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가 대중문화의 황금기라고? 대중음료의 황금기가 맞지
스치듯 지나간 말에 마시즘은 지난 몇 개월 동안 한국 대중음료의 역사를 소개했다. 프로젝트 명 <X세대의 음료> 환타부터 갈아 만든 배까지 90년대를 전후로 어떤 음료가 세상을 뒤흔들었는지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성공한 음료들로만 시대를 말하기엔 아쉽다. 배스킨라빈스처럼 새로운 맛들이 쏟아지던 음료계의 춘추전국시대. 왕좌를 차지한 음료보다 실패한 음료가 더욱 재미있는 법이다. 오늘 마시즘은 야심 차게 나왔다가 단종된 음료에 대한 특집이다. 과연 이 녀석들은 시대를 앞서간 음료였을까, 그저 무리수였을까?
레벨 1. 절대자에게 까불다가 사라진 음료
한국음료의 역사는 퉁쳐서 코카-콜라와 칠성사이다의 아성에 도전하는 과정이다. 보리 탄산, 식혜, 배음료 등은 나름의 차별화로 이들에게 대항을 했다. 하지만 특이점 하나만 믿고 정면승부를 했다가 장렬하게 사라진 음료가 있으니. 이들의 명복을 빌어주자.
콜라 계의 노란 머리, 옐로콜라
- 장점 : 우와 콜라가 노란색이야!
- 단점 : 왜 콜라가 노란색이야?
1998년 ‘콜라독립 815’가 만든 콜라독립운동의 끝판왕. 그것은 2001년 해태음료에서 나온 ‘옐로콜라’다. 옐로콜라는 ‘콜라는 왜 검은색인가’라는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 나왔다. 마치 중고등학교에서 노란 머리 염색을 한 학생이 온 것 같은 주목을 받았다.
그뿐이었다. 주목은 성공했으나 누구도 선뜻 이걸 왜 마셔야 하는지 몰랐다고.
소풍 간지템, 에너비트
- 장점 : 초등학생 때 이거 마시면 인싸
- 단점 : 졸업했는데도 이거 마시면 아싸
진정한 멋을 아는 친구들은 소풍 때 ‘에너비트’를 마셨다. 이것은 단순한 음료가 아니었다. 에너비트를 냉동실에 얼린 후 에너비트용 치어팩(비닐 가방)에 차서 들고 다니면서 쪽쪽 거리면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초딩이 되는 것이다.
1995년 대웅제약에서 출시된 에너비트는 스포츠음료 게토레이의 아성을 잡기 위해 출시된 녀석이다. 먼가 힙한 디자인(알고 보면 이태리 베네통 출신)에 당시 최고의 축구선수인 ‘로베르토 바조’까지 모델로 썼으나. 초딩들의 간지템으로만 남아버린 게 함정. 졸업하면 게토레이나 포카리스웨트 마시겠지.
레벨 2. 환장(?)의 타이밍을 보여준 음료
음료의 역사에 대해서 공부하며 알아낸 사실인데, 음료가 인기를 얻는 것은 맛보다 맥락이다. 한국에서 신토불이 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식혜음료는 캔이 아닌 장독대에서 잠들어 있었겠지.
그렇다. 이것은 마치 시대별로 이상형의 조건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어떤 시대가 와도 나는… 그리고 이 녀석들은…(왈칵)
트렌드를 너무 앞서 나간 술, 하이주
- 장점 : 굉장히 세련되었다
- 단점 : 물론 그때는 몰랐지
2001년 롯데칠성에서 나온 ‘하이주(Hi-CHU)’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과즙 이 들어간 알콜로 ‘맥주 말고 하이주’를 드시라는 광고를 펼쳤다. 하지만 당시에는 술 취급을 받지 못했다는 게 함정. 과일 맛 나는 것은 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하이주는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팔았던 반면 당시 술 소비습관은 호프집 위주였다는 것도 실패 요인으로 꼽힌다. 근데 10년 뒤에는 그런 소비습관이 반대가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가.
소포모어 징크스, 여름수박
- 장점 : 여름을 대비한 수박 음료
- 단점 : 그냥 수박을 먹는 게 나았다
한국음료사에 ‘웅진식품’이 돋보인 것은 1995년 ‘가을대추’의 흥행 덕분이다(그전까지는 그저 찐). 가을대추의 성공을 맛본 웅진식품은 ‘계절+과일’조합의 음료를 내기로 했다.
그렇게 1996년 ‘여름수박’을 출시한다. 그리고 6개월도 되지 않아 사라졌다. 이미 한 번 써먹은 식상한 조합이기도 했고, 수박이 한국수박이 아니라 외국 워터멜론 향이었기에 거부감이 들었다는 후문. 그렇게 웅진식품은 아침햇살을 출시할 때까지 다시 조용히 어두운 자리로 사라져야 했다.
