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칭 하나 때문이 아닙니다. 사실 남자 문인이 여성을 그리는 방식, 남자 영화감독이 여성을 그리는 방식에 밴 인간관이 문제입니다. 이 인간관은 오래되고 아주 거대해서 그 와중에 있으면 그게 문제인지 모릅니다. 숲속에 있으면 숲이 보이지 않으니까요. 오히려 숲을 이루는 필수적인 부분이라고 여기기까지 합니다. 문학이라는 거대한 숲을 거닐면서 여성을 그렇게 그리지 않고 문학을 어떻게 하지? 이렇게 생각하니까요.
하지만 피터 비에리의 말에 따르면 “교양을 가진 자라면 해야 하는 일은 기존의 가치관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일”이고, 제가 아는 문학 역시 그래야 한다는 소명이 있습니다. 예이츠는 예술가들이야말로 시대의 변화를 (차근차근 한 발자국씩 나아가는 이성과 달리) 직관으로 먼저 알고 시대에 앞서 앞으로 올 시대를 그리는 사람들이라고 했지요. 그래서 숲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문학의 낭만화 전통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사실 이건 제가 양평원에서 하는 강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제가 서구문학 외엔 잘 모르므로 서구문학을 예로 들어 말합니다. 어떻게 남성이 개인과 주체가 되기 위해 여성을 대상화하는 지난한 작업을 수백 년 동안 해왔으며 그게 거대한 문학 전통이 되었는지 말입니다(→원래 그렇지 않았습니다).
서구에서는 얄궂게도 인간=남자입니다. man이니까요. 여자는 인간이 아니므로, 혹은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 열등한 인간이므로 이 (남자인) 인간들은 인본주의를 통해 인간으로 개인으로 서기 위해 여성을 대상화하는 작업을 가장 먼저 시작합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절대자와 달리, 인간은 반드시 자신을 인식하기 위해 상대가 필요한 존재들이라서, 남자 인간들이 주체와 중심으로 서기 위해 배경으로 둘, 밟고 일어설 열등한 대상으로 여성들을 설정하기 시작합니다. 자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연과 여성의 대상화는 ‘낭만화’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백성(집단)의 일부가 아니라 개인인 인간이라는 맹아가 비로소 싹트기 시작한 게 르네상스 시대입니다. 이때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두들이던 페트라르카와 단테가 한 짓을 보면, 여성을 성스러운 존재로 신격화하는 일이었습니다. 페트라르카의 라우라와 단테의 베아트리체가 그들이죠.
평생 손도 못 잡아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여자들을 수십 년을 그리면서, 마치 이 여자들은 화장실도 안 가는 존재인 양 신성화합니다. 신성화되면 좋지 않냐고요? 아뇨. 신화화를 하면 반드시 소외가 생겨납니다. 신화화된 얼굴에 여성이 갇히고, 화장실에 가는 여자들은 소외됩니다(그런데 모든 여자는 화장실에 갑니다).
이 전통들이 무르익으면서, 영국 낭만주의의 창시자 윌리엄 워즈워스는 『서정담론』이라는 작품을 코울리지와 함께 씁니다. 혁명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왜 혁명적이냐고요. 우선 워즈워스는 20대에 1년 반 넘게 프랑스 혁명 현장을 보고 돌아온 피 끓는 젊은이었습니다.
거기서 돌아와서 왜 영국 왕정을 비난하지 않고 『서정담론』이나 썼을까요? 그게 혁명이니까요. 개인의 사적인 감정을 그리는 것을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해냈으니까요. 이전 세대에 사전을 혼자 다 써낼 정도로 엄청난 학자였던 사무엘 존슨은 ‘고독’이란 미친 짓이라고까지 했으니까요.
