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과 행복한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예전에 나는 불행한 사람들을 더 좋아했다. 행복한 사람들은 어쩐지 삶의 깊이를 모르는 것 같았고, 삶의 표면을 피상적으로만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보다는 다소간의 슬픔을, 우울을 가져 삶 전반에서 행복보다는 불행을 더 예민하게 감지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인간이나 인생의 본질에 더 가까운 존재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즘 나는 행복한 사람들이 좋다. 행복한 사람들을 좋아하면서 알게 된 건, 그들이 행복한 게 불행할 이유가 없어서가 아니라 불행할 이유를 이겨내서라는 점이다. 불행할 이유가 있어도 그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대부분 불행할 이유에 집중하는 대신 오랜 자기와의 싸움을 통해 불행으로부터 자신을 어느 정도 차단하고, 방어하고, 행복으로 들어가는 법을 아는 것처럼 보인다.
행복한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저마다의 행복한 방법이 있다. 누군가에게 그 방법은 신앙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사랑이며, 또 어떤 이에게는 자기만의 취미가 있다. 그런 구체적인 무언가가 없더라도 그들은 자기 마음과 싸워 이기는 방법을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알아서 불행에 몰두하지 않는다. 행복한 사람들을 만나면 그런 것들을 배울 수 있다. 그렇구나, 그래서 행복하구나, 나도 행복해야겠다, 하고 생각한다.
불행은 통찰력을 준다. 허무, 불안, 슬픔을 통해 삶의 본질을 엿보게 하고, 인생의 남다른 측면을 드러나게 한다. 하지만 불행은 그 통찰력만큼 삶을 앗아간다. 통찰력에 몰두하는 만큼, 삶은 뒤로 물러난다. 그런데 내가 배운 지혜랄 것이 있다면, 가장 몰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통찰력보다는 삶이라는 점이다. 삶을 갉아먹는 통찰력이라면 굳이 가지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게 된다. 통찰력보다는 삶의 우월성을 지켜내고 싶다.
언젠가는 불행한 사람들의 연대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술잔을 기울이며 불안과 우울에 관해 이야기하고, 저 소시민적인 현실에 저항하며, 그들만의 밤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진정한’ 삶의 어떤 면을 구성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즘 나는 행복한 사람들의 연대를 생각한다. 새가 지저귀는 아침에 커피 한 잔을 나누며, 이 순간의 행복에 함께 몰두하는 어느 사람들의 시간을 생각한다. 그들이 만날 바다와 하늘, 사랑하는 사람의 웃음, 평온한 기쁨이 있는 어느 순간들을 생각한다. 행복이 더 낫다는 생각을 한다.
원문: 정지우 문화평론가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