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옷 바꿔 입는다고 경제가 살아날까
옷깃부터 단추까지 모두 빨간 상의.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해 7월 11일 2차 무역투자진흥회의에 이어 9월 3차 회의에도 같은 옷을 입고 등장했다. “우리 경제에 많은 열정을 불어넣어서 경제를 활력 있게 살려야 한다는 뜻으로 열정의 색깔인 빨간색을 입고 나왔다”며 스스로 ‘투자활성화복’이라 이름 붙인 재킷이다.
대선 전날 방문한 한국거래소에서 코스피 3000 시대를 약속한 것을 비롯해, 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 주요 경제행사에 줄곧 빨간색 상의를 입고 나타났다. 6월 방중 당시 경제사절단 조찬, 8월 국민경제자문회의와 중견기업회장단 오찬, 12월 창조경제박람회 개막식, 지난달 9일 외국인투자기업간담회 등도 디자인은 달랐지만, 강렬한 이미지의 빨간색 패션은 변함없었다.
박 대통령은 예전부터 머리 스타일과 패션을 잘 이용하는 정치인으로 통했다. 육영수 여사를 떠올리게 하는 올림머리가 대표적인데, 머리카락을 여러 개 핀으로 추켜올려 고정시킨 헤어스타일을 오랫동안 고수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순간에는 ‘전투복’이라 불리는 바지정장을 입은 것도 유명하다. 취임 이후 군 관련 행사에서 줄곧 카키색 외투를 입는다거나 해외순방에서 한복을 빼놓지 않는 등 패션을 이용한 메시지 전달에 적극적이다.
취임 이래 기자회견도 단 한 번뿐이었고 주요 시국현안에 대해서도 침묵하는 등 ‘불통 이미지’를 쌓아온 박 대통령이 지난 일 년 패션으로는 또 다른 ‘이미지 만들기’를 해온 셈이다. 지난해 2월 25일 취임 이후 일 년이 되는 오늘까지 <단비뉴스> 취재진이 청와대 홈페이지와 페이스북에 올라온 사진을 중심으로 일일이 집계한 결과, 박 대통령이 착용한 옷은 총 122벌이었다. 공식일정에서 사진으로 찍힌 의상 가운데 중복 착용한 것들은 뺀 수치다. ‘패션정치’ ‘패션외교’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임기 일 년 만에 공식석상에서 착용한 옷 가짓수가 이렇게 많았던 것은 우선 옷을 자주 갈아 입은 해외순방이 잦았기 때문이다. 첫 순방지였던 미국에서 5일간 선보인 옷만 한복 3벌을 포함해 모두 10벌이었다. 9월초 G20 참석차 방문한 러시아와 베트남 국빈방문, 그리고 10월초 APEC 참석과 동남아 순방에서는 각각 13벌을 착용했다. 중국방문 3박4일에는 9벌, 유럽순방 1주일간은 무려 16벌을 갈아입어 패션쇼를 방불케 했다.
대통령에게 스타일링 제안하는 언론
황금색부터 분홍·초록·빨강 등 화려한 양장과 한복을 다양하게 입고 등장하니, 대통령이 순방길에만 오르면 언론은 의상 관련 보도를 쏟아낸다. 미국 방문 때 박 대통령이 푸른 재킷을 입고 나타나자 오바마 대통령의 넥타이와 색깔이 같다며 ‘커플룩’ 효과를 운운했고, 영국 방문 때 다홍색 저고리에 연분홍 치마를 입고 나오자 흰색 드레스를 입은 엘리자베스2세 여왕과 ‘색 궁합’이 맞는 패션외교라고 추켜세웠다. 9월초 베트남을 방문하면서 첫 공식일정으로 ‘한복-아오자이’ 패션쇼 무대에 올랐을 때는 국내 언론 대부분이 ‘한복외교’라며 찬사를 보냈다.
언론은 해외 순방의 목적·의미·성과 등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해외반응 등을 자체적으로 취재해 보도하기보다는 청와대가 내놓는 보도자료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했고, 대통령의 패션 등 볼거리를 보도하는 데 치중했다. 보도라기보다는 홍보에 가까운 기사들이 많았다.
<동아일보>는 토요판 커버스토리로 4개 면을 할애해 대통령의 패션을 집중보도하기도 했다(2013년 9월 7일치 ‘박근혜 패션 프로젝트’). 지금까지 패션을 심층분석해 베스트와 워스트를 꼽는가 하면, 패션전문가에게 의뢰해 새로운 스타일링을 제안하기도 했다.
패션 센스만큼 빛나는 적재적소 정치를
순방 목적과 성과는 파악하기 힘든 반면 볼거리만큼은 화려했던 해외방문이 잦았던 덕분에 박근혜 정부 1년을 평가하는 주요 업적으로 ‘외교’가 꼽히고 있다. 물론 여성 대통령이 외국에서 한복 등으로 패션감각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 입었던 옷을 다시 입는다 해서 흉잡을 외국인도 없다.
