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오브레인에서 개발한 바둑 인공지능 오지고(Og-Go)가 “18급도 아는 축을 몰라서” 신진서 9단에게 패했다고 조롱받고 있다. 일본의 ‘딥젠고’나 중국의 ‘절예’는 프로기사를 능가했는데, 오지고의 “어이없는 오류”를 보니 카카오브레인이나 우리나라의 인공지능 기술 수준이 어쩌고저쩌고하면서…
2016년 3월 13일, 나는 서울시 종로구 포시즌스 호텔에 마련된 TV 실황 중계석에 앉아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바로 윗 층에서는 이세돌 9단이 알파고를 힘겹게 상대하고 있었다. 전날까지 3연패를 당한 상황이었다.
1국에서는 이세돌 9단이 알파고의 수준을 테스트해보기 위해서 극 초반에 괴초식을 펼쳤는데 알파고가 정확한 파훼법으로 응수하자 일찌감치 비세에 몰렸다. 그런데 이후 알파고가 뻔한 자리에서도 승부가 뒤집힐 정도는 아니지만 계속 조금씩 손해를 본 것이 독으로 작용했다.
2국에서 이세돌 9단은 무난하게 두면서 알파고의 실수만 받아먹어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과연 이세돌 9단은 딱히 눈에 띄는 실수를 하지 않은 반면, 알파고는 종종 이상해 보이는 수를 뒀다. 방송 해설을 하던 프로 기사들은 종반까지도 이세돌 9단이 유리하다고 봤다. 그런데 막상 집을 세어보니 어느덧 알파고가 큰 차이로 이겨 있었다. 1국을 패했을 때보다 충격이 훨씬 컸다. 현대 바둑 이론으로도 계산이 어려운 나머지 직관에 의존하던 영역이 사실은 정밀한 계산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3국에서는 집 계산 대결로 가면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세돌 9단이 초반부터 서둘렀다. 무리한 싸움을 걸어갔으나 정확히 반격당하고 나니 그것으로 승부가 결정됐다.
드디어 4국, ‘집 바둑’으로는 안 되고 대마 싸움도 안 되니 이제 남은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먼저 실리를 잔뜩 챙겨 둔 다음에 상대의 진영에 깊숙이 침투해서 타개하는 것으로 승부하는 이른바 ‘조치훈 류’. 이세돌 9단은 단 세 판 만에 알파고의 약점을 간파해내고 정확히 찔러 들어갔다. 알파고의 학습 데이터에 들어있지 않을, 즉 실전에 결코 등장한 적이 없었을 것 같은 낯선 장면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78수가 떨어졌다. 이 수가 놓인 다음이라도 알파고가 제대로 응수했다면 여전히 어려운 바둑이었지만, 알파고는 ‘떡수’를 연발했다. 단 한 번의 기회를 살려냈다는 점에서 과연 ‘신의 한 수’라 불릴만했다.
마지막 5국에서 이세돌 9단은 한 번 찾아낸 파훼법을 굳이 다시 사용하지 않고 그저 최선의 바둑을 뒀을 때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중반까지 유리한 국면을 만들었지만 인간이기에 한순간 마음이 약해지면서 역전당했다. 그럼에도 일체의 변명을 하지 않고 오롯이 자신의 능력 부족으로 돌리는 챔피언의 품격을 보여줬다.
알파고가 나타나기 전까지 바둑 인공지능 중 최고로 꼽히던 것은 일본의 ‘젠’이었다. 젠은 인공지능 간의 바둑 대회인 UEC배에서 우승한 직후인 2016년 3월 23일, 왕년의 일본 일인자였던 고바야시 고이치 9단에게 석 점 접바둑으로 도전해 승리했다. 2012년 3월 다케미야 마사키 9단에게 넉점 접바둑으로 승리한 지 만 4년 만에 치수를 한 점 줄인 쾌거였지만, 알파고에 묻혀 큰 관심은 받지 못했다.
젠의 개발자 가토 히데키 씨는 더 이상 바둑 인공지능을 개인적으로 개발하는 데 한계를 느끼고, 소프트웨어 기업인 드왕고의 후원으로 신경망 개발을 담당할 동경대 연구팀을 합류시켜 ‘딥젠고 프로젝트’를 출범시킨다.
신경망이 장착되자 딥젠고의 기력은 일취월장한다. 2016년 7월 여류 프로기사 최강자 중 한 명인 조혜연 9단한테 두 점 접바둑으로 이기고, 11월에는 여전히 일본 정상권에서 활약하는 조치훈 9단한테 호선(동등한 조건)으로 세 판 중 한 판을 이긴다.
2017년 3월에는 한/중/일의 일인자들을 초청해 ‘월드 고 챔피언십(World Go Championship)’ 대회를 열었는데, 중국의 미위팅 9단과 한국의 박정환 9단은 종반까지 비세에 몰렸다가 끝내기 단계에서 딥젠고의 버그 덕분에 가까스로 승리를 거뒀으나 일본의 이야마 유타 9단은 끝내 딥젠고에게 패할 정도였다. 프로젝트가 출범한 지 1년 만에 아마 강자 수준에서 세계 최정상급 프로기사를 능가하는 실력이 된 것이다!
