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으로 밥벌이하는 사람을 제외하고 평범한 현대인들에게 여행은 “어른들에게 허락된 몇 안 되는 실현 가능한 꿈”이다. ‘실현 가능’이란 단어를 덧붙이긴 했지만 분명 호락호락하지 않은 꿈이다.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고,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고, 돈과 시간이 있으면 체력이 딸린다. 떠날 그 날을 위해 돈을 모으고, 다리 힘을 기르고, 바쁜 시간을 쪼개는 것처럼 ‘애써야’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차근차근 계획하는 여행이 당연한 사람도 어느 날, 훅하고 ‘당신의 인생에 여행이 꼭 필요하다는 다급한 신호가 오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 외면하지 말고 당신의 인생이 보내는 시그널에 귀를 기울여 보자.
1. 손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을 만큼 무기력할 때
이유야 뭐가 됐든 사람의 인생에 있어 꼭 한 번쯤은 찾아오는 시기가 있다. 가볍게는 “노잼 시기”, 무겁게는 “무기력 대폭발 시기”라고 부르는 때 말이다. 몸과 마음이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떨어져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을 때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무기력 그로기”상태에 빠졌다고 해서 즉각 무리하게 벗어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 버텨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다만 무기력이 장기화될 때는 분명 문제가 된다. 삶이 그 상태로 그대로 굳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반등을 원한다면 온 사력을 다해 “무기력 그로기“ 상태로부터 탈출해야 한다. 신기하게도 환경이 바뀌면 사람의 마음은 비교적 쉽게 바뀐다. 물리적으로 다른 환경을 만드는 가장 어렵고도 쉬운 방법이 바로 여행이다. 낯선 환경에 내던져졌을 때, 신기하게도 사람은 신묘한 힘이 생겨난다.
여행이라는 것을 가겠다는 마음을 먹는 것부터가 무기력 탈출의 1단계이자 제일 어려운 고비를 넘긴 것이다. 꼭 닫힌 문을 열고 나와 목적지까지 가는 행위는 마음을 먹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다. 대단한 걸 하지 않고 숙소에 처박혀 있기만 해도 분명 효과는 있다. 익숙한 일상으로부터 퉁겨져 나와 나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당연했기 때문에 그 존재조차 몰랐던 것들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분주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한 발짝 떨어져 지켜보면서 일상의 가치와 의미를 되새긴다. 그래서 대단한 교훈이나 스펙터클한 경험이 없는 멀멀한 여행일지라도 여행 후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분명 조금 더 단단해져 있다.
2. 일상의 모든 것을 여행의 추억과 연결시킬 때
인천 공항에 내려 집으로 돌아가는 공항버스를 탈 때면 매번 그런 생각이 든다.
밤 12시 종이 땡 하고 친 후 재투성이 아가씨로 돌아온 신데렐라의 기분이 이렇겠지?
눈부시게 새하얀 호텔 침구에서 자고 일어나 멋진 곳을 구경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 일정을 마치면 호텔로 돌아와 말끔하게 정리된 침대에 다시 눕는 호사스러운 일은 이제 끝이다. 펑하고 사라진 호박 마차처럼 흔적도 없이 없어졌다. 나를 기다리는 것은 내 손으로 정리하지 않는 이상 계속 구겨져 있을 이불, 매일 보는 식상한 얼굴들, 지겨운 음식들.
새털 같이 많은 인생의 날들 중 고작 며칠뿐인 여행이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 이유는 짧지만 강렬했고 달콤했기 때문이다. 일상에 파묻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유독 달콤했던 여행의 기억들이 되살아난다.
TV 여행 프로그램에서 내가 걸었던 그곳이 나올 때, 한국의 외국 음식 전문점에 갔는데 현지에서 먹었던 맛과 차이가 날 때, 한국에서도 비슷한 풍광을 봤을 때 생각한다. 지금 이곳을 떠나 낯선 곳에 서 있는 생기 넘치는 나를 다시 만나기 위해 또 여행을 떠난다.
3. 인생의 브레이크가 필요할 때
엘리자가 말했어요.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진 것 같아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난다는 거니까요!
〈빨강머리 앤〉에서 주근깨 소녀 앤이 했던 말이다. 긍정력 충만한 앤에게는 생각대로 되지 않는 세상이 멋진 일이겠지만 평범한 대다수의 사람의 생각은 좀 다르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 때문에 내 인생이 내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을 때 몹시 당황스럽고 불안해진다. 게다가 삶에는 “흐름”이라는 게 있어서 내가 벗어나려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의 의도와는 다른 결과로 향해 갈 때가 있다.
대세를 거스를 수 없을 때 방향은 바꾸지 못하더라도, 잠시 몸과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 바로 여행이다. 번뇌를 초월한 성자(聖子)가 아닌 이상에야 인생의 소용돌이 안에서 내면의 평화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잡생각이 많아질 때는 최대한 단순하게 살아야 한다. 여행을 떠나게 되면 매일매일의 당면 과제를 해결해가는데 온 신경을 쓴다.
공항에 도착하면 비행기를 타야 하고, 비행기에서 내리면 숙소까지 찾아가야 한다. 숙소에 도착하면 다시 밥을 먹어야 하고, 다시 여행의 목적지를 찾아가는 일이 반복된다. 낯선 땅에서 몸만 컸지, 유아 수준의 언어 실력과 인지능력을 가지고 여행기간을 버텨 내야 한다. 일상에서 별 것 아닌 일들이 별 것이 되는 것이 바로 여행이다. 당연했던 것들을 무던히 해내는 자신을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꽤 나도 대단한 능력자라는 걸 알게 된다.
그렇게 너덜더덜해진 몸과 마음을 추스르면 이제 진짜 나만의 시간과 마주한다. 뜨거운 햇살을 피해 시원한 바람이 부는 그늘 밑에 앉아 크게 호흡을 한 번 내쉬어본다. 내가 걸어왔던 길과, 앞으로 걸어갈 길을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당신의 인생을 멈추게 만든 브레이크가 스르르 풀릴 것이다.
원문: 호사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