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Guardian의 「The age of envy: how to be happy when everyone else’s life looks perfect」를 번역한 글입니다.
5년 전 어느 날 잠자리에 들기 전, 나는 자신이 어떤 언론상의 후보에 올라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는 내용의 한 친구의 트윗을 보았습니다. 나는 배가 아프기 시작했고, 머리가 핑 돌았으며, 이를 꽉 물었고,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그날 밤 나는 한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그보다 5년 더 전 내가 아직 대학생일 때도 나는 페이스북을 넘기다가 그저 얼굴만 아는 어떤 친구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어느 클럽에서 친구들과 술에 취한 채 정신없이 웃던 그녀의 사진을 본 나는 우울해졌고, 의자 뒤로 털썩 몸을 던졌습니다. 괴로움에 나는 거의 숨을 쉬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나는 다른 수많은 일 가운데서도 내가 왜 이 두 기억에 그렇게 매였는지를 종종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아마 내 32년의 삶 동안 내가 가장 강력한 부러움을 느꼈던 일들이기 때문일 겁니다. 나는 그 언론상을 신청하지도 않았고, 클럽에서 노는 것을 즐긴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 트윗을 읽었을 때, 그리고 그 사진을 보았을 때 나는 그들이 가진 것이 너무나 부러웠고 그래서 마치 배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숨을 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부러움의 시대를 삽니다. 남의 경력에 대한 부러움, 부엌에 대한 부러움, 아이들에 대한 부러움, 음식에 대한 부러움, 이두박근에 대한 부러움, 휴가에 대한 부러움 등, 거의 모든 단어에는 부러움을 가져다 붙일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기원전 4세기에 타인의 행운은 고통이라고 말한 것처럼 인간은 자신이 가져야 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들을 다른 사람이 가졌을 때 부러움을 느껴왔으며, 그로부터 약 1,000년이 흐른 후 교황 그레고리는 마침내 이를 일곱 가지 죄악에 포함시켰습니다.
하지만 페이스북이 사람들의 행복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온 미시간 대학의 심리학자 에단 크로스는 오늘날 소셜미디어의 발달이 “인간의 부러움을 극단적으로 키웠다”고 말합니다. 그는 오늘날 우리가 일상적으로 ‘꾸며진 삶’의 융단폭격을 받으며 “이는 우리 종이 역사적으로 경험해보지 못한 종류의, 전혀 긍정적이지 않은 비용을 우리에게 물린다”고 말합니다.
임상심리학자인 레이철 앤드류는 상담을 원하는 사람 중에 “자신이 이루지 못한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이들을 보게 됨으로 인해” 질투를 느끼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난다고 말합니다. 특히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스냅챗 등이 이런 심리적 불안감을 증폭합니다.
소셜미디어는 마침내 누구나 자신을 남과 비교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웃을 부러워하는 정도였지만 이제 우리는 전 세계 모든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인지행동치료를 이끄는 이들 중 한 명인 윈디 드라이덴은 이를 비교병(comparisonitis)이라 부릅니다. 앤드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비현실적인 비교에 빠져든다고 말합니다.
모든 이는 남들이 올리는 사진이 어느 정도는 보정된, 그들의 가장 괜찮을 때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우리는 이 부러움증폭기를 주머니에 지니고 다니며, 침대 옆에 둘 뿐 아니라, 하루 24시간 아침에 깨어날 때부터 한밤중까지 계속 자신을 유혹하도록 만듭니다. 앤드류는 그녀의 환자들이 자신들도 조작된 현실을 본다는 것을 알며, #무보정이 사실상 무의미한 태그라는 사실을 알지만 그럼에도 부러움이 가진 강력한 힘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셜미디어에서 보는 것을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그 사진이나 이야기가 전적으로 사실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도, 여전히 감정적으로 버튼이 눌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사진이나 이야기가 자신이 바라던 것이나 가지지 못한 것일 경우 이는 매우 강력한 힘을 가집니다.