레벨 3. 이름이 어려워 부르지 못한 음료여
오란씨, 써니텐, 2% 부족할 때 등 잘 지은 이름의 음료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또한 비슷한 맛의 경쟁 음료들 사이에서도 기억하기가 쉽다. 만약 마시즘을 ‘마시즘’이 아닌 ‘단물’이라고 이름 붙였다면? 아아… 아직도 가끔 그런 악몽을 꾸곤 한다.
이건 음료야 비밀번호야? 187168
- 장점 : 외국인도 읽을 수 있음
- 단점 : 누구도 기억하기 힘듦
2003년 출시된 일팔칠일육팔을 아는가? 과연 글로벌 브랜드 코카-콜라답게 외국인도 읽을 수 있도록 숫자로만 음료의 이름을 붙인 게 아닐까? 아니면 만든 사람이 이과거나…
일팔칠일육팔은 청소년을 위한 성장 음료였다. 때문에 청소년들에게 설문조사를 해서 가장 이상적인 키를 남자 187cm, 여자 168cm라고 고른 것에서 유래했다. 문제는 이거 마시고 남자 187cm 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물론 나는 아니다.
감히 뜻을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말벌 100km
- 장점 : 이름이 튀긴 하네
- 단점 : 그래서 무슨 음료라고요?
2002년 롯데칠성에서 출시된 괴작 음료 ‘말벌 100km’다. 벌이 들어갔으니까 꿀물이 아닐까 싶은데 아미노산이 들어있는 스포츠음료라는 게 함정. 말벌이 (아미노산이 들어있는 로열젤리를 먹고) 하루 100km를 날아가기 때문에 지은 이름이라는데, 자신이 하루에 몇 걸음 걷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말벌이 얼마나 가는지 알 수 있을까?
광고는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장혁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무려 ‘42.195km를 뛰고 또 한 번 달리는 말벌 같은 사람’인데… 장혁, 마라톤, 말벌, 스포츠음료 어떤 키워드 하나 연결되지 않는 아무 말 대잔치처럼 들렸다는 게 함정.
레벨 4, 이 세상 음료가 아니다
새로운 음료를 고르는 것은 맥락을 따른다. 하지만 마신 음료를 또다시 마시는 것은 맛이라는 경험에 달려있다. 바야흐로 다양한 맛의 음료가 넘쳐났던 시기. 지코 같은 음료수는 명함도 못 내밀 괴작들이 여기 있다.
코리아 콜라, 탁시
- 장점 : 수정과와 탄산의 만남
- 단점 : 그냥 따로 마셔
90년대는 신토불이 열풍이 충만하던 때다. 1998년 콜라독립 815가 태극기를 두르고 코카콜라에 맞섰다면, 한국야쿠르트의 탁시(Tocsi)는 전통음료인 수정과에 콜라를 섞어버렸다. 콜라에 들어있는 카페인을 없애고, 콜라 시럽을 없애고, 곶감과 계피 등 천연재료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이걸 콜라라고 부를 수 있을까? 넘치는 애국심이 만들어버린 계피 맛 탄산음료.
20년이 지나도 안 통할 조합, 커피콜라 3형제
- 장점 : 커피 향 나는 독특한 탄산음료
- 단점 : 20년 뒤에도 안 통할 독특함
2017년의 괴작 ‘칸타타 스파클링’ 이전에 이 녀석들이 있었다. 1997년에 나온 CJ제일제당의 ‘볼카’, 웅진식품의 ‘해커스’, 일화 ‘카페콜라’다.
90년대는 탄산에 보리도 넣고, 우유나 배도 넣었을 정도로 실험정신이 풍부했다. 하지만 커피만은 기괴했다. 모두들 만들 때는 커피와 콜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마실 줄 알았겠지… 기대는 할 수 있다. 하지만 본인이 마셔봐야 한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던 것일까?
특이점의 결정체, 써니텐 치즈 아이스크림 맛
- 장점 : 없어져서 다행이다
- 단점 : 마신 사람들이 있다
식음료 사에서 오직 ‘파맛 첵스’만이 이 녀석에 비교될 수 있다. 치즈 아이스크림 맛이 난다는 충격과 공포의 탄산음료. ‘써니텐 치즈 아이스크림’이다. 물론 시기적으로 2008년도에 출시된 늦은 녀석이지만. 감히 90년대 실험정신의 완성판이 여기에서 펼쳐졌다고 부르고 싶다.
맛에 대해 어떻게 비유해야 할까. 밀키스를 마시는데 버터가 많이 들어간 느낌? 톡 쏘는 탄산이 굉장히 느끼하게 느껴지는 느낌? 한동안 후유증으로 신상 음료를 마시지 못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아아… 하지만 한때의 추억이었다. 지금은 다시 만나고 싶기도 하다. 나만 마실 수는 없잖아.
원문: 마시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