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랑과 전쟁〉에서 헤밍웨이는 자신의 사랑을 배신했던 첫사랑이 다시 자신에게 돌아와도 끝내 받아주지 않았다. 잠깐 다른 이에게 흔들렸다는 이유로 전쟁 가운데에서도 이어졌던 인연에 끝내 뒤돌아보지 않았다. 타오르는 듯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 고통을 끝내러 온, 자신의 사랑을 다시 깨닫고 돌아온 여인을 외면한 것은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헤밍웨이는 여성 편력이 심했다고 전해진다. 영화에서는 그 원인을 첫사랑의 아픔 때문으로 본 것이다. 이 영화는 사실 픽션에 가까운데, 남자 주인공이 헤밍웨이가 아니라 하더라도 충분히 가슴 아프게 다가왔을 이야기였다. 헤밍웨이를 조금이라도 아는 독자들은 다 알다시피 헤밍웨이는 권총으로 자살했다. 매일 꾸준히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그가 죽음을 선택한 데에는 인생의 허무함에 직면하던 날카로운 습관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걸 ‘실존적 허무감’으로 표현할 수도 있겠다. 만약 헤밍웨이의 생애 마지막을 영화로 만들었다면 ‘사랑과 허무’가 아니었을까? 헤밍웨이에게 끝내 결핍된 한 가지는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헤밍웨이와 사이가 안 좋던 어머니가 헤밍웨이 아버지가 자살할 때 썼던 권총을 헤밍웨이에게 생일 선물로 준 것만 보더라도 헤밍웨이에게는 우리에게 당연하게 있는 무언가가 없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사람들은 로맨스 이야기에 빠져드는가
왜 사람들이 로맨스 이야기에 빠져드는지 알고 싶어서 읽은 로맨스 작법론에서 인상 깊은 문구를 읽었다. 아마 이 때문에 사람들이 로맨스 이야기에 매력을 느끼는 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맨스 소설의 남녀 주인공은 서로가 완전한 사랑을 이루기 위해 다양한 시련을 겪고 마침내 둘은 영원히 함께한다. 로코 드라마를 포함해 로맨스 소설의 대다수가 해피엔딩인 이유는, 우리에게 환상과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환상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 이야기에 몰입하기 위한 현실적 요소는 필요하지만, 모든 상황이 우리의 현실이면 안 된다. 우리의 현실은 대부분 시간이 평이하거나 고통스럽거나 아주 가끔 그마저도 운 좋은 경우 행복하기 때문이라, 우리는 잠시 현실을 잊고 싶어서 로맨스에 빠져드는 것이다.
로맨스의 인물들을 쉽게 정의하자면, 사랑 하나만을 위해 사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정작 현실의 우리는 사랑의 햇살 아래 놓여있지 않는 순간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로맨스를 통해, 그게 인위적인 햇살이라는 걸 알면서도 환상에 빠져든다. 환상에 적당히 빠져들 수 있어야 현실을 버틸 수 있기도 하다.
나를 완벽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까?
우린 그런 사랑이 앞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꿈꾼다. 말로 표현하지 못해도, 언어가 달라도, 내가 받은 사랑을 돌려줄 수 없더라도 끊임없이 나에게 사랑을 주는 그런 사랑. 우리도 한때 그런 완벽한 사랑을 받았던 적이 있다. 바로 아기였을 때 부모로부터 받은 완벽한 형태의 헌신이 그렇다.
내가 가진 게 없어도, 심지어, 뇌도 완성이 안 되고 신체는 매우 취약한 상태인데, 부모는 내 존재만으로 나에게 다 주었다. 말하지 않아도 내 말을 어떻게 그렇게 다 알아맞혔을까? 로맨스 소설은 부모가 아기에게 주었던 대가 없는 사랑을 모방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선 절대 재현 불가능하다.
애착 시스템(attachment system)과 양육 시스템(care-giving system), 성적 시스템(sexual system)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상대에게 사랑을 갈구하든, 사랑을 외면하든 그 관계의 양상은, 아이가 부모에게, 부모가 아이에게, 그리고 자신의 배우자나 파트너에게 바라는 사랑의 내용이 서로 연관되어 영향을 미친다.
어린 시절 대가 없이 부모에게 충분히 사랑을 받았던 아이들이 성장해서 자신의 아이에게 동일하게 할 것이라는 건 누구나 예상 가능하다. 배우자나 파트너에게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중요한 건 내 경험을 해석하는 것은 나라는 점이다. 내가 사랑을 충분히 받았다고 여겨져야 하는 거다.
애정 결핍은 목마름과 같다. 내가 필요한 만큼 물을 마셨다면 갈증이 없을 테고 그런 상태가 애정이 충만한 상태인 것이다. ‘나는 물로 피부 저 밑에서부터 촉촉해’라며 경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딱히 물을 찾지 않는 그 상태를 말한다. 덧붙여 언제든 목마르면 물을 마실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여유도 있다.
자신에게 관심 없는 부모의 사랑을 얻기 위해 애쓰는 아이의 모습(아기가 아니라 아이)과 배우자나 파트너에게 파트너 예상 대상까지 포함 관심을 얻기 위해, 때로는 유혹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겹치는 점이 많다. 우리는 머리로는 안다. 사랑을 갈구한다고 얻을 수는 없다고. 그러나 갈증 난 사람이 물만 생각하듯이 사랑도 마찬가지다.
그럼 부모에게 사랑을 못 받은 사람은 자식에게도, 배우자에게도 사랑을 줄 수 없는 걸까? 애착에 관한 종단적 연구를 살펴보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할 때가 많은데, 마라톤을 뛸 때처럼 어느 지점에서 생수를 주는 사람을 놓치면 또 다른 지점에서 생수를 주는 사람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걸 아는 사람은 목마르다고 뒤돌아서 아까 생수를 주던 지점으로 달려가지 않고 다음 기회를 기다리며 정진한다.
우리가 인생에서 만나는 사랑도 마찬가지다. 부모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고 외면당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다음에 자신의 인생길에 사랑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못할 수는 있지만, 사랑의 기회는 여러 번 찾아온다. 목마른데 물을 쥐고 안 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달라고도 할 수 있다.
인생에서의 첫 만남인 부모와의 만남도 중요하지만, 이후 만남도 가치 있다. 가치 있는 만남을 알아챌 수 있다는 게 우리의 애착이 안정화되어간다는 신호다. 그 신호를 체득함으로써 우리는 자식에게도, 배우자에게도 사랑을 줄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살기 위해 간절히 원하는 건 사랑
원숭이 애착 실험으로 유명한 해리 할로(Harry Harlow)는 생존을 위해서 모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품’ 즉 접촉 위안이라고 말했다. 다른 말로 포옹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전 연령대에 성별을 초월해서 애정을 표현할 수 있는 방식이 바로 포옹이다.
헤밍웨이와 로맨스 소설, 그리고 애착에 관련된 이론들은 동일하게 우리에게 메시지를 정한다. 우리가 살기 위해 간절히 원하는 건 사랑이라고.
원문: 당신이라는 책을 펼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