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완벽한 행복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상처받는 것도, 상처를 주는 것도, 훼손되는 것도, 엉망이 되는 것도 너무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삶은 늘 어느 정도 부서져 있는 것이고, 처치 곤란한 것이며,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다. 나의 통제에 모든 것이 들어올 수는 없고, 완벽하게 유지될 수도, 아름답게 균형 잡히기만 할 수도 없다. 늘 어설픈 면이 있고, 실수가 있고, 상처가 있고, 연습 같은 데가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런 부스러기 같은 삶, 완벽할 도리가 없는 삶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가 삶을 살아내는 기술을 이룬다.
영화 <체실 비치에서>는 완벽한 사랑을 지키려다, 사랑을 통째로 잃은 남여에 대한 이야기다.
너무 사랑하면,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우리는 결혼 첫날, 처음으로 싸우는군요.
여자가 실망하듯 말하자, 남자는 이런 건 싸움이 아니라며 거부한다. 그런데 원래 삶에 싸움이 없을 수는 없는 법이다. 상처가 없을 수도 없고, 실수가 없을 수도 없다.
삶은 완벽한 관현악 연주일 수 없다. 단 한 점의 실수도 없는 완벽한 음악이 담긴 앨범일 수는 없다. 시행착오를 겪고, 상처받아 울고, 역겨움과 분노에도 휩싸이고, 그러다 서로를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함께 다시 한 걸음을 내딛고,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실수나 실패, 상처나 훼손을 두려워할수록 삶은 완성을 향해가는 게 아니라 뒷걸음질친다. 그 속에서는 나아갈 방법이 없다.
완벽하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다. 완전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불완전함 속에서도, 그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기에 한줌의 행복이 허락되는 것이다. 행복에 대한 관념, 사랑에 대한 기준 같은 것들에 얽매이다 보면 그 한 줌의 행복조차 허락되지 않고, 손 안을 떠나버린다.
어쩌면 완벽에 집착하는 것은 당신에 대한 사랑, 혹은 내 삶에 대한 사랑과는 별로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저 스스로를 견디게 하는 하나의 강박증일 따름일 뿐, 당신과 나를 묶어주지도, 나를 삶 속에 안착하게 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저 부서진 대로 받아들이기, 그럼에도 마주 잡은 손을 놓지 않기, 그리고 이 땅에 두 발을 디디고 있기 ─ 그래서 관념으로 도피하지 않기, 완벽한 관념 혹은 완전한 균형으로 도망가지 않기. 그것이 삶을 사는 방법이라는 생각을 한다.
망가진 것 같아 짜증스러울 때, 모든 게 엉망이 된 것 같아 절망스러울 때, 이대로 다 끝장을 내야만 할 것 같을 때, 다시 처음부터 완벽하게 시작하고 싶을 때, 다시 한다면 완전할 수 있을 것만 같을 때, 그렇게 불가능한 관념에 사로잡힐 때, 그것이 사실은 얼마나 허망한 관념인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결국에는 부서질 수밖에 없고, 무너질 수밖에 없고, 훼손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그 무너짐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것이다. 그 무너짐 속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그리고 당신을 붙잡고서는, 다시 살아 마땅한 삶을 그저 살아가는가, 하는 일이다.
원문: 정지우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