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어느 유명 언론사 손녀의 갑질 논란이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어디 저~먼 나라 이야기 같지만, 갑질은 언제 어디서 도적같이 우리에게 찾아올지도 모른다.
기자를 하면서 가장 좋은 게 뭐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가장 먼저 꼽는 게 갑질을 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보다 더 좋은 것이 뭐냐고 묻는다면, 갑질하는 사람을 골탕 먹일 수 있다는 점을 꼽겠다.
엥? 기사 써서 가능?
노. 아니다. 기사를 그렇게 막 쓸 수는 없다. 대신 다른 방법이 있다. 오늘은 내가 기자 생활을 하면서 목도하고, 관찰하고, 맞닥뜨렸던 갑질에 관해서 이야기해볼까 한다.
갑질 순환 역사에 대한 단상
최근 학부모 모임에서 크게 화제가 된 일이 있다. 바로 ‘갑질’. 아니 무슨 갑질이 있길래 화제씩이나 되나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럴만한 일이었다. A 대기업 주재원이 저지른 갑질인데 내용을 들어보니 기가 찬다.
A 기업 주재원 D는 올해 30대 초중반이다. 이제 막 주재원으로 부임했고, 주요 업무는 협력업체 관리 및 품질 관리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갑질 문화야 베이징에서 잔뼈가 굵은 협력업체들이 어느 정도 다들 감수하는 편이라 웬만해서는 크게 이슈가 되지 못한다. 그런데 이 D란 놈이 저지른 만행은 화를 거의 안 내는 내가 봐도 전두엽이 저려올 만큼 스펙타클했다.
일단 직접 확인한 만행만 적어 보면, 협력업체에서 제품을 납품하면 원청에서는 불량 검사라는 것을 하게 된다. 제조업체 종사자라면 익숙한 이 과정에서 1차 갑질이 발생했다. D는 협력업체가 가져온 제품에 불량이 발생할 경우 ‘어디 어디 문제 개선 요망’이라고 적어 제품을 돌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오함마를 가지고 물건을 때려 부순다(이거 내가 봤음).
진짜냐고? 그렇다. 진짜 때려 부수고 있었다. 사실 이거 재물손괴에 해당한다. ‘슈퍼 을’인 협력업체가 신고한다는 조건에서 말이다. 을인 게 죄라고 찍소리도 못하는 협력업체 납품 담당 직원은 오함마에 만신창이가 된 제품을 주섬주섬 챙겨 회사로 돌아가면서 얼마나 자괴감이 들겠나. 그날 저녁 ‘처자식만 아니면 저 자식을 그냥’ 하며 술로 쓰린 속을 달랠 거다. 아. 상상도 하기 싫다.
2차 갑질은 더 진화한 형태다. 이 D란 놈은 나이가 어린 편이다. 30대 초중반이라고 했으니 연줄이 좋은 은수저라고 해도 잘 해봐야 차장 정도다. 일반인이면 잘해야 과장, 아니면 고참 대리 정도 됐을 거다. 오너 일가는 현장에 안 나갈 테니 논외로 하자. 그런데 D가 상대하는 협력업체 담당자들의 나이는 적다고 해야 40대 중후반, 책임자급은 50대 초중반이다. 나이 차가 많게는 20살 넘게 차이 난다.
뭐 나이가 깡패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람의 기본 됨됨이만 생각해봐도 아버지 같은 분을 앞에 다 불러 놓고, 고함을 치고, 물건을 때려 부수는 저 행위가 이해가 가나? 내가 그 집 아들이었으면 당장 오함마 들고 쫓아가서 너 죽고, 나 죽고 했을 텐데 당하는 분도 아들 걱정 끼칠까 봐 말도 못 꺼내셨을 거다.
D의 3차 갑질은 더 집요하고 쪼잔하다. D에게 당하고, 당하고, 당하던 한 업체 중진급 간부가 한번은 분기가 탱천해 참지 못하고, 한소리 했다고 한다.
거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니오. 이러는 법이 어딨소. 나이도 그리 많지 않아 보이는데…(말끝을 흐리며, 정신 돌아옴)
이 이야기를 들은 D는 당연히 노발대발하며 그 협력업체 대표를 소환했다. 무슨 큰 죄라도 진 양 대표는 가서 사정사정을 했고, 화는 냈지만 뒷일 수습이 걱정됐던 중진급 간부는 더 큰 죄라도 진 거처럼 담배만 뻐끔뻐끔 피우며 형벌이 내려지기를 기다렸을 테다. 결과는 D의 강력한 요구에 이 간부는 한국으로 돌아가게 됐다. 그리고 이상한 자리로 인사가 나고, 자연스럽게 퇴직 수순을 밟았다.
