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대리는 학창 시절부터 모범생이었다. 시험은 만점 받지 못하는 날이 있어도 태도 점수가 깎이는 날은 없었다. 언제나 생활지도부에는 ‘주변 친구들에게 모범이 됨’이라고 기록됐다. 대학에서도 남 대리는 모범생다웠다. 학점관리, 대외활동, 어학연수, 인턴 경험 등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 어느 하나 빠짐없이 철저했다. 치열한 과정을 거쳐 그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대기업에 입사했다. 언제나 그를 수식하는 키워드는 성실, 착실이었다.
하지만 짜릿한 기쁨도 잠시였다. 남 대리는 꿈에 그리던 사원증을 목에 걸었지만 뭔가 허전했다. 연차가 쌓여 갈수록 하루하루 회사에서의 삶이 공허했고 사무실에 앉아있는 선배들을 보며 본인의 미래를 걱정했다. 과장 진급을 앞둔 어느 날 ‘요즘엔 퇴사가 유행이라고 합니다.’라는 의미심장한 글과 사원증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남겼다. 깨알 같은 #퇴사그램이라는 태그와 함께. 남 대리는 호기롭게 사직서를 제출하고 사업을 해본다고 했다. 모범생인 그답게 준비도 착실히 했다. 사업 초창기 처음 몇 개월은 꽤 잘 되는 듯싶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곧 그가 사업을 포기했다고 알려왔다. 학교에서도, 회사에서도 모범생이었던 남 대리는 왜 망했을까. 모범생이 사업하기 뭐가 그렇게도 힘들었는지 그 이유는 도대체 뭐였을까.
모범생이 사업 잘 못 하는 이유
1. 온전히 스스로 결정 내려본 적이 별로 없기 때문에 결정 장애가 있다.
남 대리는 사업을 시작하고 나니 의외로 사소한 부분 하나하나 결정해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집기는 어느 정도 가격 선에서 몇 개나 준비할 것인지, 전등은 어느 정도 위치에 달 것인지, 심지어 쓰레기통은 어떤 색으로 골라야 할지까지 사소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결정이 넘쳤다. 그는 선택의 순간마다 매번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의 삶을 돌아보니, 그는 결정의 순간 스스로 결정을 내린 적이 많지 않았다. 그렇다기보다 누군가의 말을 잘 듣는 게 더 익숙했었다. 대학 전공을 고를 때도 취업이 잘 되는 학교와 과가 중요하다던 부모님의 뜻을 따랐다. 입사 지원을 할 때도 이 회사가 연봉이 제일 많고 복리후생이 가장 좋다는 취업 커뮤니티의 얘기를 따랐다. 회사에 다닐 때도 팀장님 입맛에 맞게 보고서를 정리하고 상무님 결정에 따라 조금씩 수정하면 그만이었다. 어쩌면 퇴사도 트렌드처럼 번지지 않았으면 생각해보지 않았을지도.
어떻게든 꾸역꾸역 의사결정을 해나가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온전히 본인의 힘으로 의사결정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 원칙도, 방향성도 없이 매 결정 마다마다 기분에 따라 좌지우지되고 있었다.
2.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완벽하고 싶다.
남 대리는 모범생답게 꼼꼼했다. 회사에선 완벽주의자라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그는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답을 찾고 싶었다. 워낙에 똑똑한 사람이었기에 최대한 다양한 선택지를 앞에 놓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무엇이 있는지 최대한 찾아보느라 시간을 소비했고 그중 무엇을 선택해야 가장 효율적인지 계산하느라 또 더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적절한 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결국에는 많은 것들을 고려만 하다 그냥 안 하고 넘어가고 말았다. 고민의 시간이 너무 길어져 이제와하느니 안 하느니만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완벽주의적 성향 때문에 결정을 할 때마다 우직한 성공보다 영민한 포기를 결정하는 횟수가 많아졌다.
3. 사업 말고도 대체재가 너무도, 너무도 많다.
남 대리는 사업을 시작하고 나니 예전에는 미처 생각도 못 했던 일들이 홍수처럼 밀려들어왔다. 회사를 다닐 때는 사소한 IT 기기 고장도 전부 사내 지원팀을 이용했다. 하지만 일단 사업을 시작하고 나니 IT 기기 수리는커녕 형광등 가는 일, 변기 청소까지 모두 다 본인의 일임을 깨닫게 됐다. 자잘한 잡무뿐만 아니라 사업을 시작한 뒤 만나는 고객들도 그를 힘들게 했다.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비상식적인 요구를 거듭하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클라이언트에게도 웃음을 팔아야 할 때면 그는 매번 수명이 단축되는 느낌이 피부로 들었다.