취임 첫 날 한복과 양장 다섯 벌을 소화한 것을 언론이 화제로 삼으면서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지만, 특히 보수언론이 대통령의 패션 변화에 호들갑을 떨면서 정작 주목해야 할 대통령의 공약 뒤집기 등 실정에 대해서는 감시기능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언론이 ‘적재적소 패션’이라며 TPO(Time, Place, Occasion)를 고려해 자신이 입을 옷을 직접 결정한다는 박대통령의 스타일링을 칭찬한 것과 달리, 지난 1년간 국정운영은 패션 센스만큼 빛나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경제민주화와 복지확대 등 야당의 선거공약 등을 자신의 것으로 선거전에 활용했으나, 결국 종래의 ‘줄푸세’ 기조, 곧 ‘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세우는’ 쪽으로 정책방향을 틀고 말았다.
지난해 12월 17일 전국경제인연합회를 방문한 박대통령은 트레이드 마크가 된 빨간 재킷을 입고 등장해 규제완화를 약속했고 한국거래소를 방문해 빨간색 투자활성화복을 입고 경제성장을 천명하는 사이, 핵심공약이었던 경제민주화는 자취를 감췄다. 대선 당시 호언장담했던 복지공약 역시 대부분 파기되거나 후퇴했다. 지급범위가 축소된 기초연금은 국민연금까지 흔들고, 4대 중증질환 무상의료는 ‘무상’이란 말이 무색해졌다. 국가가 책임진다던 영유아 보육과 교육은 중앙과 지방정부 사이 국고보조 힘겨루기 속으로 던져지고 말았다.
보수색을 드러내기 위해 파란색 옷을 즐겨 입던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가 정계를 떠날 때 새빨간 옷으로 갈아입고 자기 심경을 대변한 것처럼, 여성 정치지도자들이 옷을 통해 메시지를 전하는 경우는 외국에서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대통령 후보로서 내세운 공약들이 대부분 축소되고, 임기 일년차 정부의 성과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화려한 패션은 암담한 현실을 위장하는 이미지 정치나 이벤트 정치가 되기 십상이다.
‘패션 꽝’ 메르켈과 ‘3천켤레 구두’ 이멜다의 교훈
재임시절 핀란드를 국가청렴도 1위, 국가경쟁력 1위, 학업성취도 국제비교 1위인 나라로 만들고 퇴임 당시 지지율이 80%에 육박했던 타르야 할로넨 전 대통령은 최고 지도자답지 않은 소탈한 모습으로 화제가 됐다. 그녀는 2002년 한국을 방문하면서 집에서 쓰던 다리미와 다리미판을 가져와 호텔 객실에서 손수 옷을 다려 입고, 호텔에서 제공한 전문 미용사의 머리 손질도 사양하며 자신이 직접 머리를 다듬었다. 2011년 대통령으로서 주최한 마지막 연회에 이미 여러 번 입었던 옷을 입고 나타나, 정치 인생 마지막까지 여성 지도자가 흔히 구사하는 패션 정치를 지양했다.
박 대통령이 대선 전부터 다방면으로 벤치마킹 했다던 독일 메르켈 총리 역시 집권 이후 고용률을 평균 60%대에서 2011년 기준 72.6%까지 끌어올리며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패션은 꽝’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2011년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위에 선정되고, 지난해 독일 총리로 3선에 성공하면서 대처 전 영국 총리를 넘어 유럽 최장수 여성총리가 될 예정이지만 그녀의 옷차림은 패션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다.
그녀는 같은 디자인의 옷을 색상만 다르게 해서 계속 입는 걸로 유명한데, 가디언은 메르켈의 의상을 채도별로 나열하며 ‘비극의 광경(The Spectacle of Tragedy)’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자기 체형과 외모에 적합한 몇 개 디자인을 고수하며 색상에만 변화를 주는 메르켈의 무신경함은 단골 디자이너의 맞춤복만 착용하는 박대통령과 비교된다. 유럽 최고 음악제로 알려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방문하면서 2008년, 2010년, 2011년 세 번 모두 똑같은 옷을 입었던 메르켈의 패션을 과연 ‘비극’이라 할 수 있을까?
민중봉기를 부른 독재자 마르코스의 부인 이멜다는 남편과 하와이로 도망간 뒤 말라카냥 궁에서 3천켤레의 구두가 발견돼 빈축을 샀다. 이멜다를 다룬 영화에도 3천켤레 구두가 등장했는데 그것은 인간 욕망의 바닥을 보여준 진짜 ‘비극’이었다. 민주주의나 복지의 확대에는 관심이 없는 박근혜 대통령의 패션 정치는 무엇으로 귀결될까?
– 단비뉴스 박병일, 진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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