한편 중국은 알파고의 출현을 국가적인 자존심에 금이 간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우리가 바둑 종주국인데 영국 회사가 설치고 다니다니.
중국 정부는 소프트웨어 회사들에게 10억 원 정도씩 시드 머니를 주고 바둑 인공지능 연구를 시작하도록 독려한다. 그리고 그중 두각을 나타냈던 텐센트에 수백억 원의 연구비를 몰아줬고, 텐센트는 내부 경쟁(특징이 서로 다른 바둑 인공지능을 동시에 여러 개 개발)까지 시켜가며 바둑 인공지능 연구에 올인했다.
이렇게 개발된 ‘절예’는 앞에서 언급한 월드 고 챔피언십 전초전 격으로 벌어진 UEC배에서 ‘딥젠고’를 압도적으로 이겨버려서 일본의 계획(UEC배에서 우승한 뒤 인공지능 대표 자격으로 한/중/일 일인자들을 상대하면 그림이 좋지 아니한가?)에 찬물을 끼얹게 된다.
우리나라에도 젠 못지않은 ‘돌바람’이라는 바둑 인공지능이 있었다. 임재범 대표가 사재를 털어가며 어렵게 연구했음에도 젠을 종종 이길 정도였다. 딥젠고 프로젝트처럼 우리도 임 대표를 조금만 지원해주면 잘 될 것 같았다.
우선 정부 지원을 요청하려고 미래창조과학부 소프트웨어 국장을 찾아갔다. 일개 교수가 요청해봐야 씨알도 안 먹힐 테니 이세돌 9단을 모시고 갔다. 당시 기사회장이었던 양건 9단이 이 미팅을 주선했다. 이세돌 9단의 기사회 탈퇴 파문으로 두 사람 사이가 껄끄러웠을 텐데, 양건 9단의 부탁에 이세돌 9단이 흔쾌히 응했다! 이런 만남이 보도돼 파문이 잘 수습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중앙일보의 바둑 전문 기자인 정아람 기자도 초대했다.
돌바람을 도울 방법을 모색해봤으나 쉽진 않았다. 중국 정부가 특정 기업에 수백억씩 현금 지원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하면 특혜가 된다. 또 신규 사업을 추진하려면 예비 타당성 조사부터 거쳐 예산을 잡아놔야 했는데 이때는 이미 굵직굵직한 건은 예산 집행이 끝난 단계였다.
그래도 머리를 짜낸 결과가 중소기업 지원 바우처 사업의 잔여 예산을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기업에 현금을 직접 지원하는 대신 연구 용역을 담당할 대학에 연구비를 주고 그 결과를 기업에 기술 이전하는 형태였다. 이미 알파고가 나와서 임팩트 있는 논문을 쓸 수 있는 연구는 아닌 반면 많은 관심이 쏠릴 과제라 난색을 표하는 교수들이 많았다. 다행히 ‘연구 중심 대학’의 교수 한 명을 설득했다. 뒷말이 안 나오게끔 나와는 일면식도 없던 사이였다.
그런데 과제 제안서 준비를 시작할 때 임 대표가 망설였다. 바우처 사업의 예산 2억 원으로는 제대로 된 연구가 어렵다고 봤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 번 지원을 받으면 또 받기가 까다로운데, 차라리 올해 예타부터 준비해서 내년에 2억이 아니라 20억쯤 받아 제대로 연구하는 게 낫지 않냐고 했다. 일리 있는 얘기였다.
그리하여 2017년을 기약하고 물러났지만, 이내 ‘최순실 게이트’가 터져 미래창조과학부도 올 스톱되고 만다. 정부 지원의 길이 막히자 그다음으로는 대기업들을 찾아다녔다. 영양가 없는 양해각서 체결하고 사진만 많이 찍었을 뿐 “바둑 인공지능 해서 돈이 되나요?” 하는 생각에서 늘 막혔다.
한동안 실망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다가 2017년 들어서 딥러닝의 고수들을 수소문해 다녔다. 한국기원에서 양질의 데이터는 충분히 받아낼 수 있으니, 그걸로 바둑 인공지능 연구를 하는데 관심 있는 연구자들을 규합할 생각이었다. 그러던 차에 카카오브레인의 인공지능 연구 부문 총괄인 김남주 씨를 만나게 됐다. 한현이 황충을 얻은 기분이었다!
구글 딥마인드나 텐센트와 경쟁하려면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 연구자들을 규합해야 했다. 즉 오픈 리서치만이 유일한 답이었다. 누구나 본 연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개발 과정에서 제안된 아이디어는 제안자가 발표할 권리를 갖도록 한다.