그럼 D는 신변에 아무런 변화가 없단 말인가? 응. 없다. 어쩌면 협력업체 잡도리를 잘한다고 칭찬을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D에 대한 소문은 좁은 교민 사회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협력업체들은 부글부글 속을 끓였지만, 그렇다고 저 D 하나 처단하자고 밥줄을 걸 순 없지 않은가. 결국 다들 참고, 참고, 또 참는 중이라고 한다.
갑질 3연타 대처법
이 이야기로만 전해 듣는데도 몸이 부르르 떨리고, 뒷목이 뻐근하니 없던 정의감이 다 불타 흐른다. 이 이야기를 해준 쪽에서는 기사는 절대 안 된다며 신신당부를 하는 통에 일단은 함구하기로 했다. 기자를 하면서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이 바로 ‘내가 정의다’라는 마음가짐이다.
실제로 한쪽의 일방적인 주장을 듣고 기사를 쓰거나 분노했다가는 기사가 엉망이 되고 낭패를 보는 일이 많다. 또 이로 인해 뜻하지 않게 억울한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내 생각이 맞는지 그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런 사안에 대한 접근은 최대한 신중해야 한다(물론 D의 경우는 이미 검증이 끝났을 정도로 확실한 증거가 있다). 그럼 이렇게 배알이 꼴리는 대로 가만히 있어야 하는가?
이런 경우 기사로 조지는 것보다 소프트한 방법을 택하는 것이 좋다. 교민 사회는 굉장히 좁은 커뮤니티를 가졌다. 고로 소문이 빨리 퍼진다. D란 놈의 갑질을 멈추게 하고 싶다. 미치도록 하고 싶다. 그렇다고 D의 밥줄을 아예 끊어버릴 만큼 일을 벌이는 것은 또 안될 일이다. 행여나 D가 줄줄이 딸린 처자식이 있고, 건사해야 할 식구가 있다면 어쩌겠는가.
일단 이런 경우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대사관에서 기업 관리를 담당하는 외교관들에게 술자리에서 자연스럽게 ‘그 이야기 들었어요?’를 시전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뒷이야기는 갑과 을 어느 쪽도 특정되지 않게 조심조심 변죽을 울리는 식으로 덧붙인다. 이렇게만 하면 끝날까? 아니다. 외교관들은 의외로 무지 바쁘다. 그사이 을의 고통은 계속된다. 다음 단계로 신속히 들어가야 한다.
소문의 씨앗을 맨 꼭대기에 심었으면, 이제 옆자리에도 심어야 한다. 우선 D의 회사가 아닌 동족 업계 고위급 인사를 만난다. 그런 다음 이렇게 말하면 된다. ‘아 글쎄, 요새도 이런 일이 있네요’. 그럼 이 인사가 ‘어. 나도 들었어요’ 하면 위에 뿌린 씨앗이 잘 퍼지는 것이니 안심하면 된다.
‘아. 그래요?’ 하면 씨앗을 더 확확 뿌려 줘야 한다. ‘혹시… 선생님네 회사 이야긴데 제가 실수한 건가요?’ 하며 거름을 확 뿌리는 거다. 그러면 다음 날쯤이면 대충 D의 정체가 업계에 퍼지게 돼 있다. 그런데도 눈치 없는 D가 계속해서 갑질을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뭐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에 가는 방법밖에는 없다. 마침 딱 소문이 퍼지기 좋은 연말이다. 각종 송년회가 난무하는 때라는 뜻이다. 사실 조만간 D네 회사 송년회가 잡혀 있다. 송년회 자리에 가면 이때는 이것저것 잴 것 없이 술을 들고 테이블을 도는 D네 회사 최종 보스가 우리 테이블에 왔을 때, ‘아니. 글쎄 그런 소문이 돌던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라고 한마디만 하면 된다.
이 회사 조직문화상 최종 보스가 저 이야기를 들었으면, 다음날 모든 직원이 일렬종대로 서서 보스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고해성사해야 할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이 밤이 다 가기 전에 색출작업이 끝날 수도 있다.
그럼 어떻게 되나요
높은 확률로 D는 잘리지 않는 선에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 이런 작업은 굉장히 공을 들인 것이고, 사실 이 정도로 확실하게 팩트 확인이 된 상황이면, 제보자가 결심만 해주면 기사가 나가고 D는 회사를 즉시 그만둬야 할 수도 있다. 그런 데 그리하면 제보자의 회사도 파탄이 나니 이 방법은 쉽지 않은 방법이다.
D가 사라져 이제 속이 시원한가?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 문제가 뭐냐면, D에게 갑질을 당한 우리의 ‘슈퍼 을’들도 정도만 다를 뿐 D와 똑같이 병, 정, 무, 기, 경, 신, 임, 계에게 그대로 을질을 한다는 것이다. 이 지독한 갑질 순환의 역사여. 이제는 좀 바꿔보자.
원문: 김진방 돼지터리언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