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이 많은 도시?
이번 여름 동유럽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오스트리아 빈에 이르렀을 때 문득, ‘장애인이 많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사이에 마주치는 휠체어 탄 사람들이 서울보다 훨씬 눈에 많이 띄었다. 관광지를 비롯해 버스, 지하철, 국가를 이동하는 기차 등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엔 장애인도 있었다.
내가 관광지 위주로 다녔기 때문에 마주친 장애인들도 대부분 관광객으로 보였는데 (당연하지만) 자유롭게 놀러 다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들의 야외활동에서 일어날 수 있는 불편함을 보조하는 사회적 인프라가 갖춰졌다는 의미로 비쳤다. 장애인뿐 아니라 어딜 가나 임산부, 노인 등 모든 신체적 약자를 위한 시설이 잘 마련되어 있었다.
같이 가는 신호등
도시에 좋은 인상이 생긴 와중 신호등을 봤을 때 한 번 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빈의 신호등은 특이하게 한 명이 아닌 두 명씩 짝지었다. 더 특이했던 점은 보통 ‘짝꿍/커플’을 나타내는 픽토그램은 여자와 남자가 한 쌍으로 이뤄지는데 빈의 신호등은 같은 성별끼리 짝지어져 있다는 점이었다.
어떤 건 ‘여여’ 짝꿍으로 보이고 다른 건 ‘남남’ 짝꿍이었다. 신호등마다 픽토그램과 상징이 일치하지도 않았다. 어떤 신호등에선 정지의 빨간불이 여자고 다른 신호등에선 남자인 식이다. 이쯤 되니 이제 꼭 치마를 입었다고 여자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한국에 돌아와 오스트리아 빈 신호등에 대해 검색을 좀 해보니 많은 언론에서 이 남남-여여 신호등을 동성애를 지지하는 신호등이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동성애는 찬반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지지’한다는 건 좀 이상한 표현인 거 같고 ‘다른 사람과 함께 간다’는 의미를 담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멋진 공공 디자인이었다.
이 도시에 태어나 저런 신호등을 보고 큰 아이라면 그렇지 않은 아이보다 길을 건널 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훨씬 자연스럽게 도울 것 같았다. 그리고 초록불이 켜지면 하트가 뜨는데 그런 귀여움이 길거리에 공공 디자인으로 존재한다는 게 좋았다. 왜 귀여움이 세상을 제패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앙증맞은 작은 하트는 전 세계의 누가 봐도 싫어할 수 없을 것이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다양성
신호등에 이어 나를 또 신선한 충격에 빠뜨린 건 트램 안의 교통 약자 스티커였다. 신호등과 마찬가지로 트램마다 성별 스티커가 랜덤으로 붙여져 있었다. 임산부를 제외하곤 노인, 장애인, 아동 보호자를 나타내는 그림이 남성 버전도 있고 여성 버전도 있었다. 심지어 그래픽 별로 색상도 랜덤이라서 어떤 특정 색이 특정 대상을 상징하지 않았다.
스티커라는 게 물리적으로 부피가 큰 건 아니지만 시민들이 매일 보는 곳에 부착했기에 그 존재감은 생각보다 크다. 매일 건너는 신호등에, 출퇴근길 트램에 이런 섬세한 감수성이 담긴 게 정말 부러웠다. 이 도시가 좀 더 ‘모두에게 살기 좋은 곳’을 표방한다고 느껴졌다.
실상은 혹시 다를지라도 모든 사회 구성원을 존중하는 모습을 길거리에 시각적으로 표현한다는 게 멋졌다. 고작 여자(남자) 버전 외에 그래픽이 하나씩 더 있을 뿐인데 인생의 다양성을 지향한다는 느낌까지 받았다.
섬세해 주세요
빈 트램 스티커를 보면서 서울 지하철의 임산부 배려석을 떠올렸다. 분홍색 의자 아래엔 ‘핑크 카펫, 미래의 주인공을 위한 자리입니다.’라고 써 있다. 여성=핑크색이라는 단순한 발상은 둘째 치고 바닥의 문구가 배려받는 주체를 몸이 불편한 임산부 당사자로 명시하지 않는 점이 늘 아쉬웠다. 색상과 카피를 비롯한 총체적인 디자인 요소에 위 빈의 사례들에서 느꼈던 섬세함이 좀 더 있었다면 어땠을까.
학생들의 교과서를 개정할 때 사회 각계는 신경을 곤두세운다. 몇백만 명의 청소년들이 다 같이 보고 배우는 개념이기에 중요하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이만 배우는 건 아니다. 시민 의식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감수성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평생을 배우고 길러야 한다. 그리고 공공 디자인이 일종의 간접적인 교과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공공 디자인의 힘은 누구나 보게 된다는 점이다. 아침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집 밖에 한 번이라도 나가면 어쩔 수 없이 마주친다. 그래서 도시가 좀 더 섬세한 감수성으로 도시의 그래픽과 조형물을 설계한다면 말 그대로 세상이 아름다워지는 데 큰 힘이 되지 않을까. 내가 사는 서울에도 그런 섬세함을 꿈꾼다.
원문: 소금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