그는 나름 명문대-대기업 출신 고급인력이었다. 그에게 손에 흙 안 묻히고도 고상하게 돈 벌 방법은 많았다. 당장이라도 경력을 살려 다른 회사로 이직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두 팔 벌릴 회사가 많았다. 그게 아니면 아는 선배가 하는 학원에서 영어강사로 뛰어도 당장 괜찮은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도 아니면 잠시 아르바이트 삼아 했던 취업 컨설팅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그의 머릿속은 ‘내가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돼?’로 가득 찼다.
이런 어려움들을 겪을 때마다 사업 시작 전 호기롭던 남 대리는 온데간데없어졌다.
사업 못하는 모범생들을 위한 처방전 한 스푼
1. 스스로의 기준으로 결정하는 버릇을 들이자
스스로 의사결정을 내려본 적이 적은 사람은 갑작스레 쏟아지는 수많은 결정들로 당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업을 한다는 것은 마치 타격 연습기 앞에 서는 것과도 같지 않을까. 타격 연습기 앞에 선 순간 머릿속으로 하는 이미지 트레이닝은 끝난다. 끊임없이 던져지는 수많은 공들이 당황스러워도 어떤 방식으로든 쳐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스윙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의지대로 내 스윙을 하다 보면 본인만의 스타일에 맞는 스윙을 찾게 된다. 그 스윙을 찾을 때까진 수많은 스윙을 직접 휘둘러봐야만 안타 치는 감과 코스도 생기고 실제로 홈런을 칠 가능성도 더 커진다. 누군가의 말을 잘 따르는 게 미덕이었던 모범생에게 지금 필요한 건 스스로의 기준을 확실히 세우고 그 기준에 따라 결정하는 버릇이다.
2. 완벽함이 아니라 신속함이 경쟁력이다.
그만 고민하자. 일단 먼저 실행하자. 전쟁터에서 최악의 지휘관은 잘못된 의사결정을 하는 지휘관이 아니라 의사결정을 제때 내리지 못하는 지휘관이라는 말이 있다.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보다 선택을 제때 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순간 피해가 더 커진다는 것이다.
Success consists of going from failure to failure without loss of enthusiasm
(성공은 열정을 잃지 않고 실패에 실패를 연속하는 것들로 구성된다)
– 윈스턴 처칠
사업은 정답이 정해진 채로 중간/기말로 구분이 되는 시험이 아니라 연속적인 의사결정의 과정이다. 단 한 번의 의사결정 실수로 모든 것을 날리지 않는다. 또, 단 한 번의 기가 막힌 의사결정이 모든 것을 만들어주지도 않는다. 백 번 고민해서 100점짜리 답안지를 내기 위해 낑낑대는 것보다 좀 모자라더라도 빠르게 실행하고 빠르게 수정, 보완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어떤 시험문제를 만나도 100점을 만들기 위해 교과서 끄트머리까지 완벽하게 공부했던 모범생에게 필요한 건 조금 모자라더라도 빠르게 실행하고 빠르게 수정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3. 일단 시작하면, 배수의 진을 치고 하자
‘내가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돼?’라고 묻는다면 많은 선배 사업가들은 ‘응, 그래 그거까지 해야 돼’라고 대답할 것이다. 정 손에 흙 묻히는 게 싫다면 빨리 사업을 포기하고 본인에게 맞는 다른 선택을 하자. 많은 선배 사업가들이 조언한 것처럼 사업은 ‘그냥 한 번 해볼까?’수준으로 덤벼서 될 가벼운 것은 아니다.
사업을 만만한 것으로 보지 마세요. 숨 쉴 틈 없이 달려도 커트라인에 들어갈까 말까이지요
(….)
사업은 진짜 경기거든요.
– 권도균, 프라이머 대표
능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많을 것이다.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많은 사람일수록 흔들리기 쉽다. 하지만, 더 안정적이고, 더 편안한 수많은 선택지를 뒤로하고도 사업을 우선적으로 선택한 본인만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를 잃어버리지 말자.
일단 한 번 시작했다면, 배수의 진을 치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꼭 끝을 보자.
얼마 전, 남 대리가 다시 사업을 시작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사업실패 이후 그동안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됐다고 했다. 지금까지 너무 모범생으로 산 것 같다고. 지금까지 살던 대로 모범생처럼 사업하면 안 될 것 같다고. 한 번 망해보고 이제 좀 알겠으니 다시 한번 도전해보겠다고. 살아 숨 쉴 때까진 열심히 하겠다고 했다.
비록 그의 첫 사업이 거대한 성공으로 끝나지는 못했지만, 끊임없이 그가 열심히 시도하는 한 처음의 시도가 영원히 실패로 남지는 않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를 지켜보는 나도 조금은 용기가 생긴 것 같다. 오늘도 열심히 살아갈 세상의 수많은 남 대리들 파이팅.
※ 남 대리는 상상 속의 인물일 뿐 실존 인물은 아닙니다.
원문: 경욱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