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4일은 발렌타인 데이가 아니고 안중근 의거 사형 선고일이다 등등의 분연한 소리가 들리길래 어 그런가 하고는 곧바로 혼잣말을 했다. 근데 왜. 중요한 건 날짜가 아니고 안중근이라는 사람의 행적일 것이고 그 일생이 남긴 빛과 그림자를 되돌아보는 일일 테고 모월 모일이 무슨 날인지 모르냐는 호통은 별반 영양가 없다. 영화 <한반도>에서처럼.
그래도 어쨌건 알게 됐으니 고맙게 몇 자 덧붙인다. 2월 14일 주로 매스컴과 담벼락에 등장한 인물은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였다. 행여 살 생각하지 말고 당당하게 죽으라고 당부하셨고 이후 상해 임정의 정신적 지주로까지 계시다가 돌아가신 장한 조선의 어머니는 열 두 번 더 조명해도 나쁠 일이 없다. 그런데 그녀의 마지막 편지가 어떻게 세상에 알려졌을까? 그건 안중근의 사형 선고 전후를 지켜봤던 일본인 간수 지바 도시치의 기록에 의해서였다. 이 편지를 읽고 크게 감동한 지바가 일기장에 이 내용을 적어 놨던 것이다.
안중근의 휘호까지 받은 감시병
지바 도시치는 일본군 헌병으로서 안중근의 감시병이었다. 그는 안중근의 인품에 감동했고 그 어머니의 용기에 감복했다. 나카노 야스오가 쓰고 김영광이 편역한 <죽은 자의 죄를 묻는다>에 등장하는 지바와 안중근의 대화를 옮겨 본다. (김삼웅씨 블로그에서 인용)
지바는 안중근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안씨, 나는 일본의 군인, 특히 헌병이기 때문에 당신과 같은 훌륭한 분을 중대범인으로, 간수하게 된 것이 매우 괴롭소.” 그때 안중근은 되레 자신의 감시자를 위로한다.
“아니오, 당신은 군인으로서 당연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오. 이토 때문에, 굴욕적으로 한국군대가 강제로 해산된 뒤에, 나는 동지들과 대한제국 의병대를 결성하고, 그 참모중장이 되었고, 이 의병에 속하고 있는 동지들은 각기 생업에 종사하면서, 독립과 평화를 위해 동맹하는 것이며, 농부는 농사에, 선전유세를 담당하는 사람은 선전유세로, 이와 같이 각기의 임무를 별도로 하고 있소. 이토를 죽이게 된 것도, 나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소. 군인은 나라를 지키고, 일단 유사시에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그 본분이기 때문에 서로의 입장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자기의 임무에 최후까지 충실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요.”
지바 도시치는 다시 한 번 감동하며 안중근에게 휘호를 요청하지만 안중근은 정중히 거절한다. 그러나 사형 집행되던 바로 그날, 우리가 익히 아는 마지막 날의 모습대로 하얀 명주 한복을 입은 안중근이 지바를 부른다. “지바씨. 그때 말한 거 오늘 씁시다.”
안중근은 자신의 임무에 괴로워하던 군인 지바에게 이런 휘호를 써 준다.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爲國獻身 軍人本分)”
대한국인 안중근 서명 후 넷째 손가락 잘린 손바닥으로 수결까지 한 안중근의 휘호를 그는 평생 간직했다. 그러나 그는 군인의 본분은 스스로 포기했다. 몸을 바칠 국가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었을까. 대신 그는 철도원으로 평생을 보냈다. 안중근의 위패를 모시고 영령을 위로하는 일을 평생 멈추지 않으며. 우리가 익히 아는 안중근의 휘호들을 만나게 된 건 그의 덕이다.
끝까지 안중근을 지키려 한 조선의 변호사
한 사람 더, 안중근이 사형선고를 받던 재판정에 있던 한 명의 조선 사람을 더 기억해 보자. 안병찬이라는 사람이다. 안중근처럼 무장항쟁에 나서기도 했던 그는 이후 법관양성소에 들어가 법률 공부를 했고 일본 유학까지 하고 돌아와 잠시 검사를 하다가 변호사로 돌아선 사람이었다.
안중근 의거 소식을 들은 그는 폐병에 걸려 있었음에도 불원천리 뤼순으로 달려와 변호를 자청한다. 그러나 일제는 그를 비롯한 외국인 변호사들의 변호를 일체 불허했고 안병찬 변호사는 이에 거칠게 항의하다가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만다.
그러나 그는 돌아가지 않았다. 재판정 때마다 참석하여 공판을 지켜 보았고 소송 기록을 열람하여 정보를 제공하고 공판을 낱낱이 기록하여 역사에 남긴다. 안중근의 마지막 외침인 “동포에 고함”은 그를 통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 안중근의 구술을 받아 쓰면서 안병찬은 또 한 번 피를 토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는다. 우리들 2천만 형제 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는 자로서 유한이 없을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세상에 알린 자로서 그는 그 의미에 충실했다. 법조인으로서 매국노 이완용을 칼로 찌른 이재명을 변호하였고 그 뒤에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 투쟁에 앞장섰다. 러시아까지 가서 레닌으로부터 독립 운동 자금을 받아 오던 그는 황량한 만주 벌판에서 마적의 습격을 받아 (정파가 다른 공산당원의 습격이라는 말도 있다) 외로운 피를 뿌리며 사라져 갔다.
대한제국 천지에서 변호사 자격증이 있는 사람이라곤 손가락으로 꼽던 시절,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3대가 영화를 누릴 일만 남았던 변호사의 선택은 망명객이었고 독립군이었다. 이재명을 변호할 때 그가 터뜨린 노호를 보면 그의 선택이 넉넉히 이해가 간다.
“피해자 이완용은 총리에 앉은 이후 일호(一毫)도 국가와 인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자기 일신의 영달만 생각하고 5조약과 7조약을 체결하고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고 오백년 종사(宗社)와 이천만생영(二千萬生靈)을 오늘의 슬픔과 분노에 몰아 넣은 책임자다!!!!” 1910년 초, 대한제국이 멸망하기 직전, 일본 법관 앞에서 내지른 소리였다.
다시 돌아보는 안중근
안중근이 한 게 뭐가 있느냐, 이토 하나 죽인 것 밖에 더 있느냐 하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아니다. 그런 식의 폄하라면 위인전의 모든 위인들을 나는 헝겊막대같은 시정잡배들로 다 끌어내릴 수도 있고 세계사의 모든 사건들을 하잘것없는 조약돌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안중근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그의 사형 선고 현장에 있었던 두 사람의 행적으로 약간이나마 설명이 되지 않을는지.
뉴라이트나 교학사 교과서류가 가장 가증스러운 건 친일파를 옹호하는 게 아니다. 친일파를 위한 변명은 오히려 들어줄 만하다. 들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러면서 “그 사람들도 힘들게 살았으니” 독립운동가들, 정말로 가족도 인생도 버리고 평생을 몸바친 사람들의 동격에 올려놓으려 든다는 것이다. 그건 정말로 괘씸한 일이다.
그 반대편에도 할 말이 있다. 이미 백골이 진토된 친일파들의 손자와 증손자를 때려잡을 생각보다는 우리 독립운동사에 더 큰 관심을 보이고 그 후손들을 발굴하고 기리고 그들에게나마 , 지금에나마 혜택을 주는 쪽으로 열정을 쏟는 것이 어떨까 하는 것이다. “안중근이 테러리스트였다고 이런 쪽발이 쉐이들”이라고 분노하는 건 좋은데 그 분노가 우리의 치부를 가리는 팬티 역할을 해서는 안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