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타인데이에 초콜릿을 주는 문화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습니다. 대개는 이것이 일본 제과업체의 판촉을 위해 만들어진 문화에 불과하기 때문에 상업적이며 왜색이 짙은 문화라고 비판을 합니다. 사실일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실입니다. 그런데 국내에는 일본의 모리나가 제과가 1960년부터 판촉 목적으로 발렌타인 초콜릿 문화를 정착시켰다는 잘못된 정보가 많이 돌아다니더군요.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시작은 고베 모로조프 제과: 감사를 전하는 행사
황제 크라우디우스 2세가 전쟁중에 결혼을 금지시킨 규율을 깨고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했다가 처형당한 성 발렌타인의 기일을 기념하기 위한 날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있는 발렌타인데이의 유래입니다. 서양에서는 이 날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주는 풍습이 오래 전부터 이어져 왔습니다.
이러한 발렌타인데이의 풍습은 20세기 초반에 일본에 들어와 있던 선교사들을 통해서 일본 내에서도 서양문물에 밝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상당히 붐을 이루게 됩니다. 이러한 붐에 맞춰서 1936년 고베의 ‘고베 모로조프 제과’라는 곳에서 “고마운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서 발렌타인 초콜릿을 전합시다”라는 이벤트를 발렌타인데이에 맞춰서 시행합니다.
이것이 발렌타인데이에 판촉 목적으로 초콜릿을 전달하는 이벤트의 유래가 됩니다. 하지만 이 판촉행사는 다분히 일본에 거주하는 서양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고, 당시에는 너무 시대를 앞서간 탓인지 그다지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메리 쵸코: 여성이 남성에게 주는 문화를 정착
전쟁 이후에도 일본 내에서는 서양문물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발렌타인데이가 여전히 깊이 침투해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시장을 노리고 1958년에 도쿄 아오야마에 있던 ‘메리 쵸코’라는 양과자점에서 ‘메리의 발렌타인 쵸코’라는 상품을 만들어 신주쿠 이세탄 백화점 등에서 판매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때 팔린 초콜릿은 단 3개였다고 합니다. 그만큼 발렌타인데이는 대중에게는 침투해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에 메리 쵸코에서는 “남녀가 서로 선물을 주고 받는다고 하면 솔직히 선물 받고 좋아하는 건 여자고, 돈 내는 건 남자잖아. 이걸 역발상으로 마케팅해보면 어떨까?”라는 관점에서 “발렌타인데이에는 여성이 남성에게 초콜릿을 선물해요”라는 캠페인을 실시합니다. 이 캠페인은 약간의 성공을 거두지만, 역시 사회적인 붐을 형성하지는 못합니다.
반전: 여성해방 운동이 발렌타인 초코렛을 살리다
이러던 것이 1950년대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확대된 여성해방운동인 ‘우먼리브 운동’이 1963년경부터 일본에 상륙합니다. 당시만 해도 일본은 남녀차별이 심하고 가부장적인 사회였는데, 1960년대 대학가를 중심으로 퍼지던 전공투운동의 영향으로 일본의 고학력 여성들 사이에서는 페미니즘이 크게 퍼지게 됩니다.
이에 따라서 “여자도 적극적으로 남자에게 선물을 주고 고백할 권리가 있다”라는 관점에서 발렌타인 초콜릿이 이 당시의 전공투 운동과 우먼리브 운동의 영향을 받은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하게 됩니다.
1950년대 후반에 등장하기 시작한 발렌타인 초콜릿을 상업적인 판촉 행사로 처음 전개한 것은 모리나가 제과로 1960년에 발렌타인 데이 판촉행사를 한 것이 대기업이 참여한 최초의 발렌타인 데이 판촉 행사였습니다. 한국에는 아마 이것이 와전되어서 발렌타인데이에 여성이 남성에게 초콜릿을 전하는 문화가 일본의 모리나가 제과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전해진 것 같습니다.(한국어 위키페디아에도 그렇게 나와있더군요. 물론 와전된 정보입니다.)
모리나가 제과는 1960년에 신문광고를 통해 “사랑하는 사람에게 발렌타인 데이에는 초콜릿을 보내요”라는 광고를 게재하고 일부 관련 상품도 발매를 했지만,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이 1960년의 캠페인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자료는 찾기 힘들군요.
