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일지에서 김구는 이봉창 의거에 대한 기술에서, “1년 전부터 우리 임시정부에서는 하도 운동계가 침체되어 있으니 군사 공작을 못한다면 테러 공작이라도 하는 것이 절대 필요하게 되었다.“라고 기술했다.
또한 ‘백범일지 하권을 쓰고서’라는 맺음말에서도 아래와 같이 테러라는 용어를 사용한 바 있다.
“그리하여 침체된 국면을 벗어날 목적으로 미주, 하와이 동포들에게 편지하여 금전의 후원을 빌며, 한편으로는 철혈남아들을 물색하여 테러(암살, 파괴) 운동을 계획하던 때에 상권 기술을 마친 것이다. 그리고 곧 동경 사건과 홍구폭탄사건 등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독립운동가이자 본인이 스스로 일본 요인을 암살하려 시도했던 이강훈 또한 스스로 그러한 암살 행위를 ‘테러’라 규정하였다. 이강훈은 암살 시도로 인하여 옥고를 치루었으며, 해방 후 민단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3인의 유골을 국내로 모셔와 안장하였으며, 광복회 고문과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이강훈은 1986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죽음을 걸고 하는 테러는 단 한 번 하는 거지요. 나는 비록 실패하고 징역만 살았지만, 테러란 사실 나쁜 것입니다. 그러나 독립운동에 있어서 그것은 최고의 휴매니티였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를 죽이는 데는 그 길 밖에 없었으니까요.”
해당 행위에 참여하였던 당사자로서 이 얼마나 감동적이고 장쾌한 표현인가? 이강훈은 테러 행위에는 물론 방법론적으로 부정적인 면모가 따른다는 것을 명확히 인지하면서도 그것이 또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하나 뿐인 인간의 목숨을 거는 고귀한 행위이기도 하였음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항일 ‘테러’ 활동이란 표현은 이처럼 스스로 그러한 ‘의거’ 행위를 계획하고 실행한 당사자들이 ‘군사 행위’와는 다른 범주의 ‘테러 행위’임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하등의 문제가 없는 표현인 것이다. 그러한 행위가 정당성이 있는, 나아가 고귀한 행위이냐 혹은 명분없는 부당한 것이냐를 판단하는 것에서 입장이 갈릴 뿐인 것이다.
독립운동가 본인들도 거리낌없이 떳떳하게 사용한 용어를 두고 맥락과는 전혀 무관한 소모적 논쟁을 벌이는 것은 김구나 이강훈 본인들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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