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세대 남성의 문제는 결국 양질의 직장이 너무 적다는 것, 안정적인 주거 생활로의 진입이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이 문제는 남성들에게 단순히 ‘먹고 사는’ 차원을 넘어서는 측면이 있다. 대한민국에서 남성에게 안정적인 돈벌이, 즉 ‘능력’과 안정적인 주거환경인 ‘집’은 존재의 뿌리, 정체성의 근본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어떠한 실존적인 문제보다 남성에게는 존재의 핵심과 관련된 문제다. 이것이 해결되느냐, 해결되지 못하느냐에 따라 그는 실패한 인생이나 괜찮은 삶, 절망이나 평화, 박탈감이나 행복의 기로에 서게 된다. 다른 어떠한 문제보다도, 이 문제에 의해 한국 남성으로서의 핵심이 결정된다.
그것이 남성들이 정말로 원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다만 어릴 때부터 지속적으로 부여되어온 가부장적인 주체로서의 강박이 존재하는 건 분명하다. ‘남자는 능력’이라는 말은 완전한 허상이 아니라 실제로 이 사회에서 통용되는, 남자에게 요구되는 통상적인 자격이고 이런 이야기는 초등학생 때부터 듣게 되는 것이다.
혹은 여전히 가장 능력 있는 남성들, 이를테면 상위 10퍼센트에 속하는 남성들이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는 방식을 보면 고급 외제차에 비싼 아파트나 역세권의 오피스텔 같은 것이 그가 원하는 이성, 사랑, 행복을 얻는 데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남성들이 가장 선망하는 건 부와 명예, 인기를 거머쥔 남성이고, 그러한 남성이 쟁취하는 여성이다.
문제는 간극이 너무 벌어졌다는 데 있다. 극소수의 남성들만이 그러한 위치에 올라 ‘쟁취하는 자’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걸 쟁취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안정적인 수입과 주거환경을 바탕으로, 자기가 원하는 삶을 어느 정도 선에서 얻어낼 수 있는 남성조차 너무 적어졌다.
대부분의 청년은 ‘어느 정도’ 선에서 얻기는커녕, 통째로 자신이 바라보는 삶을 포기해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다. 혼밥과 혼술을 즐기며, 집에서 유튜브나 보고,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인간관계를 맺으며, 미드나 게임에 빠져 지내는 게 행복이고 소확행이라 한다지만, 그런 삶은 대부분 사람에게는 어디까지나 차선일 뿐 최고가 아니라는 건 누구나 안다.
특히,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가부장적인 문화 아래 자라난 청년 남성에게 존재의 핵심, 정체성의 근본이란 그러한 ‘쟁취하는 자’가 되는 것이고, 나아가 ‘책임지는 자’가 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가장 혹은 아버지가 될 것, 아니면 쿨하게 그것을 버리더라도, 셀럽이나 스타와 같은 자유롭고도 ‘승리한 자’가 될 것, 그것은 남성들에게는 지상명령과도 같았다.
모든 소년만화의 주인공들, 또 사회에서 말하는 꿈을 추구하는 삶, 멋진 남자가 된다는 것, 그 모든 것은 확실히 ‘승리’라는 관점을 내포하고, 여기에서 탈락한다는 것은 패배자가 된다는 걸 의미한다. 특히 그것은 남성들 사이의 은근한 수직적 서열에서 하층에 속한다는 걸 의미하게 된다.
나 역시 청년 시절 내내 그러한 관점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여전히 그러한 관점 안에 나의 존재가 붙잡혀 있다고 느낄 때가 있다. 남들보다 능력 있어야 하고, 승리해야 한다. 그래야 나는 아내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어머니와 아버지에게도 아름답고 멋진 남자일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혼자만 느끼는 압박이라기보다는, 부모님의 기대와 같은 사랑, 내가 사랑하는 연인이나 가족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 같은 ‘선한 의지’에서 비롯되는 측면마저 있다.
그밖에도 나를 둘러싼 사회 전체, 사람들 전체가 나를 사회적인 능력이라는 측면에서 규정한다고 느낄 때가 있다. 이 총체적인 압박이 ‘능력남’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수렴된다. 그러나 그 욕망의 실현은 대다수에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졌고, 그것이 이 세대 청년의 절망, 우울, 증오, 분노의 근본을 이룬다.
여성에게 집중하는 정책? 이를테면 남성의 비율이 지나치게 높은 영역에 대해 여성에게 어느 정도 할당을 주고 여성전용주택을 일부 건설하는 것? 이런 것이 청년 남성들의 삶에 실질적으로 엄청난 해가 될 리는 없다. 문제는 현재 청년 남성들에게 주어진 권력 혹은 부라고 할만한 것이 너무 적고 그것을 쟁취하기 위한 남성 간의 피 터지는 싸움이 무척 치열하기 때문에 아주 작은 파이조차 여성에게 건네는 데 과민반응하는 것이다.