인간 집단에서 신의 대리자였던 왕을 끌어내려 그 목을 치는 행위는 이제 인간은 집단의 일부가 아니라, 모두가 왕과 동등한 개인이라는 선언 다름아니니까요. 그걸 목도하고 돌아온 젊은이는 그래서 혁명적인 글을 쓰죠. 개인의 사적인 감정을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개인의 사적인 감정을 어떻게 노래하냐고요? 그 방법론이 아주 기가 막힙니다. 자연과 여성을 대상화하면서 합니다. 「외로운 추수꾼(Solitary Reaper)」은 서정담론에서 가장 유명한 시 중 하나입니다. 들판에 홀로 서서 추수하는 아가씨를 그린 시죠. 추수는 주로 남자가 할 텐데, 고약하게도 이건 꼭 아가씨. 아줌마도 아니고 아가씨여야 하죠.
인간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고, 인간의 생존에 위협적이었던 늑대들이 득실거리던 자연은 이때 비로소 인간의 감정을 투사 받아서 낭만적이 됩니다. 자연은 가만히 있는데 인간들이 자기들 감정을 제멋대로 덧입히기 시작한 거죠. 여성도 자연과 함께 대상화되는 길을 걷습니다.
후기 낭만주의로 가면 이런 들판에서 알 수 없는 여성이 등장해서 남자를 유혹해 죽이기 시작합니다. 존 키츠의 『무정한 미인(La Belle Dame Sans Merci)』이 처음으로 팜므파탈을 그리기 시작하죠. 이후 낭만주의는 개인의 감정을 그리고 주로 사랑 노래를 하는 사조로 여겨집니다.
개인의 감정을 문학을 통해 그리는 게 너무도 자연스러운 숲 안에서 사는 우리는 원래 문학은 낭만적인 것, 원래 개인의 감정을 그리는 것, 원래 문학은 자연과 여성을 대상화해서 낭만적으로 노래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현재 우리가 거니는 문학의 숲에서 이런 것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제 묻습니다. 수백 년에 걸쳐서 어떻게 낭만화가 시작되고 어떻게 자연과 여성을 대상화해왔는지 이제 본다면, 우리가 거니는 이 문학의 숲의 풍경이 정말로 있는 이대로가 당연한 겁니까? 당연합니까? 그렇지 않다가 지금의 상태로 변한 거라면, 또 다른 풍경으로 변하지 못할 이유가 또 뭐랍니까? 왜 현재의 낭만화 전통이 절대 불변의 문학의 속성인 것처럼 말하는 겁니까? 왜?
문학은 왜 하십니까?
억울하시죠. 남들 다하는 문학 전통에 기대에 자연을 계집년의 육체 따위로 비유했는데 왜 나만 비난을 듣는지. 남들 다하는 대로 궁상을 떨며 남자의 순정을 배신하고 남자를 버리고 떠나는 여자에게 버림받은 불쌍한 남성 자아로 부대끼며 절절한 노래가 잘만 나오고 자신은 순수하게 사랑했노라 노래했는데, 왜 그게 비난을 듣는지.
다들 그런데 대표주자로 찍혀서 억울한 심정은 그렇겠다도 싶습니다. 허나 대표주자로 찍혀 비난받을만한 목소리 지분을 가진 이들이라 겪는 일들이기도 합니다. 거꾸로 뒤집어서 그 재능과 그 기득권을 가지고, 왜 당신들은 구태의연한 기존의 풍경에만 기대려고 합니까? 왜 당신들이 거니는 숲의 경계로 나가보지 않는 겁니까?
더 나아가서, 경계로 나아가 새로운 시선을 얻는 게 아니라면, 경계에 자신을 던져서 자신이 부서지고 거듭나는 경험을 하는 게 아니라면, 문학은 왜 하십니까?
주변에 있는 존재들이 더 이상 주변에 있지 못하도록 호출해주는 역할, 그게 문학의 역할이라 저는 믿습니다. 문학이 내 권력이 되고 문학이 내 지분이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시대가 변해서 말입니다. 이미 기존의 중심을 해체하는 인식의 변화가 시작된 지 30년이 넘었고, 그게 퍼져나가는 격류를 타고 우린 모두 헤엄치고 있는 겁니다. 이전에 경계에 있던 자들, 주변에 있던 자들이 이제 목소리를 내는 때입니다.
원문: Joyce Park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