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페이스북에 오세라비와 리얼뉴스, 안티페미니즘에 관한 포스팅을 올렸고 흥미롭게도 누군가의 신고에 의해 일시적으로 해당 포스팅이 비공개 처리된 모양이다. 페이스북은 고맙게도 내 블로그 링크로 연결되는 모든 포스팅을 잠재적인 스팸 게시물로 간주해 전부 나만 볼 수 있게 만들었다.
귀찮은 일이지만 그게 오세라비의 지지자들이 됐든, 안티페미니스트들이 됐든 누군가에게 상당한 자극을 줄 수 있음을 확인했다는 점에서는 나름대로 의의가 있는 반응이라 하겠다. 그들이 언어와 논리로 대응하기보다는 시스템을 통한 강제적인 침묵을 선호하는 비신사적인 사람임을 확인했다는 점에서도 말이다.
신고자들이 무엇을 기대했든 이런 일로 딱히 분노하거나 겁먹거나 좌절하는 타입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게 하나 있다면 강제적인 압박에 굴복하는 일을 몹시 싫어하는, 행위의 자유를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가급적 같은 포스팅을 반복해서 올리는 걸 원하지 않긴 하지만 이전에 작성했던 포스팅을 다시 올리고자 한다.
이 포스팅에 또다시 신고가 들어와 페이스북이 잠재적 스팸으로 간주한다면 그때는 지금도 운영 중인 블로그, 혹은 다른 경로로 더 크게 더 많은 사람에게 이야기할 방법을 찾으면 된다. 안티페미니스트든 아니든 신고자들의 비신사적인 행위에 나와 같은 경멸감을 공유하는 분들은 지금 포스팅의 사후처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관심을 가져주시면 감사하겠다(더불어 일단은 공유도 이 포스팅으로 부탁드린다).
1. 오세라비의 조던 피터슨 찬가(?)
다음 문구를 먼저 인용하고 싶다.
『12가지 인생의 법칙』이 국내 출판되기 전부터 조던 피터슨 유튜브 영상을 보아 온 구독자들이 필자를 포함해서 상당수에 달한다. 그중 필자의 책 『그 페미니즘은 틀렸다』를 읽은 독자 한 사람이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고등학교 3학년으로 올해 대입수능시험을 앞둔 학생이었다. 자연스레 국내 페미니즘에 대한 비평과 필자의 책 이야기를 하며 조던 피터슨 교수까지 화제가 이어졌다. 자신은 대학 진학 후 심리학을 전공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조던 피터슨 교수의 영향이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
일반적으로 심리학, 임상심리학은 어렵게 느껴진다. 하지만 조던 피터슨은 자신의 경험과 삶을 이야기하며 심리학으로 독자로 초대한다. 삶은 본질적으로 고통의 연속이며 세상은 시련으로 가득 차 있다고 냉정하게 말한다. 인간의 내면, 심연에 잠겨있는 사악함, 사악한 행위를 보라고, 인간의 사악함은 세상의 천재지변이 주는 고통과는 차원이 다름을 직시하라고 한다. 그리고 의도적이고 고의적인 사악함은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기고 최악의 고통을 유발한다고. 이것이 조던 피터슨 심리학의 출발점이 아니었을까.
- 오세라비, 「조던 피터슨이 말하는 혼돈의 해독제 ’12가지 인생의 법칙’」, 리얼뉴스
다른 포스팅에서 언급한 바 있듯 외견상 ‘심리학자’ 정도로 소개되는 조던 피터슨의 사유 토대에는 C. G. 융을 모델로 하는 신화학적 사고가 자리한다. 피터슨을 옹호하는 필자들은 종종 이걸 ‘보수적이고 종교적인’ 심성 정도로 최대한 가볍게 포장하거나 아니면 그냥 그 부분을 적당히 피해서 넘어가곤 하는데, 나는 누군가가 그의 메시지에서 받아들일 만한 부분을 받아들이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전체적인 사유가 합리적인 학자/사상가의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현대 학문의 합리성을 이해하지 못한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학문으로서의 현대 심리학을 존중하는 독자라면 조던 피터슨을 통해 심리학과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다는(!) 수험생이나 이를 기특하게 여기면서 ‘조던 피터슨 심리학’이 상식적인 의미의 심리학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오세라비의 감수성 가득한 언급을 보면서 기겁하는 마음을 감추기 힘들 것이다.
