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칸투칸 8F에 최초 기고된 글입니다.
3층 카페에서 내려다보면
패션이라고는 그야말로 ‘1도 모르는’ 사람이라도 요즘 유행하는 아이템이나 컬러, 소재가 무엇인지 정도는 쉽게 알 방법이 있다. 바로 번화가의 2층 또는 3층 카페에 앉아 유심히 창밖을 바라보는 것. 인터넷 포털에 ‘2018 F/W 패션 트렌드’ 같은 키워드를 검색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카페에서 쉴 새 없이 거리를 활보하는 군중들의 면면을 살피다 보면 더 직관적으로 유행을 확인할 수 있다.
약 한 달 전부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소재 중 하나가 바로 ‘플리스(Fleece)’다. 실제로 당신이 어느 번화가의 카페에 앉아 30분만 밖을 바라보고 있으면 갖가지 플리스 소재의 옷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흔한 플리스 재킷부터 플리스 맨투맨, 플리스 머플러, 플리스 코트까지.
사실 플리스 소재의 대중적 인기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유니클로의 시그니쳐 제품군으로 종전의 히트를 했던 것이 바로 이 플리스 재킷이었으니까. 아 물론, 우리에게는 ‘후리스’로 더 익숙하다. 그 SPA 브랜드가 일본 브랜드라 그랬던 건진 몰라도, 플리스보다 후리스가 더 정감 가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우선은 플리스로 통일하자.
플리스의 정체
네이버에 Fleece 라고 검색해보면 두 가지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 첫 번째로 ‘(한 마리의 양에게서 깎아 낸) 양털’
- 두 번째는 ‘양털같이 부드러운 직물, 플리스’이다.
쉽게 말해 양털이거나 그 비슷한 직물을 말하는 것인데, 이렇게 듣고 나니 오히려 더 친근감이 들지 않는가? 인조 양털,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아닌가?
이제는 ‘복고’가 되어버린 80년대, 당시 옷 좀 입는다는 젊은 남녀라면 하나씩 갖고 있던 청재킷. 추운 겨울에도 그 멋을 버릴 수가 없을 땐 안감과 목 주변 옷깃 부분에 인조 양털이 수북한 겨울용 청재킷을 입었던 기억을 되새긴다면 플리스가 그리 낯설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반가울지도…?
요즈음 패션 업계에서 후한 대접을 받는 플리스는 당연히 실제 양털이 아닌 양털 질감을 살린 합성섬유 직물을 의미한다. 고어텍스와 함께 등산 의류에 일대 혁명을 가져온 소재로, 미국 말덴 밀즈 사가 개발했다. 파일(pile)이라고도 부르며, 천연섬유보다 가볍고 보온력과 염색성이 뛰어나다. 신축성이 좋고 관리가 쉬우며 습기에도 강하다. 다만 찬 바람이 불면 외풍 들듯이 몸 구석구석이 시리긴 하지만, 요즘은 방풍 레이어나 안감을 통해 이런 단점도 충분히 보완할 수 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스포츠 의류에만 활용되던 플리스가, 올해부터는 캐주얼과 포멀, 옷과 생활 잡화의 영역을 넘어 맹활약 중이다.
