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는 전 세계 언어 가운데 어휘를 가장 많이 보유한 언어이다. 영어의 그런 특성에 얽힌 역사적 배경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1. 게르만계 언어로 시작해 라틴어와 스칸디나비아어를 수혈
일단 영어는 ‘게르만계’(German) 언어다. 영어는 독일어와 출생의 비밀(!)을 공유한다. 역사언어학 자료를 보다 보면 고대~중세 독일 지방에서 쓰였던 언어와 당시 영국 땅에서 쓰였던 언어를 비교하는 자료를 계속 마주하게 된다. 그러니까 현대 독일어와 현대 영어는 같은 뿌리(고대 게르만어)에서 갈라져 나온 언어다.
게르만족의 일파인 앵글로족과 색슨족은 머나먼 섬나라(켈트족이 살던 브리튼 섬)를 침략했다. 브리튼 섬은 본래 로마의 지배 덕분에 외부 침략을 막을 수 있었지만, 410년 로마군 철수 이후 게르만족의 침략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한 것이다. 이후 6세기쯤 브리튼 섬은 사실상 앵글로-색슨족의 터전이 됐다. 그들의 언어는 자연스럽게 유럽 대륙의 고대 게르만어와 달라졌다. ’고대 영어’의 시작이다.
한편 브리튼 섬을 정복하고 자신들의 이름(앵글로)에서 유래한 지명 ‘잉글랜드’까지 쓰기 시작했지만, 앵글로-색슨족도 계속 외부 영향을 받았다. 언어도 마찬가지였다. 영어는 크게 세 언어의 영향을 받았다. 브리튼 섬 원주민이었던 켈트족의 ‘켈트어’, 로마 지배 흔적이자 597년 잉글랜드의 기독교 개종 후 광범위하게 확산된 ‘라틴어’, 8세기 후반부터 11세기 중반 지속된 바이킹 침략으로 유입된 ‘스칸디나비아어’다.
특히 라틴어와 스칸디나비아어의 영향이 중요했다. 라틴어는 유럽 문명권이었기에 당연한 결과였고, 스칸디나비아어의 경우 잉글랜드가 덴마크 왕 크누트의 지배를 받기까지 했던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주: 로마 지배 시기와 관련해 잘못 서술됐던 내용을 수정했습니다)
2. 노르만 정복을 통해 프랑스어 수용
한편 가장 중요한 침략은 1066년 일어났다. 그 해 프랑스 지역의 한 공국(그땐 프랑스라는 단일국가의 개념도 모호했고, 프랑스 왕이라는 지위보다 각 공국의 왕이나 지방 영주들의 힘이 더 강했다)이었던 노르망디 공국이 잉글랜드 영토를 점령한 것이다. 이것을 ‘노르만 정복’(Norman Conquest)이라고 부른다. 이후 노르만 공국의 ‘정복자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는 잉글랜드 영토와 노르망디 영토를 동시에 지배했다.
노르만 정복과 함께 잉글랜드 땅에는 프랑스어가 침투했다. 공국이니 뭐니 해도 어쨌든 노르망디는 프랑스어를 쓰는 지역이었으니까. 이 시기를 거치면서 영어는 ‘프랑스어’를 대거 받아들였다.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의 언어가 겪은 일과 유사) 또한 프랑스어를 타고 들어온 라틴어를 다시 한 번 흡수하게 됐다.
3. 하층 언어를 벗어나기 위해 각종 언어를 재수입
영어는 프랑스어의 영향을 크게 받고 ‘천민의 언어’로 구박 받았지만(당시 영국 지배층은 프랑스어를 사용했으며 영어는 하층민의 언어였다), 소멸하지는 않았다. 이는 13세기 초 잉글랜드 왕실이 프랑스 왕실과의 전쟁에서 패배해 노르망디 영토를 잃어버린 것과 130여년 후 일어난 백년전쟁으로 ‘反프랑스 정서’ & ‘영국인이라는 자의식’이 생겨난 것이 큰 원인이었다.
그렇게 겨우 제 정체성을 지켜낸 영어는 14세기 영문학의 아버지 초서와 16세기 셰익스피어의 재능에 힘입어 당당하게 단일 언어로 자리 잡았다. 초서와 셰익스피어가 영어로 문학 작품을 쓰던 당시, 영어는 결코 세련된 언어가 아니었다. 사실 영국 자체가 16세기 이전까지는 ‘변방의 섬나라’ 취급을 받는 삼류 국가였다.
초서와 셰익스피어는 모국어로 문학 활동을 하기 위해 당시 일류 선진국이었던 이탈리아와 프랑스 문화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자세히 이야기하긴 힘들지만, 지금도 초서가 이탈리아와 프랑스 문학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에 관한 논문이 발표되고 있으며, 셰익스피어가 희곡 외에도 재능을 발휘했던 ‘소네트’(sonnet)는 장르 이름 자체가 이탈리아어 ‘소네토’(sonetto)에서 왔다는 점만 밝혀두겠다.
게다가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는 모두 라틴어에 뿌리를 둔 언어였다. 14세기 이후 영어는 프랑스어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긴 했지만, 동시에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를 꾸준히 접했고 그 과정에서 라틴어의 흔적도 계속 받아들였다. 또한 비슷한 시기 세워지기 시작한 영국 ‘대학’ 등에서는 고전 라틴어와 고대 그리스어를 학술적인 이유로 직접 수입하고 있었다.
4. 세계로 뻗어나가며 온갖 지역 특성 영어로 확대
이렇듯 단일 언어라고 명함을 겨우 내밀 수 있게 되기까지 다른 언어의 영향(주로 라틴어와 프랑스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영어는 제 힘이 강력해진 뒤에도 다른 나라 말을 흡수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미국 땅으로 건너간 영어는 원주민 언어를 대거 차용했고, 호주 땅에 스며든 영어는 역시 그곳 원주민들의 말을 상당수 흡수했다. 물론 그곳에서 영어가 원주민의 언어를 거의 말살했다는 어두운 면이 존재하지만, 영어가 그 언어들의 어휘를 차용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한편 영어는 외국어를 받아들였던 개방성만큼이나 자기 언어가 변하는 데 무심(?)했다. 우리나라의 국립국어원이나 프랑스의 아카데미 프랑세즈와 같이 자국 언어를 보호하면서 ‘바르고 고운말’을 권장하고, 동시에 그 힘이 상당한 국가적 언어 규범 기관이 영어권 국가엔 별로 없다. 다만 영국인과 미국인은 대중의 언어 습관을 추적하고 기록하는 데 주력했다. 그렇게 18세기 영국에선 사무엘 존슨의 사전이, 19세기 미국에선 노아 웹스터의 사전이 탄생했다.
그리고 영어는 지금도 세계 각국의 단어를 흡수하는 중이다. 영어는 무한증식하는 개방형 언어의 표본이다. 이상 평범한 영문학 학부생이 기억과 간단한 검색에 의존해서 쓴 영어의 역사다. 아무튼 위와 같은 역사를 지나온 결과 영어 어휘는 아래 그래프가 보이듯 다양한 출신 성분을 갖게 됐다.
기사 원문: 김종욱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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