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변호인>과 노무현의 실제 모습
영화 <변호인>의 말미에 ‘송변’이 달려드는 전경들 앞에서 시민 동지 여러분을 부르짖으며 용감하게 맞서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 속에서 송 변호사는 구속되고 그를 변호하고자 수십 명의 변호사가 출석하는 것으로 영화가 마무리되는데 이 부분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다. 송변 (노무현)은 그날 구속되지 않는다.
1987년 2월 7일 부산에서는 부마항쟁 이후 최대를 헤아리는 인파가 고문으로 숨져간 부산의 아들 박종철을 추모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고 그 선봉에 선 세 명의 변호사가 연행된다. 김광일, 노무현, 문재인. 여기서 검찰이 칼을 갈고 있던 것은 노무현이었다. 저놈의 자식 구속을 시켜서 부산지역 민주화운동 세력에게 본때를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검찰은 의기양양하게 구속영장을 신청하지만 노무현 변호사의 사법연수원 동기이자 당직 판사였던 한기춘에 의해 거절당한다. “변호사로서 주거가 분명하고 도주의 우려가 없고 증거 인멸도 못하는데 왜 구속입니까?”
이쯤해서 머쓱해진 머리를 긁으며 물러섰으면 검찰 체면도 그다지 깎이지 않았을 텐데 그러기에는 노무현이 미워도 너~~~무 미웠던 검찰은 상급인 부장판사에게로 달려간다. 그러나 부장판사도 구속영장에 사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거기서 포기하면 찌질하게 끈질기기로는 세계 정상급인 대한민국 검찰이 아니다. 이번엔 부산지검 특수부장이 직접 나섰다. 이번의 목적지는 수석부장판사. 그것도 수석부장판사의 사무실이 아니라 수석부장판사 조수봉의 집. 이쯤 되면 판사들도 없던 오기가 생길 법하다.
조수봉은 당연히 거절했고 그 뒤를 이어 홍일표 부장판사도 퇴짜를 놓는다. 검찰은 이제 더 이상 찾아갈 곳이 없었고 결국 노무현을 풀어주게 된다. 그것도 법정 신병 처리 기간인 48시간을 훌쩍 넘긴 뒤였다. 아마 노무현 변호사는 “이러면 안되는 거잖아요.”라며 툴툴거리면서 유치장을 나섰을 것이고.
박종철의 죽음이 녹인 시민들의 두려움
1986년 가을의 건국대 농성 사태 이후 학생 시위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눈에 띄게 차가왔다고 전한다. 시위에 나선 학생들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일도 흔했고 심지어 시민들이 학생을 잡아 경찰에 넘기기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 추운 겨울의 한가운데에 박종철이 죽었다. 그리고 2.7 추도회는 그 억울한 죽음 이후 처음으로 열리는 대규모 집회였다. 전국적으로 7만 명의 경찰이 동원돼서 원천봉쇄했다. 서울의 명동성당으로부터 부산시내 도심의 절 대각사까지 행사가 예정된 모든 곳은 겹겹이 봉쇄되고 차량까지도 막았다.
덕분에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게 된 신랑 신부측은 “결혼식을 00호텔로 변경합니다.” 팻말을 들고 울상을 지어야 하는 일도 있었고, 경찰들은 대규모 연행 사태를 대비하여 유치장에 있던 잡범들을 서둘러 처리했다. 경찰을 지휘할 검사들에게도 비상근무령이 떨어졌고 각 대학의 교수들은 ‘가정방문’을 통해 학생들에게 데모하지 말라고 통사정을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행여 학생들이 모여들까 덕수궁도 문을 닫았다. 추도회의 행동 지침 하나로 최초로 제기된 차량 경적 시위를 막기 위해 버스 회사들은 경적기를 제거해 버렸다. 부산의 경우 봉쇄는 더 혹독해서 유나백화점을 비롯, 무려 500여 곳의 가게들이 문을 닫을 수 밖에 없는 지경이었다.
둘러보면 전경의 방패벽이 탑처럼 놓았고 내려다보면 새까만 철모들과 녹색의 군복의 바다였다. ‘원천봉쇄’의 위세는 겨울의 칼바람조차 멱살을 잡을 듯 도도했다. 그 저지를 뚫고 뭘 어째 본다는 사실 자체가 불가능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사람들은 갑갑했지만 숨도 크게 쉴 수 없었고 울컥했지만 내뱉지 못하고 다시 삼켜야 했다.
