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친구 팀명이 세계평화가 될 뻔했다고?
언제 들어도 작명에 대한 비화는 놀랍다. ‘걸그룹 여자친구가 정말로 세계평화가 될 뻔했다’라. 타이틀곡 이름은 〈오늘부터 지구는〉이고 팬클럽 이름은 비둘기 혹은 UN 정도가 좋겠지?
세계평화를 사랑해주시는 비둘기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푸드득(죄송합니다 버디 여러분).
그렇다. 아이돌도, 책도, 음료도 첫인상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이름’이다. 잘 지은 이름은 사람들의 기억에 콕 박힐뿐더러, 음료의 맛을 특별하게 만든다. 다행히도 우리 주변에는 예쁜 이름의 음료가 많다. 오늘 마시즘은 불러보고 싶은 이름을 외쳐본다.
음료작명왕의 자식, 나랑드사이다
- 의미: ‘나랑 드시지요’의 옛말
- 특징: 언어의 달인
음료의 작명을 논할 때 가장 먼저 꼽히는 사람, 바로 동아오츠카 강신호 회장(현 동아쏘시오그룹 명예회장)이다. 그는 박카스, 오란씨, 판피린, 써큐란 등의 제품명을 붙인 것으로 유명하다. 3음절 이내의 단순해 보이는 이름을 고수하지만 사실 한국어, 일어, 독일어, 중국어 등 4가지 언어의 단어를 콤비네이션한다고.
그중에서 (마시즘 선정) 가장 좋은 이름은 무엇일까? 바로 ‘나랑드 사이다’다. 나랑드 사이다는 너와 내가 같이 마신다는 의미를 담기 위해 ‘나랑 드사이다’라는 문장을 다르게 끊어 만든 이름이다. 나랑 드사이다는 ‘나랑 드시지요’의 옛말이다. 띄어쓰기 하나로 만든 멋진 이름. 언어 1등급.
세련된 한글, 참이슬
- 의미: 소주를 냉각할 때 이슬이 맺히는 것 같이 보여서
- 특징: 진로(眞露)를 한글로 풀어썼을 뿐인데(세-련)
지난 글 「참이슬 VS 처음처럼, 순한 소주의 독한 전쟁사」에서도 샤라웃 했지만, 한국의 소주러들은 손혜원 의원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참이슬, 처음처럼 이름을 모두 그녀가 지었기 때문이다. 옛날에 나왔다 사라진 ‘산’이라는 소주 이름도 지었고 ‘참나무통 맑은소주,’ ‘화요’도 손 의원의 손을 거쳤다. 이쯤 되면 거의 민증 발급받듯이 손혜원 의원이 이름을 붙여주어야 소주가 될 수 있는 듯하다.
마시즘이 좋아하는 소주 이름은 단연 ‘참이슬’이다. 진로라는 무겁고 오래된 소주를 이름 하나로 세련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소주의 냉각과정을 보면서 풀잎에 이슬이 맺히는 것을 착안해서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매력적이다. 소주를 이슬에 비유한다니. 그녀 덕분에 전국의 많은 애주가는 이슬을 마시고 사는 사람이 되었다.
전통사랑, 4글자로는 초록매실
- 의미: 초록의 자연을 담은 매실음료
- 특징: 사자성어 같은 네이밍
앞서 강신호 회장, 손혜원 의원과 더불어 웅진식품 조운호 사장(현 하이트진로음료 대표)은 음료 이름에 획을 그은 삼대장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가 기획부터 네이밍까지 함께한 히트작만 말해도 대충 알 수 있다. 가을대추, 아침햇살, 초록매실, 하늘보리… 최근에는 블랙보리까지.
우리는 여기에서 큰 깨달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 상품 이름이 죄다 4글자다. 어쩐지 잘 외워진다고 생각했더니 사자성어 비슷한 거였잖아(아니다). 그는 당시 외국계 브랜드들이 가득한 음료 시장에서 한국적인 음료를 만들어 왔다. 작명 역시 한글의 느낌을 최대한 살린다. 과연 ‘전통 음료로 코카콜라를 이기겠다’는 사나이답다.
가장 시적인 이름, 2% 부족할 때
- 의미: 사람의 체내 수분은 2%만 부족해도 갈증이 납니다
- 특징: 이런 사실을 몰라도 끌리는 문구
1990년대 일본에서는 미과즙 음료라는 과즙 함량이 낮은 물 비슷한 음료가 인기였다. 한국에서도 남양유업이 재빨리 ‘니어워터’라는 상품을 출시했다. 비슷한 시기 미과즙 음료를 준비하던 롯데칠성은 당황한다. 이거 또 유행을 따라 한다는 소리를 듣는 것 아니야? 때문에 차별화를 해서 성공한다. 성분을? 아니 작명이다.
‘2% 부족할 때’는 당시 보수적이었던 롯데칠성에서 예외적으로 작명을 외주에 맡긴 상품이다. 처음 만들어진 음료의 이름은 ‘체내 수분 2% 부족할 때’. 사람의 몸은 70%가 수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2%만 부족해져도 갈증을 느낀다는 구구절절한 의미였다.
