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공학을 전공했던 대학 시절 나를 가장 괴롭게 한 것은 전공을 잘못 선택하지 않았나 하는 회의였다. 나름 열심히 정을 붙여서 공부하려고 했지만 내 가슴에 공학이 잘 와닿지 않았다. 그 고민은 석사 시절 본격적인 연구를 하면서 확신에 이르렀고 마침내 다른 전공을 다시 선택하려고 이곳저곳 기웃거렸다.
그런 방황의 과정을 거쳐서 다시 마음을 고쳐 잡는 데 3년이 걸렸다. 그동안 석사도 겨우겨우 따고 군 시절 방통대도 다녀 보았지만 다른 전공으로의 전이가 쉽지는 않다는 결론을 냈다. 그 후 유학준비를 해서 운 좋게 유학이라는 기회를 통해 공학박사를 받고 현재 실리콘 밸리의 한 IT 기업에서 각종 통신 관련 칩을 설계하는 공학자로 살아간다.
유학하면서 비로소 진지하게 공학을 대하게 되었다. 이 공학을 연구하면서 그리고 회사에서 실제로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칩을 설계하면서, 세상을 살아가고 이해하는 여러 좋은 태도를 다음과 같이 배웠다.
1. 물리학적 직관
어떤 기술적인 현상을 이해할 때는 그 현상을 표현하는 수학적 방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현상을 일으키는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에서 수업을 들었을 때 수많은 공학적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수많은 수학 방정식을 외우고 시험을 치고 나서 한 달만 지나면 공학적 현상에 대한 이해를 잃어버렸다.
미국 교육에서 인상 깊게 배운 점은 수학적 방정식에 담겨있는 물리학적 직관을 아주 중요하게 다룬다는 점이다. 왜 이 공학적 현상을 다루기 위해서 지수함수 혹은 삼각함수의 수식을 사용했는지 강조를 통해 얻은 이해는 오랜 기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다른 현상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이런 공학적 태도는 사회를 이해하는 데도, 인간관계를 이해하는 데도, 다른 학문을 접할 때도 응용할 수 있는 방법론이다.
2. 이상과 현실의 균형감각
엔지니어로서 배우고 몸에 터득한 것은 각각의 제품에 있는 스펙을 달성하기 위해 어떠한 타협을 해야 하는 점이다. 시장이 원하는 제품을 개발할 때 그 제품이 최대한의 공학적 성능을 가지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주어진 제품 개발 스케줄을 맞추는 일, 다른 경쟁사에 비해 단가를 낮추는 일, 이 제품과 관련된 테스트나 현장에서의 응용을 수월하게 하는 일 등도 중요하다.
엔지니어는 여러 다른 목표들을 함께 생각해야 하고 그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타협점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 존재한다. 타협점 사이의 장단을 분석해 현실적인 해결책을 단기간에 마련하는 센스가 중요하다. 이 센스는 다른 분야에서도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을 현실에서 실현하려고 할 때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3. 철두철미한 분석 태도
한 번에 제대로 돌아가는 전자회로나 기계는 없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가 왜 발생했는지 그리고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리적 설명을 찾아야 되고, 다른 엔지니어들을 이 논리로 설득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른바 디버깅(Debugging) 과정은 그냥 책상에 앉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실험과 반복적 노가다를 수반한다. 공학적 직관도 뛰어나고 혁신적 아이디어도 잘 생각하지만 이런 노가다 과정을 꺼리는 엔지니어는 현장에서 반쪽짜리 엔지니어일 수밖에 없다. 이런 철두철미한 분석 태도를 영어로는 일명 “문제의 끝을 봐라(Get to the bottom of the problem)!”고 표현한다.
4. 편집증적 꼼꼼함
챌린저 우주왕복선의 사고원인은 O링이라는 고무패킹이 추운 날씨에 제 기능을 못함으로써 발생했다. 엔지니어링의 세계에서는 크기, 기능, 역할에 관계없이 한 제품을 이루는 모든 부품이 같은 중요성을 가진다. 다른 모든 부분이 완벽하게 돌아가도 하나의 작은 제어시스템이 돌아가지 않으면 그 제품은 사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래서 아주 작은 부분도 무시하지 않고, 확인하고 해석하고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일들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공학부문 저명한 논문 중에서는 대학교에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을 만한, 대량 생산에서 생기는 작은 문제를 꼼꼼하게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논문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꼼꼼한 태도는 인생사 여러 문제의 대중소를 가리지 않고 작은 문제도 진지하게 대하는 자세를 가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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