이것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때까지만해도 발렌타인 초콜릿은 연인에게 고백하기 위해서 여성이 남성에게 전하는 물건이었기 때문에 한사람이 살 수 있는 상품은 1개 뿐이었고, 그만큼 단가가 높은 초콜릿을 샀습니다. 그래서 대기업의 기성품보다는 백화점에서 판매하는 전문 제과점의 고급품이 주류였기 때문이라고 추측해봅니다.
1960년에 모리나가는 ‘역 다스(逆ダース)’라는 자신들의 대표 상품인 다스(ダース)의 상표를 거꾸로 인쇄한 한정상품을 판매하기도 했는데요. 이 ‘역 다스(逆ダース)’ 혹은 역 쵸코(逆チョコ)는 여성이 남성에게 초콜릿을 주는 문화를 오히려 반대로 남성이 여성에게 초콜릿을 주자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상품 기획으로 이후에 화이트데이 행사에 영감을 주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소니: 우정 초콜릿을 탄생시키다
1960년대 후반에 이르면서 발렌타인데이 초콜릿은 일본의 지식층 사이에서는 대중적인 문화로 정착합니다. 하지만 발렌타인데이 초콜릿에는 몇가지 제약이 존재했습니다. 우선 여성이 미혼이어야 하고, 사귀는 남성이나 고백하려고 하는 남성이 있어야 하고, 그러한 남성이 있다고 해도 여성이 구매할 수 있는 초콜릿의 총량은 1인당 1개입니다.
이런 제약 때문에 당시에는 고급스러운 발렌타인 초콜릿이 백화점에 즐비했습니다. 이 당시만해도 발렌타인데이 초콜릿을 준다는 것은 남성에게 고백을 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다소 비싼 초콜릿도 잘 팔렸습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비참한 현실은 사귀는 여성이 없는 남성의 경우 초콜릿을 받지 못해 상대적 박탈감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죠. 발렌타인데이의 상대적 박탈감은 생각보다 심각했던지 젊은 엘리트들로 구성된 당시 일본의 대기업에서는 이게 사원들의 사기 저하에 상당한 영향을 준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1968년에 소니의 창업자 중 한명이었던 모리타 아키오(盛田昭夫) 씨가 소니계열의 수입잡화점을 중심으로 발렌타인데이에 초콜릿을 구매해서 주변 남성들에게 선물하는 캠페인을 유행시킵니다. 이른바 “의리 쵸코”의 탄생입니다.
소니계열에서 전개한 초콜릿 선물하기 캠페인은 당연히 일본의 대형 제과업체들의 눈에도 괜찮은 사업 아이템으로 보였습니다. “이거 회사 다니는 여직원이라면 같은 부서 남자들 머릿수만큼 구매하는 초콜릿의 개수가 늘어나는거 아냐?”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비교적 값싸게 구매할 수 있는 부담 없는 의리 쵸코용 상품들입니다.
의리 쵸코는 처음 타깃층이 OL이었기 때문에 OL들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했고, 1970년대 중반에 이르면 상당히 대중적인 문화로 자리잡게 됩니다.
재미본 업계들이 힘을 모아 화이트데이를 탄생시키다
여기에 제과 회사들은 “이러면 여자밖에 상품을 안 사는데, 남자도 뭔가 물건을 사게 할 수 없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직 발렌타인 데이가 대중적으로 침투하지 못했던 1973년에 마시멜로 제조 업체였던 에이와(エイワ)가 대형 제과업체였던 후지야(不二家)와 협력해서 발렌타인데이 1개월 후인 3월14일을 ‘화이트데이’로 설정해서 마케팅을 전개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고 사라집니다.
1978년에는 후쿠오카시에 있는 제과점이었던 ‘이시무라만세이도(石村萬盛堂)’에서 3월14일에는 발렌타인데이에 초콜릿을 받았던 남성이 여성에게 응답하는 의미로 마시멜로를 선물하는 “마시멜로데이 캠페인”을 전개합니다. 이것은 “너에게서 받은 마음(초콜릿)을 내가 부드럽게(마시멜로로) 감싸줄게”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었습니다. 마시멜로데이 캠페인은 처음 시작한 1978년에 크게 호응을 얻어서 이듬해인 1979년에는 전국의 쿠키점, 캔디점 등을 중심으로 폭넓게 확대됩니다.