플리스 소재로 된 머플러는 가볍고 따뜻하며 살에 닿는 촉감이 좋다. 게다가 화장이나 라면 국물이 좀 튀어도, 세탁기에 넣고 돌리면 그만이니 고급스러운 울 머플러보다 훨씬 저렴하면서도 실용적이다. 맨투맨이나 후드 티셔츠, 후드 집업과 같이 ‘밀도 높고 좋은 면 100%’를 미덕으로 여기던 아이템들도 플리스 소재로 환골탈태했다. 저마다의 장단점이 있는 법이긴 하지만, 면 소재보다 형태 안정성이 뛰어나 착장 시 실루엣이 단정하고 여러 번 세탁 후에도 새 옷처럼 산뜻하다는 장점이 소비자들을 만족시키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겨울철 포멀한 아우터의 대명사인 코트도 플리스 소재로 제작되고 있다. 질 좋은 울 소재와 테일러 링이 생명이었던 코트의 높은 콧대를 플리스 소재가 간단히 짓누른 셈이다. 가격은 저렴해지고 시각적인 보온성은 더욱 좋아졌다. 게다가 수년 전부터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오버사이즈 핏’과의 조합으로 편안한 착용감까지 갖췄으니 이번 기회에 플리스 코트 한 벌쯤 사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플리스의 윤리학
사실 앞서 언급한 실용적인 이유 말고도, 플리스 소재의 호황에 기대해볼 만한 윤리적 요소도 있다. 이미 덕 다운이나 구스 다운 제품들의 제작 과정에서 살아있는 오리와 거위의 털을 뽑는 비윤리성이 지적된 바 있다. 물론 시장이란 윤리나 도덕만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서(아니, 솔직히 말해 윤리나 도덕은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해서) 여전히 덕 다운, 구스 다운 제품들은 불티나게 팔린다. 몇몇 브랜드에선 RDS 인증을 받아, 오리나 거위의 사후 깃털과 솜털만을 사용했다는 점을 강조하며 제품의 우수성과 함께 브랜드의 윤리적 정당성을 함께 획득하려 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윤리, 동물권, 더 크게는 생물의 생존권 등을 이유로 모피나 가죽, 다운 제품들의 사용을 금지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현시대의 인간은, 안타깝게도 비윤리성을 전제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각고의 노력과 변치 않는 신념으로 비윤리적 제품들을 모두 불매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리고 그것이 비난받거나 조롱당할 일은 더더욱 아니지만, 모든 인간이 그래야만 한다고 말한다면 ‘지금으로서는 불가능’이라고 할 수밖에. 우선 나 같은 인간이 있지 않은가. 고기는 맛있으면 되고, 옷은 디자인 마음에 들고 가성비 좋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무디고 무책임하고 비윤리적인 인간이.
그러나 적어도 사회의 어떤 부분들이 더욱 더 윤리적인 방향으로 진전되는 것에 대해서 불평하거나, 그것을 방해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가령, 다운 제품들의 대체재로서 기존의 솜을 연구, 개발하여 다운 제품만큼 높은 보온성과 실용성을 지닌 제품을 만드는 일은 환영할 일이지, 딴지 걸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소비자 입장에서도 관리가 쉽고 가격은 더 저렴한 신슐레이트라든가 히트볼, 웰론 패딩이 출시되면 반길 일이니까.
그런 지점에서, 근래의 플리스 전성시대는 단순히 패션 트렌드를 선도하는 소재로서가 아니라, 의식주 중 ‘의’에 있어서 보다 윤리적인 방향으로 작은 오솔길이 만들어지는 일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음식이든 옷이든 ‘천연, 자연에서 유래한, 유기농’ 같은 단어들에 대한 대책 없는 환상과 호의를 품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수년의 연구로 만들어낸 인조 섬유들은 저 나름의 의미와 장점이 있는 법. 진짜 양털로 짠 옷이 갖는 높은 보온성과 특유의 감성, 그리고 전통적인 방식과 역사라는 헤리티지를 무시할 순 없겠지만 플리스 소재가 갖는 편의성과 보온성, 신축성 등의 장점 또한 우리 생활을 돕는 유용한 자산이다.
트렌드 리더까지는 아니라도 트렌드라는 거대한 파도를 즐기면서 자기 나름의 멋을 발휘할 방법. 적어도 올겨울에는 플리스 소재 제품을 구입하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지 않을까. 거기다 이 사회의 윤리적 발자취에 아주 약간의 보탬을 더한다는 의미까지 더한다면, 당신의 겨울은 조금 더 따뜻할지도 모른다.
원문: 김경빈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