부러움이 우리의 소셜미디어 사용에 미치는 영향을 알기 위해 크로스와 그의 팀은 그들이 ‘관음증적 구경’이라 이름 붙인 수동적인 페이스북 사용이 기분을 어떻게 바꾸는지 알아볼 연구를 고안했습니다. 연구에 참여한 사람들은 2주 동안 하루 다섯 번의 문자를 받았고, 문자를 받은 때부터 수동적인 페이스북 사용을 시작해 자신의 기분이 어떻게 변하는지 보았습니다. 그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페이스북을 더 많이 할수록, 부러움의 세기는 더 커졌고 기분 또한 나빠졌습니다.
앤드류는 어떤 연령대나 사회적 집단도 이 소셜미디어 사용을 통한 부러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상담실을 찾는 젊은 여성들은 자신의 외모를 꾸미고자 인스타그램에서 머리 모양이나 화장법을 찾지만, 결국 자신이 팔로우하는 유명인에 대한 부러움과 자괴감을 더 가집니다. 나이든 사업가나 여성 역시 트위터에서 사업 전략이나 생활의 팁을 찾지만, 결국은 자신보다 더 성공한 이들을 보며 비슷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부러움은 친구나 가족의 외모나 생활양식, 경력이나 양육법 등 모든 영역에서 발생할 수 있습니다. 소셜미디어에서는 누군가는 나보다 그 일을 잘하기 때문이죠.
셰익스피어의 오델로에 등장하는 이아고는 카씨오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의 일상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그 앞에서 추해진다.” 그가 만약 오늘날 카씨오를 인스타그램에서 팔로우했다면 얼마나 자신을 비참하게 느꼈을까요?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운 일이지만, 저명한 사회심리학자인 셰리 터클은 “더 큰 문제가 뒤따른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만들어놓은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삶을 잃게 될까 두려워하게 됩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보이던 수준의 삶을 실제로는 살지 못할 때, 마치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처럼 느끼고 그 삶을 부러워하게 됩니다.
이는 ‘자기 선망(self-envy)’라는 이질적인 감정을 마음속에 만든다고 그녀는 말합니다.
자신의 아바타에 대한 기이한 부러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우리는 아침 출근길의 녹초가 된 모습 대신 보정된 #오늘뭐입지 사진의 자신을 보며 그런 모습을 가지고 싶어 합니다. 인스타에 #푸드가즘 태그를 붙이기 위해 버처 뮤즐리를 먹을 수 있는 꽃잎으로 장식하지만 한 입만 먹고 바로 뱉어버리지요. 호수에서 오리배를 탈 때도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다 찍고 나면 할 일이 끝난 듯 느낍니다.
완벽한 카메라 각도를 찾는 동안 우리의 삶은 겉은 반짝이지만 속은 텅 빈 껍질처럼, 그저 남과 자신의 부러움만을 부추기게 됩니다. 동물 보호소에는 “셀카에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입양되지 못한 검은 고양이가 넘쳐납니다.
부러움에 대해 더 음침한 정의도 있습니다. 정신분석 치료사이자 『일상에서의 부러움(Envy in Everyday Life)』의 저자인 패트리샤 폴레드리는 부러움은 한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고 심지어 범죄로까지 이어지게 하는 매우 위험한 감정이라고 말합니다.
부러움은 다른 사람이 가진 무언가를 파괴하고 싶은 욕구입니다. 내가 그것을 가지길 원하는 마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걸 가지지 못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는 마음속 매우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것으로, 다른 누군가의 행복을, 그것이 그의 외모나 지위, 아니면 그가 가진 자동차 등 무엇이든, 극도로 싫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음침하고, 파괴적이며, 은밀한, 순수한 악이자 순수한 증오입니다.
이는 부러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도움을 청하기 매우 어렵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상대의 것을 자기도 가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느껴지는 반면, 상대의 것을 파괴하고자 하는 욕망은 너무나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폴레드리는 부러움은 타고나는 감정이라기보다는 어린 시절의 모성애 결핍 등에 의해 자존감이 부족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생기는 감정이라 생각합니다.