하지만 롯데칠성에서는 이름이 너무 길다는 의미로 ‘체내 수분’이란 단어를 뺐다. 그랬더니 대박이 났다. 사실 우리가 2% 부족한 것은 수분만이 아니니까. 굉장히 감성적으로 다가오는 음료 이름이 되었다.
장문 이름 유행의 시작, 미녀는 석류를 좋아해
- 의미: 석류를 마시면 미녀가 될 수 있다
- 특징: 바꾸고, 바꾸고, 바꾸다 보니 이게 나옴
2% 부족할 때에서 롯데칠성이 배운 교훈은 작명이 성패를 좌우한다는 것이다. 2006년에 야심 차게 만든 석류 음료 역시 여러 이름을 모집했다. 광고회사에서 가져온 이름 후보는 10가지 정도가 있었다. 석류 37.2, 석류노을, 소녀 석류를 만나다 등… 이 중에서 가장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은 ‘소녀, 석류를 만나다’였다.
하지만 출시를 앞두고 ‘소녀’를 확장해서 ‘그녀’로 타깃을 늘리기로 했다. 그래서 나온 이름이 ‘그녀는 석류를 좋아해’. 그랬더니 밋밋해져서 그녀를 미녀로 바꿨다. 결국 정해진 이름이 ‘미녀는 석류를 좋아해’가 되었다. 하나의 음료를 출시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공이 들다니.
미녀는 석류를 좋아해가 대박이 나자 식음료업계는 한동안 ‘긴 이름 붙이기’가 유행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준기를 모델로 쓰지 않았지.
헬리콥터 뭐요? 헬리코박터 프로젝트 윌
- 의미: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을 잡는 윌
- 특징: 뭔 소린지 모르겠지만 맞는 말 같아
문과와 이과가 나눠진 후 우리 민족은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바로 서로의 말을 못 알아듣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최근에는 이과 친구 이야기를 듣다가 “넌 NASA에서 왔니?”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그가 말하는 전문용어가 무슨 말인지 몰라서 그냥 뇌가 납득하기로 스위치를 올려버린 것이다.
2000년에 한국 야쿠르트에서 나온 ‘헬리코박터 프로젝트 윌’이 그렇다. 연구야 뭐 이과생들이 했다 쳐도, 네이밍을 누가 한 것인가(원래는 위를 위한 발효유 윌이라고 했다가 허가가 나지 않았다. 위장약 코스프레). 또한 이 음료를 부르기 어려워 헬리콥터균이라고 했던 1만 3,500여 명의 야쿠르트 여사님을 어쩔 것인가.
하지만 이 난해함이 설득력을 얻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필요하다는 느낌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2001년 헬리코박터 프로젝트 윌의 모델을 맡긴 배리 마셜 박사가 2005년에 노벨상을 타버려서. 동시에 헬리코박터 프로젝트 윌에 대한 전문성이 높아졌다. 그냥 따지지 말고 마셔! 문과라면!
가장 도발적인 이름, 바나나는 원래 하얗다
- 의미: 바나나 알맹이는 원래 하얀(데 너네는 노란색 음료를 팔고 있지 페이크들!)
- 특징: 선거 구호 같은 네이밍
가공유 시장은 언제나 빙그레 ‘바나나맛 우유’의 천하였다. 사실상 미래에는 바나나맛 우유가 한국의 전통 음료에 들어가야 할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으니까. 하지만 2006년 말 매일유업에서 바나나맛 우유에 대적하는 음료가 나왔다. 이름부터 논쟁적이다. ‘바나나는 원래 하얗다’. 그렇지. 바나나는 껍질만 노랗잖아.
‘바나나는 원래 하얗다(바하로 줄여 쓰자)’는 바나나는 껍질만 노란색일 뿐 우리가 먹는 알갱이는 하얀색이 아니냐는 메시지를 던진다. 이 안에는 ‘당신들이 마시는 바나나맛 우유는 노란 색소가 들어있다’는 공격포인트가 있었다. 바하는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듯 투명한 병에 나왔고 당시에 색깔 논쟁은 큰 화제였다.
덕분에 바하는 1년 만에 4,000만 개를 파는 괴력을 보여준다. 전체 우유 시장에서 10위권 안에 진입하는 성적이었다. 문제는 위대한 철옹성 바나나맛 우유는 1달이면 1,300만 개를 판다는 것이겠지만…
당신이 음료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음료 속에 숨겨진 복잡다단한 역사만큼이나 부르기 쉬운 이름에는 어떤 의미와 꿈이 들어있다. 미에로화이바는 ‘아름다움(美)에로 향한 식이섬유(Fiber)’라는 의미가, 활명수에는 ‘생명을 살리는 물’이라는 의미가, 갈아 만든 배에는 ‘IdH’라는 의미가 담겼다(아니다). 우리가 어떤 음료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큼 오래 기억되고, 또 많이 마시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오늘 당신이 부를 음료의 이름은 무엇일까?
원문: 마시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