위죠. 이 글을 통해 큐시트 유출 사고에 대해 옹호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반드시 색출되어 그에 맞는 징계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제가 관심을 가졌던 건, 큐시트에 큰 관심을 보이고 그토록 찾았던 젊은 세대의 행동이었습니다. 안되는 줄 알면서, 불법인 줄 알면서 어쩔 수 없이 검색을 해보던 그들에게 뭔가의 사정과 이유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고민을 해보았습니다. 왜 10대와 20대는 방송사의 연말 가요제 큐시트를 찾아보기 위해 그토록 검색을 해봤는지 말이죠.
지금의 10대와 20대는 ‘숏폼’ 세대라고도 불립니다. 그들이 소비하는 콘텐츠는 대부분 짧습니다. 텍스트, 이미지, 영상 모두 해당되는 부분이죠. 오죽했으면 텍스트 콘텐츠 끝에 ‘세줄요약’이 없으면 그들의 커뮤니티에서는 ‘좋아요’를 받기 어렵고 단 네컷에 이야기를 담는 ‘네컷만화’가 유행할 정도로 짧은 것에 대한 선호가 높습니다. 소비하는 콘텐츠 대부분이 짧으며 이러한 콘텐츠가 ‘제대로’ 먹히는 세대가 바로 지금의 10대와 20대입니다.
이들은 좋아하는 가수의 무대를 유튜브와 네이버TV를 통해 즐깁니다. 유튜브에 올라온 직캠 영상을 즐기고 네이버 TV에 업로드된 음악 방송의 하이라이트 클립을 시청합니다. 하나의 음악 방송에서 가수의 무대마다 나뉘어서 보여지는 ‘숏클립’은 음악방송 전체를 통으로 볼 필요를 사라지게 했습니다. 예전이라면 좋아하는 가수의 무대를 보기 위해 TV 앞에 앉아 그 순서를 마냥 기다렸다면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음악 방송 한 회가 끝나면 가수마다, 무대마다 나뉜 수십 개의 숏클립이 업로드 되고 그중에서 내가 보고 싶은 무대만 ‘취사선택’ 해서 보면 그만입니다. 통으로 보던 시청 학습은 자연스럽게 잘게 세분화된 시청 학습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익숙해진 동영상 소비 패턴에 역행하는 것이 바로 ‘연말 가요제’ 였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만 골라 볼 수 있어서, 전체 보는 것을 포기한 지 오래인 10대와 20대에게, 3시간이라는 방송 시간은 가혹행위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유튜브와 네이버TV 등을 통해 몸에 배인 동영상 소비 패턴이 자연스럽게 ‘3시간’과 ‘통’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취사 선택’ 하기 위한 방법으로 ‘큐시트’를 검색했습니다. 내가 보고 싶은 무대는 10분 내외인데 3시간 동안 이 방송을 보고 있을 이유가 뭐 있냐면서, 난 그렇게 영상 콘텐츠를 봐본 적이 없다는 당당함으로 소리 없는 ‘반항’을 한 셈입니다. 좋아하는 가수의 무대만을 ‘골라보던’ 습관으로 인해 장시간 시청이 적응되지 않던 것은 당연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이를 보면서 들었던 또 다른 생각은 ‘TV는 그동안 무엇을 했나’ 입니다. TV는 그동안 늘 ‘채널 고정’을 외쳤습니다. 보고 싶은 장면이 있다면 이를 보기 위해서 무작정 기다리라는 말만 했습니다. 이제 젊은 시청자를 중심으로 이 말은 무효합니다. 방송사가 시청자에게 일방향으로 콘텐츠를 발신했다면 지금의 시청자는 방송 콘텐츠를 직접 고르는 피커(picker)가 되었습니다. 시청자가 ‘시청의 능동성’을 갖게 된 것이죠. 보고 싶을 때 보고, 멈추고 싶을 때 멈추고, 다시 보고 싶을 때 틀고, 나중에 보고 싶을 때를 위해 보관 해두는 것이 오늘날의 젊은 시청자입니다. 이런 시청자에게 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채널 고정’하고 계속 기다리라고 하는 것이 과연 맞을까, 그래서 요즘 젊은 층이 TV를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SNS상에서 누군가 이번 지상파 연기대상을 본 소감을 말했는데 화제가 되었습니다. 시상식에서 언급된 드라마가 ‘안 본 드라마’가 아니라 ‘모르는 드라마’여서 충격이었다는 말이었는데요. 배우 소지섭이 연기 대상을 받았다는 사실에 ‘소지섭이 드라마를 했었어?’ 라는 반응부터 출연했던 드라마 이름을 말해주면 ‘내 뒤에 테리우스라는 드라마가 있었다고?’라는 반응도 주변에서 들렸습니다. 예전에는 그래도 이름을 들으면 한 번은 들어봤던 드라마가 이제는 그야말로 ‘처음 듣는 드라마’가 많아졌습니다. 시청의 능동성을 시청자가 더 가질수록 선택받는 콘텐츠는 더 각광받고, 그렇지 못한 콘텐츠는 ‘모르는 콘텐츠’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앞으로 TV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매년 반복되는 3시간짜리 연말 가요제를 계속 볼 필요는 과연 있는 것인지 등을 고민해 보게 되는 연말의 해프닝이었습니다.
원문: 생각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