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지켜내는 사람들
저녁 7시 반, 대학가의 작은 카페 앞으로 사람들이 모인다. 대부분 직장이 있는 사람들이다. 일반사무를 담당하는 회사원, 게임회사 기획자, 치과의사, 일러스트레이터, 중고등학교의 교사와 대학교수, 카페 사장도 있다. 모두 각자의 일로 하루를 바쁘게 보내는 사람들이지만 한 달에 두 번 만큼은 이곳 카페로 모인다.
한 달의 반은 함께 정한 책을 읽기도 하고, 또 다른 반 동안은 정해진 분량의 글을 쓴다. 그렇게 모여서는 밤이 늦도록 책에 관해, 또 서로가 쓴 글에 관해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낸다. 몇 달째 내가 진행하는 ‘작가와 읽고 쓰기’ 모임의 풍경이다. 참여하는 사람 중에는 가정주부나 휴직자도 있지만 대부분은 현재 직장이 있다. 그들은 본업에 충실하면서도 매일 저녁, 그리고 주말 별도의 시간을 내 자기 자신을 위한 ‘읽고 쓰는’ 일에 투자한다.
각자의 직업에 대한 열의도 없지 않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저녁의 삶’에 열중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삶이 크게 두 개 이상이 존재하는 셈이다. 자신의 직업적인 일이 부지런히 쌓여가는 현실의 영역의 한편, 자기만의 취미나 제2의 영역이 진행되어나가는 책과 글쓰기의 세계를 지녔다.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시간까지 더한다면 그들은 셋 이상의 삶을 사는 것일 테다.
최근 들어 삶의 이런 여백을 찾아 나서려는 움직임들이 늘어난다. 언론에 따르면 퇴근 후 문화센터를 찾는 이들을 일컫는 ‘문센족’이 매년 증가해 지난가을에는 몇몇 백화점을 중심으로 직장인 수강생이 50% 이상 늘었다고 한다. 주로 2030세대로 이루어진 이들은 매주 문화센터를 찾아가 디제잉, 요리, 글쓰기, 발레, 꽃꽂이 등을 열정적으로 배운다. 그밖에도 ‘탈잉’ 같은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다양한 취미를 계발하기도 하고, 동네 서점 등을 중심으로 한 지역 독서 모임도 성황을 이룬다.
과거였다면 정해진 업무 시간이 퇴근 시간을 넘기기 일쑤였고, 설령 업무가 끝났다 하더라도 빈번한 회식과 술자리로 ‘자기만의 저녁’을 갖는 일은 어려웠을 것이다. 회사를 위해, 자기가 속한 업계와 직업적인 일을 위해 삶을 온전히 바치는 것은 당연시되던 문화가 있었다. 그러나 변해가는 세태 속에서 사람들은 퇴근 이후의 삶, 직장 바깥의 삶을 꿈꾸기 시작했고 실제로 그런 삶의 모습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바야흐로 저녁이 재발견되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가정으로 돌아가는 아빠들
저녁이 있는 삶이 점점 확산되면서, 회사와 술집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던 아빠들도 가정으로 돌아간다. 특히 7월부터 시행된 주 52시간 노동시간 단축이 이런 흐름을 이끈다. 한 대형마트 문화센터의 지난 가을학기에는 저녁 시간대 ‘워라밸’ 강좌 수강생이 전년 대비 50% 정도 증가했는데, 특히 육아에 동참하기 위해 베이비 강좌를 수강하는 워킹대디가 크게 증가했다고 한다.
워라밸은 ‘워크 라이프 밸런스’의 줄임말로, 일과 삶의 조화를 일구어나가는 일련의 흐름을 지칭하며, 이런 방식의 라이프스타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하는 이들을 특히 ‘워라밸족’이라 부른다. 저녁이 있는 삶이 워라밸족들을 크게 증가시키는 것이다. 나아가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남성 육아휴직자도 1년 새 60% 가까이 증가해, 점점 많은 아빠가 가정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슈퍼맨이 돌아왔다’처럼 육아대디를 다룬 TV 프로그램도 큰 영향을 미쳤다.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고, 그를 위해 승진하고, 더 치열하게 일해서 보너스를 타내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단지 사랑하는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일일 것이다. 시간은 지나가면 되돌아오지 않는다. 자식들이 어색한 아빠, 아내를 이해할 수 없는 남편, 돈을 벌어다 주는 기계로서의 가장의 삶은 더 이상 ‘잘 사는’ 삶이 아니다. 대신 잘 사는 삶은 가족과 저녁을 보내는 삶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진다.