몸으로 부딪히며 민주주의의 길을 열어간 이름 없는 시민들
그 스산한 2월 7일 최초의 연행자가 발생한다. 개미 새끼 한 마리도 통과 못시킨다는 기세로 늘어서 있던 명동성당 앞 전경의 방패벽을 향해 한 대학생이 울부짖듯 구호를 외치며 몸을 던진 것이다. 화염병도 돌도 쥐지 않은 그야말로 육탄 돌격이었다. 종철이를 살려내라고 외쳤을까. 전두환 물러가라였을까. 이 맹랑한 돌격은 즉시 진압돼 줘 터지면서 질질 끌려갔다.
다음으로 나선 건 승려 두 명이었다. 스님이 성당에 웬일이냐는 경찰 앞에서 막무가내로 들어가겠다고 고집하던 승려들은 곧 버스 안으로 끌려들어간다. 이 모습을 지켜본 성당 안의 가톨릭 신도들이 흥분했다. 그들은 몰려나와 경찰에 욕을 퍼부으며 분노를 터뜨렸다. 이 개새끼들아.
부산에서도 비슷했다. 서울에서 한 대학생이 육탄으로 방패벽을 들이받던 그 시간에 몇 명의 청년들이 대회장소인 대각사에 들어가겠다고 몸싸움을 벌이다가 최루탄을 뒤집어쓴다. 오후에 시작된 시위에서 노무현 변호사와 김광일 변호사가 연설을 시작하고 경찰이 이를 덮치자 멀거니 지켜보던 군중들은 시위대로 그 색깔을 바꾼다.시위를 주도한 사람조차 놀랄만한 사람들의 변화였다.
“그동안 많은 시위와 집회를 열어 봤지만 억압공간에서 시민들의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날도 경찰이 워낙 강력하게 원천 봉쇄하려 했기 때문에 평소와 같이 일상적인 시위로 그칠 줄 알았다. 그러나 시민들의 반응은 우리의 움추린 예상을 훨씬 앞질렀다. 폭발적인 시위양상을 보고 나중에는 두려움조차 느끼기 시작했다.” (김재규 당시 부민협 사무국장)
경찰의 ‘원천봉쇄’의 방죽에는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이날 부산 남포동 일대에는 수천, 거의 만 단위의 사람들이 한데 엉켜 노래하고 소리 지르고 욕을 퍼붓고 뛰어다니는 장관이 부마항쟁 이후 8년만에 재연된다. 그 와중에 노무현을 비롯한 수백 명이 연행됐다.
미칠 듯한 갑갑함 속에서 그렇게 몸으로 문을 열어가는 사람들은 항상 있었다. 그들을 안타까이 쳐다보고 때로는 모질게 외면하다가도 끝내는 그 철벽에 부딪치는 몸들을 저버리지 않는 사람들도 항상 있었다.
우리가 <또 하나의 약속>을 봐야 하는 이유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을 둘러싼 극장들의 이유를 알 수 없는 (사실은 뻔한 이유의) 보이코트와 상영 방해 앞에서, 예매율 1위의 영화를 돼먹지도 않은 이유로 마지못해만 걸어 두고 그조차 줄이고 여차하면 질식시킬 준비를 하고 있는 오늘의 이 슬픈 참상 속에서도 그럴 것이다.
삼성이라는 거대공룡에 매달렸던 택시 기사 아저씨가 자신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를 더 많은 사람들이 보게 해 달라고 1인시위를 벌이는 모습에서 나는 다시 한 번 전경들의 방패벽을 향해 돌진했던 무명의 대학생을 떠올린다.
그 뒤를 이었던 스님들, 세상에 이런 법은 없지 않냐며 호응했던 가톨릭 신자들, 백화점마저 문을 닫게 한 공권력 앞에서 씨바 와 이라는데? 배를 내밀던 사람들의 기억과 어제 <또 하나의 약속>의 긴 엔딩을 장식하던 수많은 크레딧들은 겹쳐지고 어우러지고 하나가 된다.
그리고 변호사 한 명을 잡아가두기 위해 판사 집까지 찾아가서 지랄을 떨던 검찰의 모습, 백화점까지 닫아 가며 봉쇄를 고집하던 당국의 꼬락서니는 영화 하나 사람들에게 보여 주지 않기 위해 별의 별 꼼수를 부리고 있는 이들의 오늘과 역한 냄새를 피우며 맞물리고 있는 것도 같고.
<또 하나의 약속> 영화는 훌륭했다. 신파조로 흐르지도 않았고 지나친 도식성과 작위적인 연출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 영화의 수준을 떠나서 이제 이 영화를 보는 것은 하나의 실천이 될 것 같다.
약속하건대 나는 이 영화를 두 번 더 볼 것이다. 악착같이 찾아 볼 것이다. 저 영화를 만든 사람들처럼 육탄으로 저들에게 맞서지는 못해도 “이 찌질한 개새끼들아. ” 욕이라도 하는 사람들 사이에라도 끼려면 그 정도 실천은 해야 할 것 같다.
woolrich outletnever love sleeping that mu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