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다녔던 직장에서 큰 행사를 진행할 때 있었던 일이다. 일의 효율성을 위해 실무자 대여섯 명이 대기실에서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당시 옆 테이블에 어느 직원의 가족이 있었는데, 갑자기 아가의 기저귀를 갈기 시작했다. 응가였다. 너무 깜짝 놀랐다. 바로 옆에 화장실도 있었고 옆 테이블에서 식사 중인 사람이 있는데 어떤 양해도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게다가 그 기저귀도 화장실이 아닌 대기 장소에 있던 휴지통에 버렸다. 나 포함 몇 사람이 너무 놀라서 티가 났었나 보다. 나중에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고상 샘이 아직 결혼도 안 하고 아기도 안 낳아서 그래.
아기를 낳고 기르면 이해할 수 있어.
아니. 나는 아가를 낳고 기르고 있는 지금도 그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양해라도 구했다면 이해할 수 있었을까. 식사하면서 아가의 응가를 봐야 했던 그 일은 내게 그저 충격으로 남았다.
나도 아가가 목을 가눌 무렵, 식당에서 기저귀를 갈아본 적이 있다. 너무 만나고 싶은 사람들과 모임이고 아가의 탄생을 무척 축하해주신 분들이라 남편과 아가와 함께 무리해서 갔다. 모임 장소도 우리 가족을 배려해서 식당의 구분된 장소인 온돌방으로 잡아줬고, 모임 내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중, 안고 있던 아가의 기저귀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기저귀를 갈기 위해서 차로 가려고 일어나자, 여러분이 쌀쌀한 날씨에 아가가 불편할 것이라며 방구석에서 갈라고 하셨다. 다행히 응가가 아닌 쉬라서 직원에게 말씀드리고 구석에서 갈았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대부분의 일반 식당은 기저귀를 갈 만한 곳이 없다) 기저귀 갈이대가 아닌 곳에서 기저귀를 갈았다면 적어도 주변에 양해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부분 사람이 괜찮다고 했더라도 불편한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저귀를 가지고 나오는 것은 더 당연하고.
| 혐오의 시대, 혐오의 대상 중의 하나인 맘충
지금은 혐오의 시대다. 너도나도 편을 갈라 대립하고 있다. 일반적인 단어에 벌레라는 의미의 충(蟲)을 붙여 혐오의 대상을 지칭하면서 비아냥대고 있다. 급식을 먹는 초중고 학생은 급식충, 진지하게 설명하는 사람은 설명충 등. 엄마도 예외는 아니다. 맘충이라 불리고 있으니 말이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맘충 관련 글을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맘충이란 게 실체가 있는 걸까. 혐오의 시대에 만들어지고 부풀려진 허구의 대상이 아닐까.
나는 자신이 주변에 민폐를 끼칠까 봐 전전긍긍하는 엄마만 봤다. 물론, 내가 맘충을 본 적 없으니 없는 존재라는 의미가 아니다. 인터넷에 돌고 있는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게 내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아서 그렇다. 물론, 그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는 이미 인간으로서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즉, 엄마가 되기 전부터 이미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 몇 사람 때문에 엄마를 싸잡아서 혐오하는 맘충이라는 단어가 허용될 수 있는 걸까.
얼마 전에는 맘충이라는 단어의 긍정적인 효과로, 조심하는 엄마들이 증가했다는 글을 봤다. 긍정적인 효과라. 육아휴직 중일 때 아가를 유모차에 태우고 산책하다가 아가가 잠들자 카페에 갔던 기억이 있다. 아가가 깨고 나서 칭얼거리자 마시던 커피를 급히 들이켜고 밖으로 나왔다. 아무도 내게 뭐라 하지 않았는데 나는 이미 너무 위축되고 겁먹었던 것이다. 조용하고 아담한 카페를 좋아해도 아가와 함께 가려면 그런 곳보다는 시끌벅적한 곳을 가게 된다. 상대적으로 아가의 울음소리나 칭얼거림에 사람들의 시선이 덜 집중되기 때문이다. 이런 게 그들이 말하는 긍정적인 효과일까?
| 왜 맘충만 있을까?
엄마의 혐오 단어인 맘충이 보편적으로 쓰일 동안, 아빠의 혐오 단어인 파파충은 그렇게 많이 드러나지 않는다. 여성 인권이 우리나라보다 낮다는 일본조차, 문제를 일으키는 부모를 일컬어 ‘몬스터 패런츠(モンスターペアレント, monster parents)’라고 하는데 말이다.
복직을 앞둔 어느 날, 어린이집에서 아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조치할지 내게 물어온 적이 있다. 휴직 중에는 아가가 낮잠을 자지 않거나 갑자기 열이 오르면 내가 집으로 데려왔지만, 복직 후에는 어떻게 할지 알려 달라는 것이었다. 우리 부부는 양가에 도움을 청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남편과 상의 후 급작스레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나보다 회사가 가까운 남편에게 연락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아가에게 문제가 생기면 나에게 연락이 온다. 어린이집으로서는 비상 연락을 대부분 엄마에게 하므로 그게 익숙할지 모른다. 그러나 육아를 하면서 여러 일을 겪다 보니, 아가에 대한 책임감이 아빠보다 엄마에게 더 지워지는 것 같아서 종종 불편할 때가 있다.
아무리 맞벌이를 한다고 해도, 아가와 관련된 일은 엄마의 몫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남자는 육아의 1%만 해도 좋은 남편이자 좋은 아빠가 되지만, 여자는 조금만 실수해도 맘충이 되고 만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처음으로 부모가 된 것인데, 왜 엄마가 하면 당연한 일이고 아빠가 하면 대단한 일이 되는 것일까.
나는 맘충이라는 혐오 단어가 생긴 배경에는 모성애라는 신화가 한몫을 담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엄마가 되자마자 모든 여성에게 모성애가 생기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사람은 ‘엄마라면 이래야지’라는 기준을 가지고 있나 보다. 맘충이라는 단어를 쓰지 말자는 글에 이런 종류의 댓글이 항상 달리는 걸 보면 말이다.
맘충이라 불릴 만한 사람만 그렇게 불러요.
그런 짓 안 하는 엄마는 신성하고 대단한 존재인걸요.
엄마는 혐오의 대상일 필요도 없고, 신성하게 여겨질 필요도 없다. 그저 엄마다.
| 혐오의 시대가 끝나기를
맘충이라 일컬어지는 사람의 비상식적인 행동이 이슈가 되면서, 노키즈존(No Kids Zone)이 증가했다고 한다. 아직 우리 아가가 ‘베이비’라서 그런지 노키즈존을 본 적은 없다. 어느 장소에 갔을 때 아가가 돌발행동을 하면 눈치를 보게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대놓고 나가라고 하거나 처음부터 들어오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중에 ‘베이비’가 자라서 ‘키즈’가 된 후에 노키즈존을 마주하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노키즈존이 무엇인지 알게 된 아이에게 세상은 이미, 혐오 대상을 정해서 구분 짓고 차별해도 되는 곳이 돼버렸을 텐데 말이다. ‘저기는 아저씨가 들어갈 수 없는 노아재존이야. 저기는 노인이 들어갈 수 없는 노실버존이야.’ 이런 식으로.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배우기도 전에, 차별하는 세상을 먼저 배워버릴까 봐 무섭다. 어서 혐오의 시대가 끝났으면 좋겠다.
원문: 고양이상자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