인지행동 치료사인 드라이든은 부러움의 원인보다는 어떻게 부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지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그는 자존감이 낮은 사람과 결핍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하는 것을 참지 못하며, 이 때문에 소셜미디어를 통해 부러움을 더 쉽게 느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런 상황에서 아이에게 어떤 충고를 하는지를 생각해보라고 말합니다. 곧 우리는 아이들에게 ‘세상에는 네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 있으며, 그럼에도 네가 살아가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을 가지지 못했다고 해서 너는 남보다 못한 사람이 되는 것이 전혀 아니’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소셜미디어 습관 또한 바꿔볼 수 있습니다. 크로스는 사람들은 대부분 페이스북을 능동적이 아닌 수동적으로, 곧 글을 올리고 메시지를 보내고 답글을 다는 대신 그저 남들이 올린 글을 읽기만 한다고 말합니다.
능동적 사용보다 수동적 사용이 더 해로운 것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은 흥미롭습니다. 수동적 사용과 부정적 감정 사이의 관계는 매우 명확합니다. 이는 수만 명에 대한 조사 결과에서 나타난 결론입니다.
그렇다고 페이스북을 능동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기분을 더 좋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둘 사이에는 약한 상관관계만이 있을 뿐입니다. 아마 우리 각자가 소셜미디어를 사용할 때 내가 어떤 내용을 왜 말하려 하는지 더 조심스럽게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내가 만들어내는 온라인상의 내 모습이 이 부러움의 시대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얼마 전 페이스북에 내 승진 소식을 올리려 했을 때, 남편은 내게 무엇 때문에 그 일을 알리려 하는지 물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명확하게 이유를 말하지 못했고, 이는 사실은 그 행동이 내 허영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좋아요와 축하 메시지를 받고 싶었고,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직장에서 잘 나간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랐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는 부끄러워졌습니다. 한 사람을 정신 차리게 만드는 데는 예민한 배우자만 한 이가 없지요.
트위터에서 승진을 알리는 것은 동료들에게 소식을 빨리 전하기 위한 것으로 업무에도 필요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소식입니다만,”이라는 말을 쓸 때마다 우리는 왜 내가 이 글을 쓰는지 한 번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친구나 가족, 동료들은 어쨌든 이 소식을 알게 될 겁니다.
그리고 정말 그게 개인적인 소식이라면 굳이 많은 사람에게 알릴 필요가 있을까요? 소셜미디어에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것은 자신의 경력에 유리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바로 모든 사람이 자신을 과대 포장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며, 바로 그런 분위기에서 모두가 모두를 부러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나는 우리가 항상 자신의 삶을 더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그저 입을 닫는 것이 답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사회적으로 부당한 일을 널리 알리는 것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일조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자아 성찰이나 자신의 슬픔을 알리는 글, 무보정 셀카는 결국 자신을 포장하기 위한 것입니다.
폴레드리의 부러움에 대한 음침한 정의에서 부러움에는 어떠한 긍정적인 측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도가 과하지 않다면, 부러움은 자신에게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드라이든은 “창조적 원동력”이 될 수 있는 긍정적인 부러움과 부정적인 부러움을 구분합니다. 크로스는 배고픔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먹어야 한다고 말해주는 것처럼, 부러움은 자기 자신이 무엇을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지를 알려준다고 설명합니다. 앤드류 또한 말했죠.
중요한 것은 그 감정이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가 아니라 이것이 내게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부러움을 느끼는 대상이 성취 가능한 것이라면, 적절한 단계를 밟아 이를 이루면 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스스로에게, 내가 어느 선에서 만족할 것인지를 물어야겠지요.
내가 지금도 잊지 못하는 그 두 번의 고통스런 부러움의 기억은, 바로 그 시기 내가 불안정하고 불행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프리랜서 작가로 내 이름을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었고, 그전에는 처음 집을 떠나 대학으로 진학해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 위해 노력하던 때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내 사정도 점차 나아졌지만, 여전히 나는 소셜미디어에서, 그리고 일상에서 부러움이라는 불쾌한 감정을 느끼며, 친구나 가족들 또한 그런 감정으로 힘들어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마 우리는 “어느 선에서 만족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고, 나도 아직 이 질문을 두고 고민합니다.
원문: 뉴스페퍼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