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화된 세계, 소박한 선의는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인가?
현재 일본의 애니메이션 업계에는 항시 불황과 어려움을 토로하는 목소리가 넘친다. 외유내빈. 겉으로는 화려한 이미지와 번영을 누리고 있는 분야처럼 이야기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1990년대 과열 기미까지 보였던 애니메이션 업계의 확장세가 수그러들고, 이른바 오타쿠 애니메이션이 횡행하면서 작품성이 퇴조하고 있다는 등의 의견이 내부에서 계속 나오는 등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이다.
헌데 2011년 한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이 방송되면서, 이런 어두운 분위기의 애니메이션 업계에 희망적인 청량제가 되어줬다. 그 작품이 샤프트가 제작하고 2011년 1월부터 마이니치 방송에서 방영된 <마법 소녀 마도카 마기카>이다. 심야 시간대에 방영된 이 작품은, 에반게리온 이후 비평가들의 극찬을 받으며 흥행 면에서도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필자는 감히 이 작품이 2011년 311 대지진 이후 등장한 일본 애니메이션상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손꼽을 만하다고 보며, 작품이 함의하고 있는 메시지는 시대를 관통하는 비범함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 작품은 “선의와 세상에 대한 불안에 대항하는 용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작품이다. 먼저 이런 질문을 툭 던져보고 이야기를 계속해보자, “(마법소녀들의) 착한 마음씨-선의는 과연 좋은 결과만을 가져올까?” 뚱딴지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먼저 탄자니아에 있는 한 호수에 관해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다윈의 악몽
2004년에 발표된 다큐멘터리 영화 <다윈의 악몽>은 탄자니아 빅토리아 호수 주변의 사람들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수많은 비평가와 지식인 관객들로부터 격찬을 받은 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프리카의 탄자니아에는 ‘빅토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세계 최대의 열대 호수가 있다. 1960년대 빅토리아 호수에는 과학적 실험이라는 명목하에 나일강의 농어가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호수의 먹이사슬이 파괴된다. 빅토리아 호수에 원래 살던 어종은 농어라는 거대하고 광포한 파괴자에 의해 멸종되고 이제 호수에 남은 물고기는 파괴자인 나일강 농어뿐이다.
호수의 생태가 파괴된 이후 지역 원주민들의 삶도 파괴되었다. 다양하고 균형 잡힌 어종을 가진 호수에서 낚시와 농어업으로 평화롭게 살던 원주민들은 이제 자본의 착취, 기아와 전쟁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살이 많고 크기가 큰 농어가 호수의 생태계를 장악하자 주변에는 농어의 살코기를 가공하는 대규모의 공장이 들어서고, 이 공장에서 가공 생산된 농어는 서유럽과 일본으로 고가에 수출된다.
하지만 호수 주변에서 전부터 살아오던 원주민들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경제논리에서 소외당한 채 죽어가고 있다. 전통적 자연경제가 무너지자 무력한 원주민들은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가고,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거리로 내몰려 매춘과 구걸로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농어 가공공장에서 가공포장을 마친 생선을 서유럽과 일본 등지로 수출하기 위해 항공 수송을 하는데, 대부분의 항공기는 구소련에서 아프리카에 전쟁무기를 싣고 오는 수송선들이다. (내용은 씨네21의 기사에서 인용)
하지만, 정작 다큐멘터리를 보면 단순하게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단순한 시각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저 호수에 농어를 풀어놓은 사람, 공장을 세운 사람들, 그리고 농어 통조림을 먹는 소비자들… 이 중에서 악의를 가지고 그런 짓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 공장을 세워서 빈곤을 해결해주려는 사람들, 생산성이 높은 물고기를 기르는 게 좋다고 생각한 사람들… 다들 선의에 따라서 행동한 것이다.