최근 서울대·카이스트의 일부 학생들이 오세라비 초청 강연회를 작게나마 성황리에 가진 거로 안다. 현재의 페미니즘/페미니스트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을 그 자체로 비난할 생각은 없고, 그들이 뭔가 지적으로 신뢰할만한 스피커·구루·영도자를 찾고 싶어 하는 건 그럴 법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세라비를 추종하는 건, 솔직히, 한국 안티페미니즘 진영이 최소한의 지적인 자기검증조차 안 되는 집단임을 보여준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지금까지 오세라비의 언급과 행보를 보면서 다음과 같은 인상을 가진다. 냉정히 말해 그는 지적인 정직함과 엄밀함이 중요한 저자가 아니며, 그의 진짜 동기는 자신의 ‘시장’인 젊은 안티페미니스트 남성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최대한 해주면서 인지도를 올려 상업적 수익을 획득하는 데 있다는 생각이 너무나도 강하게 든다.
오세라비의 강연 및 다른 언급을 거리를 두고 유심히 지켜본 관찰자라면, 우선적으로 그가 다양한 형태의 안티페미니즘 논의들을 마구 뒤섞는 비체계성에 놀라게 된다. 페미니즘이냐 안티페미니즘이냐의 논의와 별개로 확실히 그는 지적으로 훈련받은 저자가 아니며 오히려 ‘팔릴만한 건 뭐든지 가져오는’ 담론판매자에 가깝다. 내 생각에 좀 더 흥미로운 지점은, 그가 특히 강연 등에서 ‘요즘 페미니즘 한다는 싸가지없는 어린 여자들’을 비난하는 걸 넘어 젊은 남자들의 상처를 돌보아주는 ‘우리 아들들 편들어주는 어머니’ 역할을 열성적으로 수행하는 장면들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강연을 다녀온 안티페미니스트 남성들은 벅찬 감동과 함께 마치 (아마 실존하지 않았을) ‘우리 어머니’를 만난듯한 포근함을 토로하기도 한다. 인간이란 목적을 위해서라면 처음 보는 (아마 개인적으로는 혐오하기까지 할) 남자들을 위한 어머니 행세도 할 수 있고, 반대로 인터넷에서 ‘사이버 엄마’를 보면서 돈과 관심을 쏟는 것도 가능한 무척 신비로운 존재다.
…간단히 말해, 가슴 깊숙한 곳에 상처 하나쯤은 지닌 우리의 안티페미니스트 청년들은 온라인에서는 강성(?) 페미니스트 여성을 보며 고통받고, 반대편에서는 사이비 페미니스트 ‘어머니’에게 돈과 관심, 존경심을 헌납하는 삶을 산다는 점에서 이중으로 ‘착취당하는’ 애처로운 삶을 살고 있다.
다시 진지하게 말해보자. 물론 페미니즘 진영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합리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쪽은 적어도 계속해서 입장 충돌이 있고 누군가가 이상한 이야기를 꺼내면 비판은 나온다. 나는 언젠가 정희진 선생이 갠지스강물의 신비로운 효력을 언급했을 때 페미니스트를 포함한 각층에서 다양한 비판적인 반응이 나타났음을 기억한다.
하지만 안티페미니즘 진영은 어떤가? 한국의 안티페미니스트들, 특히 ‘신보수’를 자칭하는 젊은 청년들은 자신들의 합리성과 지적 우월성을 내세우지만, 그들 중에서 여러 안티페미니스트 필자들의 엄밀하지 않은 진술이나 황당한 소리에 비판과 반론을 제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지적으로 전혀 신뢰할 수 없는 필자들이 나와서 조금만 비위를 맞춰주면 그걸 검증하기는커녕 찬양하기에 바쁘다.
만약 오세라비가 정말로 진지하게 현대적인 지적 사고를 추구하는 사람이었다면, 다른 좀 더 신중한 보수파들이 현명하게도 언급을 회피하는 ‘심리학자’로서의 조던 피터슨을 저렇게 강조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우리의 안티페미니즘 진영은 거기에 대한 비판과 의심은 없다. 그곳에선 자신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는 게 중요하지 무엇이 지적으로 맞고 틀린지를 논의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게 ‘신보수’ 자신들이 (주로 문재인 지지자들을 “문베”로 비난하면서 갖다 붙이는) 맹목적인 추종과 뭐가 다른지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다음과 같은 장면을 상상해보자. 우리의 지적으로 도발적인 안티페미니스트 청년이 어느 대학 심리학과에 찾아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저는 조던 피터슨을 통해 현대 심리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칼 구스타프 융을 더 공부하고 싶고, 세상의 사악함과 그것을 견뎌내는 인간의 자유를 심리학적으로 연구하고 싶습니다. 심리학이 세계에 존재하는 차별과 갈등이 어쩔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고 페미니즘이 왜 틀렸는지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심리학 연구자의 답변이 어떨지 여기서 대신 상상해주지는 않겠다.