카카오브레인은 이러한 협업을 가능케 할 플랫폼을 구현하고 컴퓨팅 파워를 제공한다. 한국기원은 골드 스탠다드 데이터 세트(gold standard dataset)을 제공함으로써, 그동안의 들러리 신세에서 일약 바둑 인공지능 연구의 이니셔티브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렇게 해서 카카오브레인과 한국기원의 바둑 오픈 리서치가 시작됐다. 여기에 세금은 한 푼도 안 들어갔다.
한편, 돌바람은 고군분투해 올해 초 딥젠고와 맞먹는 경지에 올랐다. 임 대표와 카카오브레인의 협력을 추진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나 양측의 생각이 많이 달랐다.
카카오브레인에서 개발하는 바둑 인공지능의 이름은 처음엔 ‘빵빵이’였다. 이름을 못 정해서 OO라고 놔둔 것을 부르다 보니 그렇게 됐다. 빵빵이는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한 지 세 달 만인 2017년 9월에 프로기사와 정선 정도의 치수에 들어왔다. 한 달 정도 후에는 프로기사와 호선에 승부가 될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2017년 10월, 알파고 제로가 등장했다. 강화 학습만으로도 지도 학습한 것을 뛰어넘었다. 기보 데이터에 의존하지 않고 사람의 가이드 없이 기존 버전을 뛰어넘었다. 이론적으로 가능할 수도 있던 것을 실제로 성공시켰다는 것이 놀라웠다.
빵빵이의 기력을 올리는 것은 이제 의미가 없어졌다. 제로 베이스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또 바둑 인공지능 엔진들이 하나둘씩 공개되면서 우리 프로젝트 자체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했다.
2018년 들어서도 카카오브레인의 바둑 인공지능 연구는 계속됐다. 인공지능이 프로기사를 이기는 게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가 됐으므로, 기력을 올리는 것에 신경 쓰기보다는 인공지능 연구 측면에서 의미가 있는 작업들을 해보기로 했다(자세한 것은 추후에 밝힐 기회가 있을 것이다).
‘오지고’라는 이름은 카카오브레인의 모 연구원이 발음하기 쉽고, ‘거꾸로 읽어도 제대로 읽는 것과 같은 낱말(palindrome)’인 데다가, ‘급식체’로 쉽게 각인된다고 지었다. 네이버 국어사전에 따르면 ‘오지다’는 ‘오달지다’의 동의어로서 1) 마음에 흡족하게 흐뭇하다, 2) 허술한 데가 없이 야무지고 알차다는 뜻의 표준어라고 한다. 격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으나 어쨌든 많이 회자되는 걸 보니 흥행에는 성공한 것 같다?
아무튼 오지고의 기력은 이미 프로기사를 뛰어넘은 수준이다. 올 3월 원성진 9단과의 대결에서 1승 1패를 거둬 화제가 된 고등과학원의 ‘바둑이’와 8월에 대결해 오지고가 승리한 바 있다. 프로기사와의 대결 중 일반에 공개된 것으로는 지난 10월 5일, 한국 슈퍼컴퓨팅 콘퍼런스 이벤트로 펼쳐진 신민준 9단(국내 랭킹 6위)과의 대국에서 오지고가 승리했다. 다음은 11월 5일 펼쳐졌던 신진서 9단(흑)과 오지고(백)의 기보다.
신진서 9단은 국후에 흑 39를 패착이 될뻔한 수로 꼽았다. 이 수는 D9 정도에 둬야 했다고 후회했는데 오지고는 D8을 추천했다. 백이 44, 46으로 귀를 넘어가서는 흑이 일찌감치 집 부족인 바둑이 됐다는 감상을 남겼다. 백 62로 끊는 수가 된다고 보고 52로 젖힌 것인데, 사실 이 축은 한 번 더 밀고 나가야 해서 인공지능이 보기 어려운 축이다. 또, 백 D11과 흑 C11을 미리 교환해뒀더라면 백 62로 끊는 수까지 돼서 흑이 곤란했다고 한다.
오지고의 ‘축 버그’는 알파고 제로 이후의 바둑 인공지능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알파고 제로 이후에 개발되는 바둑 인공지능들은 신경망의 입력으로 핸드크래프티드 피처(handcrafted feature)를 쓰지 않는다. 알파고 판 후위 버전의 경우에는 축을 포함해 약 50개의 피처를 따로 입력받았으나, 알파고 제로는 바둑판 자체(현재 바둑판의 상태와 7수 전까지의 상태)만을 입력받았다. 사람 같으면 바둑에 입문하자마자 배우는 축을 정작 알파고 제로는 학습이 상당히 진행된 다음에야 발견했다.
프로기사를 능가하는 기력에 저런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나온다는 것을 일반인이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이번 사건으로 카카오브레인과 한국기원의 바둑 인공지능 개발 노력 자체가 조롱받는 것은 안타깝다. 그러나 어쩌랴. 절치부심해서 실력을 더 쌓는 수밖에!
원문: 감동근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