누구도 “이 깜둥이 놈들 나라는 어떻게 되든 우리나라만 잘먹고 살면 돼!” 라는 악당들이 할 만한 대사를 하는 이는 없다. 그러나 결과는 보듯이 전통적인 삶의 방식이 파괴되고 환경이 더욱 심각하게 파괴되어 내전이 심화되고 결국 현실의 지옥도가 만들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몬스터>. 주인공 천재 의사 닥터 덴마는 그야말로 인도주의적인 선의에서 총에 맞은 어떤 어린아이를 살려주게 된다. 하지만, 이 어린아이는 인간을 벌레처럼 생각하는 악마적인 천재성을 지닌 아이로, 그가 행한 선의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비참하게 목숨을 잃게 된다.
선의의 마법소녀들이 마녀가 되어간다
이외에도 선의의 행동이 불러일으킨 파멸적인 결과는 역사의 도서관에 가득하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수도 없이 많다. 개인적인 사욕에서 시작한 일이 결국엔 국가를 구한다든지, 역사적인 영웅으로 만들어준다든지, 인간을 파멸시키기 위한 핵병기가 결국 세상을 평안한 상태로 만들어주었다는 모순이 그것이다. ‘새옹지마’라는 4자성어가 의미하듯 세상에는 인간의 두뇌로는 이해가 불가능한 ‘예측 불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
오늘 이야기를 꺼낸 <마도카 마기카>도 이런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작품 안에서 등장하는, 마녀와 싸우는 마법소녀들은 다들 절박한 이유가 있어 마법소녀가 되었다. 이들의 동기는 하나같이 타인을 위한 이타적인 이유들이다. 부상으로 악기를 켜지 못하는 남자 친구를 위해서라거나, 친구를 돕고 싶다거나, 비참하게 죽어가며 자신을 구해달라는 친구의 부탁에 영겁의 회귀를 거듭하게 된다거나…
하지만 선의로 시작한 이런 일들은 결국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며 그 절망감에 자신들이 마녀가 되고 만다. 또 이 마녀들을 죽이기 위하여 새로운 (선의에 가득 찬!) 마법소녀들이 만들어진다.
주인공 카나메 마도카는 이런 마법소녀들을 만들어내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큐베이’에게 이런 건 잘못되지 않았는가? 라고 반문하지만 큐베이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것이 무엇이 나쁜가? 원래 자연상태에서는 짧은 수명에 불안에 시달리며 살아야 할 돼지나 소들은 언젠가 인간의 식료가 되기는 하지만 그전까지는 그런 생존경쟁에 시달리지 않는 평안한 삶을 보낸다. 여기에 뭐가 불합리한 구석이 있는가? 합리적이다. 마법소녀들은 언젠가 마녀가 되겠지만, 그전까지는 소원/기적을 이루어 행복한 감정을 가지고 살아간다. 타당한 거래다. 그러니 이것은 옳다. 그러니 의문을 가지지 말고 이것에 따르는 것이 맞다”
이런 문답은 우리가 흔히 사춘기를 지나서 사회를 경험할 때 느끼는 점과도 유사하다. 어쩌면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만나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유년시절에 정의가 승리하고 남에 대한 선의는 좋은 결과를 낳으며 보상을 받는다고 배우지만, 성장할수록 다양한 가치관과 만나며 어쩔 수 없는 세상의 복잡성이 주는 어려운 문제에 직면한다.
그리고 <어른들 논리>나 <다수의 논리>, <가족을 위해서>, <국가를 위하여>등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포장된, <합리를 내세운 큐베이식 논리>와 직면한다.
“세상이 그런 것 몰랐어? 어쩔 수 없는 거야.”
“철이 아직 덜 들었구나? 그런 순진한 생각이 통할 줄 알아?”
우리는 주인공 카나메 마도카나 실질적인 주인공 호무라 아케미와 같이 이런 두터운 인식들에 수없이 상처 입고 절망하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추한 경쟁의 장에서 그런 어른들의 논리로, “선의를 내세우면서도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게임”에 참가하게 된다.
