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가 현 정부의 모습을 일컬어 “평화를 구걸하다 망한 송나라가 떠오른다”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과연 이 말대로다.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 송은 요와 금에 시달리다 급기야 몽골에 멸망당한 문약의 상징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유라시아 대륙을 정복한 몽골이 정복하는 데 가장 오래 걸린 지역이 바로 그 문약의 상징인 송, 그것도 금에 밀려 장강 이남으로 피난 간 남송이었다. 이 괴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먼저 첫째 오해부터 해결하자. 연운 16주는 송이 요에게 빼앗긴 지역이 아니다. 연운 16주는 5대 10국 시대 후당의 절도사로 후진을 건국한 석경당이 후당 황제 이종가의 원정에 대항하기 위해 거란의 황제를 어버이로 칭하고 북방 16주를 할양할 것을 약조하며 넘어간 것이다. 즉 연운 16주는 송보다 훨씬 이전인 후진의 과오다(후량-후당-후진-후한-후주-송). 해 연운 16주를 근거로 송이 문약하다 비판하는 것은 무리다.
둘째, 송이 문관을 우대하고 무관을 가벼이 여김은 송이 문약해서가 아니라 당 말기부터 5대 10국 동안 이어지는 절도사 난립으로 인한 역사적 경로 의존성의 결과다. 당에서는 변경 지역의 여러 진을 묶어 ‘번진’을 만들고 이 번진의 군권과 행정권을 모두 관할하는 절도사 직책이 있었다. 이러한 절도사는 해당 지역의 군주나 마찬가지였기에 언제나 중앙정부에 부담이 되었고, 결국 당은 이 절도사의 반란으로 멸망한다(주전충의 난).
이러한 중앙정부의 부담에도 왜 절도사를 유지했는지는 이 글에서 다룰 문제와 거리가 있으니 차치하자. 이 절도사는 5대 10국 시대에도 이어져 전 왕조를 멸망시키고 새 왕조를 건국한 인물들은 모두 전 왕조의 절도사였다. 해 송을 건국한 태조 조광윤은 절도사의 강대한 권력을 약화할 필요성을 느껴 자신의 건국 공신들이 스스로 병권을 내놓도록 하는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 술자리에서 병권을 내어놓게 함)을 행한다.
이후 지방군을 약화시키고 모든 군권을 중앙의 금군으로 집중시키는데 이 금군은 우리가 수호지에서 보는 것처럼 작게는 80만, 많게는 150만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금군의 최고 지휘관이 언제나 문관이었고, 외적의 침입을 제일선에서 막는 지방군을 약체화한 탓에 언제나 대응이 한발 늦었다는 데 있다. 그렇지만 그게 송의 잘못은 아니다. 단지 제도의 경로 의존성에 불과할 뿐.
셋째, 현재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군사력은 절대적으로 경제력에 의존했다. 송은 요와 1004년에 전연의 맹을 맺으면서 세폐로 비단 20만 필과 은 10만 냥을 매년 보내기로 하였다. 사서에 따르면 송 진종은 세폐로 100만을 생각했고, 300만까지는 약간 무리가 따르더라도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지만 재상인 구준이 강하게 밀어붙여 30만으로 합의를 봤다고 한다.
이 300만이라는, 황제가 버틸만하다고 생각한 세폐 추정치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송의 경제력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당시 송에는 조악한 형태나마 현재와 유사한 형태의 병력 수송용 장갑차와 전차가 있었다. 다시 말해 전연의 맹은 문약한 송이 무턱대고 진 것이 아니라 장기간 전쟁을 지속할 경우 아직 건국 초기인데 민생이 피폐해질 것을 우려해 평화를 돈을 주고 산 것이라고 봄이 옳다.
민생을 피폐하게 만들면서 전쟁을 하는 것과 돈을 주고 평화를 사서 민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 중 어느 게 더 나은지는 명약관화하다. 이후 송의 수도인 개봉은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 세계적인 대도시로 번영을 누린다. ‘불야성’이라는 말도 이 당시 개봉을 일컫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이상과 같은 실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송은 강한 경제력과 우수한 기술을 바탕으로 북방 유목민의 침입에 대항해 300년 넘게 대항하며 지속된 국가다. 중국 역사를 보면 알겠지만 수천 년 역사에서 300년을 넘은 통일 국가는 한과 송 둘에 불과하다. 그 강대한 세계제국 당이나 전 세계의 은을 모조리 빨아들인 명,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장 강한 권력을 갖고 통치한 청조차도 300년을 버티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몽골 제국의 대칸이 전쟁터에서 죽는 최초의 사례가 사천 합주 조어성(현재의 중경) 공방전에서 일어난다. 사천의 다른 지역이 몽골의 군세에 놀라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던 것과 달리 남송의 명장이자 맹공의 부장이었던 왕견은 주민 10만과 결사 항전을 주장해 저항했고 몽케 칸은 5개월 동안 공성전을 펼치다가 철통같은 방어를 뚫지 못하고 진영에 유행하는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
여담으로 몽케 칸의 이 죽음은 세계사를 뒤바꾸었다. 몽골 제국의 대칸이 사망하면서 몽골은 새로운 대칸을 선출하기 위한 쿠릴타이를 열 필요가 있었고, 당시 바그다드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서진을 계속하던 서방 사령관 홀라구는 쿠릴타이 참석을 위해 회군했다. 다만 일부 병력을 부장에게 맡겨두었는데 아인 살루트에서 맘루크 왕조의 술탄 바이바르스가 이 병력을 격파하고 훌라구가 남긴 부장을 처형해버리면서 끝도 없을 것처럼 계속되던 몽골군의 서진은 이 시점에서 마침내 종료된다.
이후에도 송은 끈질기게 저항하지만, 1279년 애산 전투에서 황제를 비롯한 모든 대소신료와 병력이 전멸하면서 멸망한다. 이런 나라를 문약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홍준표는 잘못된 예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역사에 대한 자신의 무지도 스스로 증명했다. 어떠한 사실에 대해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면 차라리 침묵하는 게 낫다.
덧
물론 1126년 일어난 정강의 변(금의 침입으로 송 황제 휘종과 흠종이 포로로 잡혀가고 수도인 개봉이 함락된 사건)은 분명 부인할 수 없는 송의 실패다. 그런데 이를 송이 문약하다는 증거로 삼을 수는 없다. 오히려 이러한 정강의 변에도 송은 장강 이남으로 조정을 옮기고 악비와 한세충이 끈질기게 반격하는 등 금을 시종일관 몰아붙였기 때문이다.
결국 송의 저항과 강북을 점령한 여진족의 분탕질로 인해 사세가 어려워지자 송과 금은 조약을 맺고 회수를 경계로 삼아 분할한다. 이게 과연 문약인지는 한 번 생각해볼 일이다.
원문: 정재웅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