2. 리얼뉴스의 ‘[기획] 포스트 80년대 운동권 세력의 문화대혁명’ 연재 시리즈
- 「페미니즘 광풍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각」, 리얼뉴스
2010년대 중반 다양한 형태로 등장한 ‘인터넷 대안언론’ 중 하나인 리얼뉴스는 공신력을 가진 언론이라기보다는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기구로(그리고 몇몇 온라인 커뮤니티나 위키 사이트에서 해당 이데올로기의 지지자들이 마치 자신의 말이 공신력을 가진 것처럼 주장하는 걸 돕는 장치로) 보는 게 좀 더 사실에 부합할 것이다.
물론 모든 언론인은 각자의 관심사와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지만 이른바 ‘조중동’으로 묶이는 보수언론이든, 아니면 그 반대편에 있는 ‘진보언론’이든, 최소한 형식상으로나마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한다. 리얼뉴스는 바로 그런 최소한의 노력을 기울이는 대신 기자·필자·데스크의 주관을 최대한 표출하면서 독자의 의견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조작하고자 한다. 특히 안티페미니즘의 유포에 있어서 그 점이 더욱 두드러진다.
링크한 연재물의 필자는, 그의 지적 이력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지적으로 정련된 글을 쓰는 저자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가 자신의 여러 비판대상에게 퍼붓는 말은 실제로 이미 여러 차례 다른 발화자들을 통해 제기되어온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전부 틀린 건 아니나, 그러한 몇 가지 비판론에서 재빠르게 특정 집단에 대한 거친 일반화로 비약하는 순간은 신중한 글쓰기를 훈련받은 필자에게선 나올 수 없다.
순전히 글만 갖고 판단했을 때, 해당 연재물은 문화비평 중에서도 낮은 급의 인상비평에서 찾아볼 수 있는 태도, 거칠고 크고 공격적인 멘트를 마구 날리면서 어떻게든 이야기만 나오면 된다는 식의 자세를 카피한 조악함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럼에도 해당 연재물이 흥미롭게 읽힌 까닭은 그게 한국 안티페미니즘의 내러티브가 지향하는 거대서사의 일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10건 가까운 포스팅을 일일이 읽는데 곤혹스러움을 느낄 분들을 위해 간략히 정리하자면, 해당 연재물의 필자는 현재의 페미니즘을 진보진영의 ‘포스트 80년대 운동권 세력’과 ‘페미피아’의 연합으로 보고, 좀 더 구체적으로는 전자가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후자의 흐름을 이용하고 맹종하는 과정으로 서사화한다.
이때 ‘페미피아’는 “여성·페미니즘이라는 이름만 내걸면 그 구체적인 실상과 상관없이 무비판적·무조건 지지하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를 관철하려고 드는 소위 ‘페미니스트’들의 행태”가 “‘마피아’의 그것”과 같다는 판단에서 나온 명명이다. 내 생각에 필자는 ‘페미나치’라는 보다 넓게 유포된 안티페미니즘의 말을 채택하는 대신 무언가 자신의 오리지널리티를 대중의 언어에 각인시키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유감스럽게도 그의 부족한 교양은 ‘마피아’의 역사적 함의는 물론 언어적 용법마저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싶다.
한편 ‘포스트 80년대 운동세력’은 “80년대 후반 및 90년대 이후 대학 생활을 보낸” 진보적 인사들로 1980년대까지의 학번들과 달리 자신의 주체적인 입지를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상실의 세대’로 규정된다. 간단히 말해 민주화 이후 학생운동의 입지가 축소되면서 쪼그라든 진보세력이 문화계를 거점으로 삼아 전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때마침 닥쳐온 ‘페미피아’를 홍위병처럼 이용한다, 가 필자의 서사를 요약한 것이 되겠다(이렇게 요약하고 보니 왜 굳이 12부작까지 가는 긴 연재물을 만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 내러티브에서 곧바로 뽑아낼 수 있는 정치적 겨냥지점을 거칠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첫째, 필자의 서사는 1980년대까지의 운동과 1980년대 이후의 ‘문화적’ 진보를 갈라놓고 전자는 사회의 거시적인 문제를 다루지만 후자는 대체로 사소하고 불필요한, 만들어진 문제의식이라고 본다. 마르크스주의·노동운동 계열에서 나온 안티페미니스트를 본 적이 있다면 이 포인트는 바로 캐치할 수 있다.
- 둘째, 필자는 민주당지지자, 특히 문재인 지지자들과 페미니즘 진영 및 이를 지지하는 진보를 갈라놓고 싶어 한다. 그는 필요하다면 ‘문재인 지지자 대 진보 언론’ 대립 구도에서 나왔던 언어적 표현을 차용해서라도 ‘문재인 지지자 대 페미니즘’이라는 구도를 만들고 싶어한다.