이런 붐을 하나의 문화로 정착시키자는 취지에서 일본의 ‘전국엿과자공업협동조합(全国飴菓子工業協同組合)’에서 공식적으로 1980년 3월14일을 기점으로 ‘화이트 데이’를 만들게 됩니다. 전국엿과자공업협동조합에서는 화이트데이의 유래에 대해서는 병사의 자유결혼금지정책을 어기고 결혼하려고 했던 남녀를 구하기 위해 발렌티누스 사제가 순교하고, 그 후 3월14일에 그 커플이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다는데 의미를 둔다고 설명을 합니다.
하지만 이 화이트데이는 이후 1973년에 이미 ‘화이트데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던 후지야와의 상표권 분쟁 때문인지 이후에 이름을 일시적으로 ‘캔디의 날’로 바꾸기도 합니다만, 다시 공식적으로 화이트데이로 바뀌어서 지금도 전국엿과자공업협동조합에서 캠페인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발렌타인 데이라는 문화 자체가 지식인층 사이에서만 유행하던 것으로 대중화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일본에 완전히 정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1960년대까지 전개된 대부분의 발렌타인 데이 캠페인들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겁니다.
발렌타인 데이의 판촉 캠페인이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기 시작한 것은 일본에 자본주의가 완전히 정착된 1970년대 이후에 일입니다. 그리고 일본 제과업계에서 대대적으로 TV코머셜 등을 통해서 발렌타인데이를 홍보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이후의 일입니다.
일본의 고급초콜릿 시장은 중소규모의 노포들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의리쵸코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발렌타인데이 캠페인은 작은 규모의 제과점들이 입점한 백화점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대형 제과업체가 발렌타인데이 판촉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중반 이후입니다.
총정리: 대체 누가 원조인가?
일본에서는 발렌타인 초콜릿의 유래에 대해서 각자 자기들이 원조라고 주장하는 곳이 몇군데 있습니다. 정리해보자면 이렇습니다.
・고베 모로조프 제과: 1936년의 발렌타인 데이 초콜릿 판촉 행사를 근거로 내세움.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되었기 때문에 발렌타인 데이에 초콜릿을 전하는 문화는 고베 모로조프 제과가 제안한 것이 맞지만, “여성이 남성에게 준다”는 개념이 들어 있지 않아서 원조로 보지 않는 견해가 지배적.
・메리 초콜릿: 1958년에 발렌타인 초콜릿을 만든 것을 최초로 보는 의견. “여성이 남성에게 초콜릿을 준다”는 개념까지 명확하게 만들었고, 이후 발렌타인 데이 초콜릿의 형태가 대부분 메리 초콜릿의 판촉 행사를 본뜬 것이기 때문에 현대적인 의미의 원조로 인정하고 있음. 현재로서는 공인된 원조는 이곳.
・모리나가 제과: 1960년에 벌인 판촉행사를 근거로 자신들의 원조라고 주장함. 하지만 시기적으로 고베 모로조프 제과와 메리 초콜릿보다 늦고,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오지도 못해서 인정 받지 못함. 한국에서는 어째서인지 이 의견이 주류 의견으로 와전되어 있음.
・이세탄 백화점: 1965년에 실시한 발렌타인 페어가 현대적 의미에서 발렌타인 초콜릿 보급의 시발점이었다는 주장. 당연히 인정 받지 못하는 의견.
・소니그룹: 창업자인 모리타 아키오 씨가 자사의 무역 잡화상들을 중심으로 의리 쵸코의 구매를 촉직시킨 것을 붐 형성의 시작으로 보는 의견. 원조라고는 할 수 없지만, 1970년대부터 전개되는 대기업의 판촉 행사의 큰 좌표를 제시한 것만큼은 분명함.
앞서 이야기했지만 1960년대에도 발렌타인 초콜릿은 대중적인 문화가 아니었으며, 일본의 초콜릿 소비는 1968년에 정점을 찍고 급감하기 시작해서 1970년대 초반까지는 발렌타인 초콜릿이 그다지 대중적으로 정착되지 못합니다. 발렌타인 초콜릿이 대중화 된것은 1970년대 중반 이후의 일입니다.
오늘날 일본에서는 발렌타인데이 판촉 행사 기간에 팔리는 초콜릿의 양이 1년 동안의 초콜릿 판매의 1/4에 이른다고 합니다.
PS. 2월14일은 안중근 의사가 사형 선고를 받은 날이기도 합니다.(1910년 2월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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