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다루고자 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별, 장애, 성적지향 등 여러 이유로 교육과 직업 훈련 등에서 차별받지 않도록 하는 법입니다. 유엔(UN)에서 여러 차례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고 권고했지만, 우리나라 국회에서는 2007년, 2010년, 2012년 세 차례 발의했을 뿐 입법화하지 못했습니다.
성별·장애·성적지향 등 포괄적 대응 필요
26일 오후 2시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자대학교 법학관에서 ‘혐오와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하여 차별금지법 제정’ 학술대회가 열렸다. 행사를 주최한 이화여대 젠더법학연구소의 유니스 김 소장은 개회사를 통해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배경과 의미를 소개했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병역거부자와 장애인 등에 대한 혐오·차별 문제가 정리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답을 얻으러 왔다”라고 말한 백승덕(36·징병연구자) 씨 등 50여 명의 청중이 진지한 표정으로 토론에 귀를 기울였다.
첫 발표에 나선 한지영 이화여대 법학박사는 사회적 관심이 쏠렸던 ‘미투(MeToo, 나도 고발한다)’ 운동을 거론하며 여성차별 해소에 미온적인 정치권을 비판했다. 한 박사는 “지난 1월 서지현 검사의 검찰 내 성추행 폭로 이후 약 3개월간 130여 건의 성차별·성폭력 관련 법안이 쏟아져 나왔지만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것은 5건에 불과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포괄적)차별금지법 제정이 어려우니 성차별금지법부터 먼저 제정하자는 입법 전략은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라며 “두 개의 법안은 같이 가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는 이와 관련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성별·종교·장애·임신·출산·노조 활동·정치적 의견 등 모든 차별금지 사유를 종합적으로 규율하고, 특별히 필요성이 있는 영역은 개별적 차별금지법이 보완하는 방식으로 전체 체계를 짜는 게 바람직하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직접차별·간접차별·괴롭힘·성희롱·혐오 표현 등을 차별금지법이 포괄적으로 규율해야 한다”라며 “차별의 범위, 차별금지 사유, 차별영역, 국가·지자체의 의무, 차별 구제 등을 법제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특히 “특정 차별 사유만을 위한 법을 각각 제정할 경우, 인권위에서 정한 총 19가지의 차별 사유 중 다루지 못하는 영역이 생길 수밖에 없다”라며 포괄적 법안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당사자들도 모르는 장애인차별금지법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이미 2008년도에 입법화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시행된 이후 우리 사회가 어떻게 바뀌어 왔는가를 되짚어 보면, 저는 그렇게 바뀐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김명수 홍익대 법학연구소 전임연구원은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17년 장애인 실태조사에서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장애인이 60% 이상’이라는 부분을 들어 ‘당사자와 유리된 정책’을 비판했다. 그는 “저상버스가 있지만 타고 다니는 장애인을 보기 힘들고, 장애인 화장실 등 시설이 있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잘 모른다”라며 “과연 누구를 위한 법이고 시설인지 물을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김 연구원은 이어 “우리 사회의 차별은 중첩적이며 복합적”이라고 지적했다. 이를테면 여자라서 비정규직이 될 확률이 높고, 장애인이기에 빈곤해질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그는 “따라서 모든 차별을 아우르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필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성 소수자 차별에 대한 발표를 맡은 조혜인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는 국제인권단체와 국제 인권법 전문가들이 최근 정리한 성별표현(Gender Expression)과 성징(Sex Characteristics)이라는 개념을 설명했다. 성별표현은 신체적 외양과 스타일, 말투, 행동 양식을 통해 자신의 성별을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징은 생식기, 기타 해부학구조, 염색체 등 성과 관련한 개개인의 신체적 특징을 말한다. 조 변호사는 성 소수자와 관련해 지금까지 논의돼 온 성적지향(Sexual Orientation)과 성별 정체성(Gender Identity) 외에 이 두 가지 새로운 개념이 차별금지법에 반영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성 소수자가 겪는 차별의 양상이 ‘성적지향, 성별 정체성, 성별표현, 성징’이라는 네 가지 측면에서 포착될 수 있도록 법에 구체적으로 서술해야 한다는 것이다.
법 제정 공약했던 문재인 대통령, 한발 물러서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있는데도 여전히 장애인들이 사회에 많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성 소수자들은 스스로를 드러내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가능한가? 이 질문을 저는 던져야 한다고 봅니다.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이 삶의 주체로서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데서 출발합니다. 근데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를 숨겨야만 하죠. 단순히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성 소수자라는 이유로 권리를 체계적으로 박탈당하는 집단이 있어요. 이런 현실에서 과연 우리는 ‘민주주의’를 얘기할 수 있나요?
이어진 토론 시간에 차별금지법제정연대의 미류 공동집행위원장이 이렇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이 2012년 대선에서 ‘차별금지법’을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2017년에는 이를 공약집에서 빼고 ‘인권 기본법’을 약속했다고 회고했다. 미류 위원장은 “(문 대통령이) 자신을 지지하는 이들에게도 성 소수자 인권과 차별금지법에 관한 요구를 듣지 않도록 독려한 것과 다름없다”라고 비판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두고 이것을 찬반 논쟁처럼, 마치 누군가에게 ‘설득’해야 하는 문제로 설정하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권리를 자기 뜻대로 무너뜨릴 수 있다고 여기는 것까지 우리가 허용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과거 우리가 전체주의에 맞서 싸웠듯이, 이것은 우리가 행동하고 투쟁해야 하는 문제라 생각합니다.
열띤 토론이 끝난 후, 청중석에 있던 이화여대생 장슬기(27) 씨는 “차별금지법이라는 이슈 자체가 여러 가지 다양한 층위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 관계자들이 와주셨고 동성혼과 여성 관련 이슈들도 들을 수 있어서 의미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학계, 법조계, 활동가들의 설명을 통해 통합적인 시각을 얻었다“고 덧붙였다.
원문: 단비뉴스/ 윤종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