두 가지가 각각 전통적인 진보의 사회 의제 및 현재의 정치적 주류라고 할 수 있는 문재인 지지자들로부터 페미니즘-진보를 고립시키고자 하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조작을 의도한다면, 이는 다음의 두 가지 전제와 결합한다.
- 첫째, 필자는 ‘포스트 80년대 운동세력’을 무능하지만 열등감과 원한 의식에 찌든 기회주의자로 형상화한다. 내가 필자를 사회의 분석자나 비평가라기보다는 어느 시대에나 나오는 저급한 정치팜플렛 작성자에 가깝다고 (어떠한 악의 없이) 판단하는 이유는, 그가 보다 크고 다양한 규모에서 전개되는 사회적·사상적 변화를 추상화된 도덕적 퍼스널리티에서 비롯되는 문제로 무척 거칠게 단순화하면서 독자의 특정한 도덕적 판단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 둘째, 필자는 기본적으로 젊은 여성의 판단력이 열등하다고 전제한다. 특히 6번 연재물 「‘홍위병’ 이끄는 ‘강청’이 되고픈 ‘상실의 세대’ 1」에서 명확하게 언급되지만, 남성들은 “군대 및 여성보다 폭넓은 사회 경험을 겪게 되면서” 현실적인 사회 인식을 갖기 때문에 “중장년층 이상 여성들 또한 같은 ‘여성’이지만 ‘학교’ 안에서보다 많이 겪었던 현실 경험을 강력하게 신뢰하며 이를 근거로 ‘페미피아’들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아마 조금 냉소적인 독자들은 이게 리얼뉴스의 대표적인 두 기고자인 박가분[군필자 남성]과 오세라비[중장년층 이상 여성]에 대한 문학적 아첨이 아니냐고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남자나 중장년층 이상 여성과는 달리 사회경험이 떨어지는 젊은 여성들은 대학에서 유포되는 페미니즘에 그대로 조종당하는 멍청한 인형들이고, 이 인형을 조종하는 손길은 지질하고 무능한 문화진보다’라는 게 필자의 주장을 간결하게 요약한 이야기가 되겠다(물론 이러한 스탠스는 특히 오세라비가 여러 경로를 통해 드러낸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필자가 이렇게 매우 솔직하게 자신의 여성혐오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의 페미니즘·진보 비판은 여성혐오적 태도와 분리 불가능하다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겠다.
두 가지만 정리하자.
- 첫째, 해당 연재물의 필자 혹은 이를 그대로 게시하는 리얼뉴스의 정치적 목적은 현재의 페미니즘을 두 가지 차원에서 고립시키는 데 있다. 하나는 전통적인 진보 및 민주당·문재인 지지자들로부터 여성주의를 고립시키고, 다른 하나는 젊은 여성을 남성과 (페미니즘을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오세라비와 같은) 중장년층 여성으로부터 고립시킨다. 요컨대 페미니즘을 외따로이 만들어 제거하는 일종의 대(對) 페미니즘 포위전략을 구사하는 게 필자와 리얼뉴스의 전략적 지향으로 보인다.
- 둘째, 이것이 일베나 기존의 남학생 중심 대학생 커뮤니티 등에 나타나는 주로 2030 남성들로 구성된 ‘신보수’와는 다른 결에서 나온 흐름임은 주목할 만하다. 즉 넓은 의미에서 진보진영에 속했던 그룹으로부터 페미니즘 배제를 시도하는 행위자들이 나오는 것이다. 사실상 리얼뉴스의 주 소비층 중 일부가 그런 신보수라는 점에서 (리얼뉴스가 조던 피터슨을 꾸준히 소개해 왔음을 상기하자) 중장기적으로 진보·민주당을 자임하는 그룹 내의 안티페미니스트들과 신보수가 결합할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워마드가 나이든 극우, 즉 태극기부대나 대한애국당과 함께 친박근혜 집회를 여는 것과 비교해보면, 좋든 싫든 (극)우파 헤게모니의 몰락과 페미니즘의 대두는 이전의 진보-보수 구도를 예측할 수 없는 형태로 뒤바꾸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페미니스트들, 혹은 실질적인 성 평등이 한국사회의 일반적 규범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전략적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이 질문에 답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한 건 안티페미니즘의 함정에 이끌려 고립된 포지션을 취하는 것만큼은 피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어떠한 사고를 보편적인 규범으로 설정하는 과제는 좋든 싫든 사회 다수자들을 설득하는 작업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작업은 안티페미니즘을 담론적으로 역포위하고 고립시키는 일을 포함한다. 이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훨씬 작은 규모의 적극적 안티페미니스트 행위자들도 하는 일을 현재의 페미니스트들이 할 수 없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원문: 이우창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