가령 경제적으로 상위 20퍼센트 정도 속하는 것이 남성들의 일차적인 목표라면 80퍼센트는 실패자에 가까운 존재가 된다는 걸 의미한다. 그러니 그중에 2퍼센트만 여성에게 나눠주는 일에도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한다. 기존 사회의 부와 권력은 실질적으로 대부분의 남성이 가졌더라도 그 모든 건 기성세대의 이야기일 뿐이니 청년들끼리는 남성과 여성의 맥락을 ‘백지화’한 채 ‘공정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의 문제점은 사회나 문화를 백지화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아무리 청년들이 자기들끼리의 백지화된 공정성을 주장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취업전선에 있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일단 남성은 대부분의 직종에서 여성보다 유리하다. 기존의 회사나 사회 내 권력을 가진 기성 남성들이 대체로 남성들과 일하는 걸 선호하고, 많이 채용하는 경향이 확연하기 때문이다.
군대에 간 시기를 감안하더라도 남성은 취업 시 나이나 외모에서도 훨씬 관대한 요구를 받는다. 반면 여성들이 유리한 직종은 남자가 군대를 가는 시기 동안, 상대적으로 더 많은 시간을 써서 공부할 수 있는 공직과 같은 영역으로 제한되어 있다. 공무원이 아무리 이 시대 최고의 직업으로 선호된다지만, 전체 직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문제는 복잡하다. 결코 단순하게 백지화해서 공정을 말할 정도로 단순하지 않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총체적인 문화가 모든 이들의 인생, 각자의 정체성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남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직업’과 ‘주거’일 테지만, 여성들에게는 사회적 시계가 훨씬 잔인하게 흐른다.
남성들은 나이 마흔이 되더라도 사법고시에 합격하거나 의사가 되면 모든 걸 얻을 수 있는 게 이상하지 않았지만 여성이 마흔에 그러한 직업적 성취를 얻는다는 건 의미가 다르다. 남성에게 그것은 집안의 자랑이고, 훌륭한 아들이고, 끈질기게 꿈을 이룬 능력남이고, 원하는 아내를 쟁취하기에 늦지 않은 입장이 된다. 여성에게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대부분 어머니와 아버지는 딸에게 그런 걸 바라지 않는다. 왜 그런가? 그것은 이 사회가 뼛속까지 가부장적인 사회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사회 누구의 입장도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혐오와 같은 극단적 증오, 폭력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아무리 각자가 안타까운 입장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그런 식의 언행은 합리화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보다 큰 문제는 갈수록 이러한 각자의 어려움이 서로의 어려움으로 이해되는 게 아니라 집단적인 갈등과 대립, 서로에 대한 공격, 상대에 대한 박멸의 의지, 전투로 나아간다는 점이다.
절벽으로 내몰린 상태에서 절벽으로 내몬 것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절벽 위에 있는 서로가 먼저 떨어져야 한다고 싸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공격과 주장은 언제나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기묘한 합리화와 자기기만의 탈을 쓴다.
최근 청년 남성의 분노는 ‘공정’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이 큰 호응을 얻는다. 젊은 남성이 화가 나는 이유는 ‘남성과 여성의 경쟁’이 공정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봤을 때, 그것은 전혀 문제의 근본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근본적인 뿌리는 가부장적인 문화 구조다. 그 속에서 형성되고 강요받는 정체성이다.
또한 더 이상 가부장이 되는 게 불가능해진 시대다. 대부분의 남성은 과거와 같은 아버지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소수에게는 그것이 가능하고, 그 소수가 여전히 이 사회의 주된 가치관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 가치관은 왕족이자 금수저의 것이지 시민의 것이 아니다.
이 사회의 시민들은 남성이건 여성이건 불가능한 삶, 삶이 아닌 삶, 부서지고 엉망이 된 삶을 마주했을 뿐이다. 하나의 답이 있다면, 그것은 가부장제 전체, 가부장제가 만들어놓은 가치관, 개인들의 정체성, 사회 구조, 권력 지형, 자본의 지도 자체와 싸우는 일이 될 것이다. 진정한 ‘백지화된 공정성’은 거기에서부터만 출발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혐오와 매도 그리고 몰이해와 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끊임없이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지만, 이해하기 싫어서 이해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어떤 잘못의 대가를 치른다면, 그것은 이해하지 않은 일의 대가가 될 것이다.
이해하지 않고자 한 일, 손쉽게 증오하고자 한 일, 속 편하게 이해를 포기하고 혐오를 택한 일에 대한 결과는 그리 우습거나 만만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 사회와 삶을 적당한 선에서 흔들어놓는 수준은 아닐 것이다.
원문: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