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 대한민국에 민주화 물결이 일던 그때, 정권의 무자비한 사전 검열 속에서도 살아남은 영화들이 있다. 영화를 상영하려면 ‘높은 곳’의 눈치를 봐야 했기에 〈바람 불어 좋은 날〉(1980)을 검열받을 때는 주인공이 부른 노래 가사에서 ‘순자’를 ‘응자’로 바꾸기도 했다. 때로는 검열을 받으며 정권에 순응했지만,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신기원을 열고 시대적 아픔을 작품에 담아내고자 한 영화인, 이장호 감독이 제천을 찾았다.
처음과 마지막을 신성일과 함께한 감독
‘한국영화 100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이기도 한 그는 11일 개관 10주년을 맞은 제천영상미디어센터에서 못다 한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도 여전히 한국영화의 미래를 꿈꿨다.
그는 4일 작고한 배우 신성일과 함께 영화 ‘소확행’을 함께 만들 계획이었다. 그와 신성일은 1974년 〈별들의 고향〉에서 만나 당시로는 획기적인 46만 관객을 울린 뒤 영화 인생을 함께해왔다.
엉터리 시나리오로 만든 영화가 대 히트
신군부의 문화정책으로 1980년대 영화계는 불황이었다. 제작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이장호 감독은 자포자기 심정으로 정부 입맛에 맞는 영화를 하나 만들게 된다. 검열 대상이던 〈어둠의 자식들〉(1981) 후속작인 〈바보선언〉(1983)이 그것이다. 시나리오는 통과되지 않고, 촬영을 안 하려니 돈을 댄 제작자의 압박은 거세지고, 궁여지책으로 엉터리 시나리오를 만들어 ‘영화를 망하게 할’ 생각으로 촬영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이 감독의 의도와는 달리 대히트를 친다. 가야 할 길이 막힌 세 청춘의 모습을 통해 확고한 주제 의식을 나타냈을 뿐 아니라 한국 영화계에도 실험적 연출이 등장했다는 호평을 받았고 오늘까지도 수작으로 꼽힌다.
이 감독은 “대충 쓴 시나리오로 현장에서 만화처럼 찍어냈다”며 “계약 위반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영화가 도태당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하다가 사실과 반대로 만든 영화였는데, 엉뚱하게 리얼리즘 회복 영화가 됐다”고 설명했다.
촬영 당시 스텝과 배우들도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영문도 모른 채 엉성하게 촬영을 진행했다고 이 감독은 전했다. 정권의 압력 속에 엉뚱하게 진행된 영화가 되레 시대 배경을 잘 담아낸 영화가 된 셈이다. 어느 날 내무부에서 이 감독에게 영화 상영을 해주겠다는 연락이 왔다.
이게 웬일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는 외화-방화 교차상영 시스템이던 터라 외국영화가 흥행이 안 되자 함께 빨리 내릴 수 있는 한국영화를 고른 것이 〈바보선언〉이었어요. 그런데 일주일 상영 예정이던 이 영화는 대학생들에게 높은 평가와 지지를 받고 한 달을 훌쩍 넘겨 상영되며 대 히트를 쳤지요.
블랙코미디 영화 〈바보선언〉
〈바보선언〉은 동철과 육덕, 혜영이 보여주는 블랙 코미디다. 이들은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1980년대 한국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지성의 공간으로 묘사된 ‘이화여대’, 청량리역이라는 ‘청춘의 광장’, 사창가 등의 모습도 비춘다. 동철은 혜영과 하룻밤을 꿈꾸고, 혜영은 대저택 마당에서 고기 파티를 하는 부유한 삶을 꿈꾼다.
두 인물을 통해 1980년대의 양극화 사회를 보여주는 한편, 전두환 정권의 우민화 스포츠 정책으로 영화가 죽어가는 상황을 영화감독의 투신 장면으로 비판한다.
이 영화는 특별한 스토리가 없지만, 1980년대 암울한 시대상과 공산품을 소비하기 시작한 한국의 물질만능주의를 묘사했다는 평을 받는다. 영화에 특별한 줄거리가 없는 이유는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 대충 시나리오를 쓰고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연출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한국 영화에서 보기 힘든 실험적 요소가 많이 들어간 수작이라고 영화평론가들은 입을 모은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는 국회의사당 앞에서 육덕과 동철이 탈춤을 추면서 항의하는 듯한 모습이 나오는데, 1980년대 정권에 대한 울분으로 비치면서 대학생에게 인기를 끌었다. 이 감독은 “영화에 나온 장면들이 군사독재 시절 표출되지 못하고 억눌려 있던 젊은이들의 마음을 대변했던 것 같다”며 “이 작품은 암울한 시대가 만든 영화”라고 말했다.
슬럼프와 어려운 환경이 만들어낸 영화
이 감독에게 고난은 ‘창작의 원천’이었다. 〈별들의 고향〉으로 스물아홉 젊은 나이에 데뷔하며 주목을 받은 이 감독은 1976년 대마초를 피우다 단속에 걸렸다. 4년간 영화를 만들 수 없었고 영화인으로서 군부정권 아래 창작도 여의치 않게 되자, 만약 다시 영화를 만들게 된다면 소외 계층이나 한국 영화가 그동안 하지 못한 것을 다뤄보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부유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이 감독은 영화인으로서 성공한 배경을 ‘열악한 시대’로 돌리곤 한다. 그는 “나의 재능보다는 내가 살았던 암울한 시대와 불법을 자행한 결과(대마초)로 영화를 할 수 없게 된 개인적 슬럼프가 영화를 살리는 원천이 됐고 힘이 됐다”고 회고했다. 50여 년 동안 영화인으로 살았지만 그의 영화 연출은 13년뿐. 그에게 영화를 만들 수 없던 시기는 되레 다시 영화를 만들 수 있게 하는 힘의 근원이었던 셈이다.
독립영화가 한국영화 구원투수 될 수도
내년이면 한국영화 탄생 100주년을 맞는다. 100년 문턱 앞에 와 있는 한국영화에 대해 이 감독은 ‘흙수저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감독은 성공한 흙수저 인쇄공과 금수저로 대변되는 자신을 비교하며, 암울한 상황과 고난은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상황을 전환할 기회가 온다고 말했다.
2차세계대전 전후 사실주의를 추구한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이나 기존 상업 영화를 거부한 뉴 아메리칸 시네마 등도 현실이라는 장애를 새로운 정체성으로 극복했습니다. 대기업이 오직 돈을 벌기 위해 폭력적이고 잔인한 상업 영화를 만들고 배급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독립영화가 꾸준히 아름답고 실험적인 작품들을 만들어낸다면 언젠가 독립영화가 한국영화의 구원투수가 되는 시절이 올 거라 믿습니다.
원문: 단비뉴스 / 필자: 오수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