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수도사들에게는 ‘아케디아(Akedia)’라고 부르는 상태가 있었다고 한다. ‘정오의 악마’라고도 불린 아케디아는 수도사들에게 어느 오후면 찾아와 온 세상이 멈추어버린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창밖에 지나가는 구름, 저녁을 향해가는 태양이 거의 정지상태와 같이 느리게 흘렀고, 수도사들은 어느 순간 그 정체된 느낌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방 밖으로 뛰쳐나가고, 태양만을 쳐다보며, 자신을 둘러싼 수도 생활 전체에 염증을 느꼈다.
아케디아가 오면 매일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일상이 무너졌다. 아무렇지 않았던 잠자리의 모든 것, 이불의 감촉, 베개의 느낌, 코로 스며드는 공기 하나하나가 모두 짜증스럽고 발작할 것처럼 참을 수 없게 되었다. 늘 만나던 동료 수도사들도 자신에게 지나치게 무관심하게만 느껴졌고, 음식은 너무 짜거나 달게, 입고 있는 옷은 너무 작거나 헐렁하게 느껴졌다.
이 정오의 악마, 아케디아는 수도사들에게 찾아오는 가장 전형적이면서도 무서운 병 중 하나였다. 이 악마는 모든 악마 중 가장 재빠른 악마이자 가장 사악한 악마였다. 이 악마가 원하는 것은 수도사를 그 반복되는 일상에서 끄집어내어 ‘저 먼 곳’으로 달려가게 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지금 이곳을 견딜 수 없게 만들어버리고, 어떻게든 이곳으로부터 탈출해야 한다고 끝없이 속삭였다는 것이다.
아케디아가 최악의 악마로 여겨진 이유는, 그 악마가 수도사로부터 다름 아닌 ‘지금 여기’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 능력을 앗아갔기 때문이다. 아케디아는 ‘지금 여기’만 아니면 된다는 강렬한 열망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수도사들이 신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오직 지금 여기였다. 오직 지금 여기에 깨어 있음만이 신을 만날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에, 아케디아는 수도사를 신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뜨리는 법을 알고 있었던 셈이다.
달리 말하면 수도사가 아케디아와 싸워 이길 방법은 단지 지금 여기를 되찾으면 되는 것이었다. 지금 여기를 붙들고 있다는 사실, 내가 지금 여기에 속해 있다는 사실만 잘 붙잡고 ‘깨어 있으면’ 결코 아케디아는 그에게 침범할 수 없다. 이건 다소 아이러니한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지금 여기를 견딜 수 없는 사람에게 극처방이 다름 아닌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셈이니까.
어쩌면 지금 여기를 견딜 수 없는 사람은 제대로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지금 여기’에 있다고 믿지만, 지금 여기에 깨어 있다고 믿지만, 사실 그는 다른 곳에 있고, 그 다른 곳에 잠들어 있을 것이다. 그는 지금 여기에 속하길 원하지만, 그래서 어느 먼 곳으로 떠나려 하지만, 사실 그 먼 곳에서도 그가 여전히 만나야 하는 것은 ‘지금 여기’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영원히 악마의 포로가 되어 끊임없이, 가장 빠른 속도로, 계속하여 ‘이곳’을 탈출하고자 할 수밖에 없다. 자신을 잊으며, 지금 여기를 잊으며, 계속해서 도피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수도사들이 이 악마와 싸워 이기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그저 각자의 방에 들어가 아무도 만나지 않고 가만히 머무는 것.
악마가 원하는 것은 그를 끌고 나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가 어떻게든 방 안에 버티고 있으면 이윽고 악마는 포기해버리고 그를 떠났다. 그러면 그를 끌어당기던 고삐도 풀리고 그는 비로소 자기 안에 머무르며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러고 나면 자기 안에서부터 차오르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도래했다. 항상 그 자리에 있었던 지금 여기의 충만함이 비로소 그에게 인식되며, 그는 신을 느꼈다고 한다. 신이 여기 있음을, 그래서 자신도 여기 있으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문: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