시니컬한 전개, 희망의 결론
* 주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도카 마기카>의 결론이 이러했다면 필자가 장문의 글을 쓰면서 이 애니메이션을 평가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카나메 마도카는 작중 큐베이가 강요하는 강압적인 논리와 합리에, 이미 우리가 역사 속에서 수많은 이들이 취해온 지극히 상식적인 행동으로 답한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하여 원래 예정보다 늦게 방영된 <마도카 마기카> 최종화에서, 주인공 카나메 마도카는 자신이 사람들에게 <개념>으로 조차 인식되지 않는 완벽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도, 흑막 큐베이가 구축한 마법소녀/마녀 시스템을 완전히 파괴하고 자신의 희생으로 모든 마법소녀를 저주에서 구한다. 그녀는 합리라는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얼핏 불합리하지만, 이타적인 행동을 통하여 성녀가 되며 세상을 구원한다.
세상에는 큐베이와 같이 현실에 순응할 것을 강요하는 ‘논리’와 ‘합리’가 가득하다. 그리고 선의가 세상을 구원하지 못할지도 못한다는 ‘불안’ 또한 가득하다. 이것을 알고 많은 이들이 흘린 눈물 또한 세상 저 밑바닥에는 숱하게 깔려있다. <마도카 마기카>가 시대를 관통하는 철학적인 메시지를 획득하는 것은 이 세상의 진실을 알았을 때 우리가 취할 행동에 대해서 말하기 때문은 아닐까?
역사책을 조금만 들추어보자. 불과 백 몇 십년전 영국에서는 10살이 채 안 된 조그만 소년이 지옥같은 근로환경에서 하루 십 수 시간의 중노동에 시달리는 게 당연했다. 2차 대전 때 전쟁터로 간 남자들을 대신하여 국내 제2 전선에서 여자들이 무기를 만드는 중노동을 하여 권리를 쟁취하기 전, 여성 참정권은 비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세계 최강대국이라는 어느 나라는 아프리카에서 잘살고 있는 흑인을 데려와 개만도 못한 대우를 하면서 죽도록 부리는 노예제를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그렇지 않으며 이런 것들이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며, 그것을 당연하게 후대에 가르치고 있다.
작중 주인공인 카나메 마도카. 그녀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세상의 폭압에 저항하는 의지의 화살을 날린다. 그리고 기적을 불러일으킨다. 그녀를, 지금까지 인류 역사상 누군가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가슴 한구석에 있는 인간에 대한 선의를 품었던 누군가로 대입해보자. 그들이 날린 수많은 화살들이 세상을 바꾸었다고 생각해보자.
그 행보가 가혹한 대가를 요구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진보하고 있으며, 그것은 역사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들이 증명하고 있다. 한편의 문예작품은 인간 세상을 짧은 시간 안에 함축적으로 반영하고 있으며 <마도카 마기카>는 합리라는 차가운 이성과 선의가 좋은 결과만을 낳지 않는다는 복잡성과 만났을 때 생기는 ‘불안’에 대한 어떤 대답을 들려주고 있다.
그것은 판에 박힌 것이지만, 희생이라는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말고 노력하는 것이라는 점은 아닐까. 또 그렇게 노력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아닐까. 애니메이션의 마지막에, 그녀를 유일하게 기억하는 아케미 호무라는 황량한 폐허에서 또 다른 싸움을 하러 황망히 길을 떠난다. 마도카 마기카의 메시지가 가볍지 않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인간의 진보와 희망을 믿는다면,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누군가가 싸웠음을 안다면 당신도 그 가치를 이어받아 싸우고 진보해나가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왜 아케미 호무라의 손에, 마도카가 희망의 화살을 쏘아 올린 활이 들려있는지 상기해보시길 바라며, 이글을 마친다.
woolrich bolognaAchieve Unique Business Cards with Letterpress Pr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