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의 상징과도 같았던 제시와 셀린느가 〈비포 미드나잇〉에서 섹스리스 부부로 나왔던 것이 오랫동안 기억난다. 여느 ‘비포 시리즈’처럼 이 영화 역시 둘의 여행을 다룬다. 두 딸을 데리고 그리스로 여행을 떠난 둘은 그곳에서 어느 그리스인 부부를 만나고 서로 여전히 정열적으로 사랑하는, 말하자면 서로에게 정욕을 느끼는 부부의 낯뜨거움 앞에서 다소 어색함을 느끼고 멋쩍어한다.
그들이 ‘섹스리스’인 것이 명확히 드러나는 건 둘만이 호텔에 간 장면에서다. 그리스 부부는 그들에게 둘만의 시간을 가지라고, 딸들을 봐주겠다고 자처하며 둘을 호텔로 보내준다. 둘은 극구 사양하다가 호텔에 가지만 가서도 서로 어색하기만 하다. 그러면서 딸들이 없는 상태가 얼마나 허전한지 이야기하며 공감하다가 셀린느가 먼저 옷을 벗고 유혹하는데, 섹스는 못 하고 괜히 전 결혼에서 낳은 아들 이야기를 하다가 싸워버리고 만다.
현실 속에서, 어떤 공동의 생활 속에서 섹스는 사라진다. 왜일까? 사실 동거를 하는 연인은 아마 어느 커플보다 열렬히 뜨거운 밤을 보낼 것이다. 하지만 아이를 갖게 된 부부는 어째서 점점 섹스리스가 되어갈까?
이에 대해 또 하나 인상 깊게 기억하는 건 알랭 드 보통의 『낭만적 연애와 그 이후의 일상』에 나왔던 구절이다. 책에서 그들은 서로가 더 이상 ‘남여’로 보이지 않고 아이의 ‘아빠와 엄마’로 보이는 그 정체성이 너무 강한 나머지 성적 매력을 느낄 수 없다고 고백한다. 이성 혹은 당신이 아니라, 엄마 혹은 아빠와는 섹스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두 편의 영화와 소설에서 깊이 몰두하게 만드는 부분은 ‘공동생활’과 ‘정체성’의 부분이다. 어쨌든 〈비포 미드나잇〉에서 섹스리스로 지내던 그들이 호텔에 들어서자 섹스를 하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그것은 일단 둘만 있게 된 덕분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호텔이라는 공간 때문일 것이다.
호텔에는 생활의 흔적이 없다. 생활의 흔적, 그것은 곧 우리의 자질구레한 모든 현실이 쌓이는 ‘정체성 축적’의 공간이다. 인간으로서 필요한 모든 것, 먹고, 자고, 싸고, 분비하고, 쉬고, 나태해지고, 무력해지고, 권태롭고, 재밌고, 행복한 그 모든 것들이 한 공간에 축적된다. 그리고 그런 ‘모든 잡다한 생활과 현실’은 섹스를 없앤다.
반면 호텔에서는 그런 ‘모든 잡다한’ 것이 사라진다. 그 공간은 텅 빈다. 그 대신 오직 두 사람만이 온전히 존재한다. 현실과 생활을 이루는 것들 속에 함께 뒤섞여 있는 게 아니라,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존재인 서로가 앞에 ‘놓여’ 있다. 그 공간을 채울 수 있는 건 오로지 두 사람의 존재, 서로로부터 퍼져 나오는 존재감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섹스한다. 서로가 서로로 뒤섞여, 이 공간을 채우기 위해서 서로를 만난다. 그 텅 빈 공간에서야 비로소 헐벗어야 할 이유가, 만남의 가치가 생기는 것이다.
‘엄마와 아빠’라는 정체성은 그 자체로 서로를 단독자의 정체성에서 이탈시킨다. 나와 당신이 아니라, 아이의 아빠이자 아이의 엄마인 존재, 아이를 그 정체성에 ‘함유’하는 사람은 사실 이미 ‘만난’ 사람이자 ‘연결’된 사람이고, 뒤섞인 사람이다. 엄마와 아빠는 헐벗고 서로를 만나 ‘둘로서’ 이 공간을 채우고자 하는 열망에 휩싸일 수 없다. 적어도 그런 갈망이 일어나려면, 어느 순간에 만큼이라도 그러한 ‘각자’를 되찾아야만 한다.
그렇게 보면 섹스(모든 섹스라기보다는 더 엄밀한 의미에서의 인간적인 섹스)가 이루어질 수 있는 공간은 단독자가 될 수 있는 공간인 셈이다. 또한 섹스할 수 있는 시간은 서로가 자기 자신일 수 있는 시간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으로 필사적으로 이르면서도 나와 당신일 수 있는, 함께이고 서로일 수 있는 삶의 몇 안 되는 방법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원문: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