직장은 오히려 잘 살기 위한 수단에 가깝다. 사랑하는 이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생활 조건을 주는 것이 직장이다. 자아실현 또한 직장에서 하기보다는 직장 바깥에서 자신이 정말로 좋아하는 일을 찾아 하는 게 더 자연스러워졌다. 이처럼 삶을 분리하는 것에 대한 감각, 삶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으로 공존한다는 인식이 실제로 삶의 질을 더 낫게 만든다. 삶의 질은 삶의 분리와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다.
생산소비자로서의 삶을 일궈나가기
앨빈 토플러는 일찍이 『제3의 물결』에서 생산소비자(프로슈머)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두 개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기존의 GDP와 같은 경제지표는 사회인들이 ‘직장’에서 일하며 생산하고, 그로부터 얻은 임금을 소비하는 금전 등만을 계산했다.
그러나 실제로 토플러에 따르면, 가정에서 일하는 주부의 역할, 그리고 사람들이 자기만의 취미를 즐기며 만들어내는 각종 삶의 영역이 실제 GDP 못지않게 어마어마한 영역을 차지한다는 게 이야기의 골자였다. 그에 따라 앞으로는 기존의 경제학에서 이야기하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개념을 넘어서 각자가 만들어가는 ‘별도의’ 삶의 영역의 주체로서 ‘생산소비자’가 세상을 주도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근래 한국을 보면 이런 각자 삶의 생산소비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언뜻 봐서는 경제지표로 바로 환원되기는 어려울지라도 자기만의 취미를 만들고, 그로부터 경제로 환원할 수 없는 기쁨, 행복, 즐거움을 누리고,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가는 이들이 많아지는 것이다.
그들이 작은 공간에 모여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 나누고, 춤을 추고, 사랑을 나누는 일들은 기존의 경제지표에서 보면 ‘비어 버린’ 시간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 각자의 삶은, 그리고 세상은 더 풍요로워지는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해 사람들이 각자가 어디에서 진정한 ‘현실감’을 찾았는가 하는 이야기로 볼 수도 있다.
과거에 사람들은 각자 업무 영역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업계 내의 인정 투쟁에서 현실감을 찾았다. 또한 그런 인정 투쟁의 시간 이후에 이어지는 술집, 노래방, 회식 자리 등을 전전하며 ‘생생한 현실감’을 좇곤 했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영역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고 각자의 가정에서 따뜻한 생생함을, 그리고 자기만의 취미를 계발하며 건설적인 현실감을 느낀다. 소모적이고 소비적이었던 소비는 새로운 형태의 생산으로, 시간을 ‘살리는’ 방법으로 전환되어 가는 셈이다.
사랑이 있는 삶을 위해
직장에서의 시간, 직업적으로 해야 하는 일을 다소 부정적으로 이야기하긴 했지만, 모든 사람에게 그렇진 않을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자신의 일, 자기의 직장이 곧 자아실현이자 삶의 기쁨과 연결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삶 전체가 ‘일 하나’로만 정의되는 게 더 이상 바람직하지 않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삶은 그 속의 다양한 결을, 다채로운 측면과 여백을 발견할수록 풍요로워지는 법이다. 그 여백, 그 결에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시간을 빼놓을 수 없다. 사랑은 오직 시간에 의해서만 만들어지고 지탱된다.
시간을 쓰지 않고 사랑을 지켜낼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을 쓰지 못해 잃어버린 사랑이 되돌아오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곁에 있는 사람에 대한 사랑, 혹은 자기가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다양한 일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기에 ‘워라밸’을 중시하는 시대,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는 시대란 비로소 사랑을 알게 된 사람들의 시대와 다르지 않다.
이제 시대에 뒤처지는 일은 더 이상 재테크에 실패하고, 승진에서 누락되고, 회식 자리에서 빠지는 일이 아니다. 그보다는 사랑을 알지 못하는 것, 사랑을 누릴 줄 모르는 것이야말로 시대에 뒤처지는 일이 된 셈이다. 저녁을 사랑에 써야 한다.
원문: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