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호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다. 들어보셨다면 여성 분일 확률이 무척이나 높고, 그렇지 않다면 아마 남성 분일 가능성이 높으시리라. 21호는 국내에서 거의 기준치 취급을 받는 미백화장품들의 피부 호수다.
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이 21호라는 기준이 한국 여성 대부분의 실제 피부톤보다 지나치게 밝다는 점이다. 그래서 목을 경계로 피부 톤이 너무 차이가 난다며 화장이 아니라 변장이라는 식의 비난이 횡행하기도 하는데, 한 번은 이를 두고 ‘서양인의 외양을 따라 하려는 신(新) 사대주의’라는 소리를 하는 것도 봤다.
그런데 사실 흰 피부 선호는 그리 최근의 일도 아니며 동양에서만 나타나던 현상도 아니다. 흰 피부가 매력적이라는 인식은 인류가 일종의 계급사회를 이루고부터 시작되었다. 요즘이야 블루컬러라 불리는 육체노동자도 실내 공장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지만, 전근대 시기의 노동은 곧 농사와 동의어에 가까웠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계급이 낮은 사회 구성원들은 따가운 햇볕 아래에서 하루에 열댓 시간 씩을 일하며 피부가 거무스름하게 변하기 십상이었다.
반면 상류 계급은 나름의 여가생활을 즐기며 하루의 대부분을 실내에서 보내니 피부가 탈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하얀 피부는 피부가 탈 정도로 바깥에서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계급의 일원이라는, 일종의 지위재가 됐다. 얼굴에 붙이고 다니던 샤넬백인 셈이다. 그리고 샤넬백도 그랬듯 짝퉁이 범람하기 시작했다.
동양의 여성들은 얼굴을 하얗게 꾸미기 위해 곡식의 가루, 그중에서도 쌀가루를 주로 사용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시라. 현재 사용되는 파운데이션도 화장이 잘 먹지 않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그냥 쌀가루 간 것이 피부에 얌전히 붙어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접착력을 만들기 위해 일부는 꿀에 가루를 개어서 썼고, 일부는 무지에 의해 잘못된 선택을 했다. 납 가루를 거기 섞은 것이다.
납(lead)은 대표적인 중금속의 하나다. 체내에 흡수되면 쉬이 빠져나가지 않는 것은 물론, 지속적인 축적은 신경계에 문제를 일으켜 정신이상이 발생하게 만드는 무서운 물질이다. 그런데 무척 안타깝게도, 식초 처리를 한 납 가루는 피부에 딱 달라붙어 아름다운 광택을 냈다.
서양의 경우 아예 납 가루와 또 다른 중금속인 비소를 섞어서 만든 가루를 피부 미백에 사용했고, 그 결과 많은 여성이 납 중독과 피부괴사로 고통받다 사망했다. 납의 위험성을 미처 인지하지 못해서 발생한 불행한 일인 셈이다. 그런데 요즘 비슷한 일이 다시 반복되고 있다. 미용 목적으로 사용되어 건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물질, 식욕억제제다.
식욕억제제의 부작용과 폐혜
현재 국내에서 시판되는 식욕억제제의 종류는 크게 나눠서 두 가지다. 하나는 세로토닌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의 양을 늘려주는 방식이다. 세로토닌의 양이 평소보다 늘어나면 식욕이 억제되는 효과가 나타나게 되는데, 인체의 자연적인 세로토닌 제거를 억제해 인위적으로 뇌 속의 세로토닌 농도를 높이는 것이 이쪽 계열 식욕억제제의 작동 방식이다. 문제는 여기에 사용되는 의약품이 대표적인 우울증 치료제 성분인 플루옥세틴(fluoxetine)이라는 것이다.
흔히들 처음 나온 제품인 프로작(Prozac®)으로 부르는 이 약은 우울증에 가장 많이 쓰이고, 그만큼 안전성도 입증받은 의약품이긴 하지만 부작용이 전혀 없는 약이 아니다. 우울증 치료효과가 그보다 훨씬 뛰어나니 사용될 뿐이지, 다이어트와 미용 목적으로 감당하기엔 부작용이 크다는 것이 문제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이런 다이어트용 식욕억제제를 처방하는 병원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운영하는 곳이 아닌, 다른 전공의 의사가 운영하는 곳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사람들은 정신과 전문의에 비해 해당 의약품의 용량이나 부작용 등에 대해 제대로 수련을 받았을 가능성이 낮고, 가장 심각한 부작용인 자살충동 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할 가능성도 크다.
우울증 환자의 치료를 위해 저 약물을 사용할 때도 세심하게 환자 상태를 점검하는 과정이 필수적인데, 임의로 복용을 중단하기도 하는 미용목적 환자 손에 저 약을 들려주는 것은 그냥 적당히 약 처방해서 돈만 벌겠다는 악질적 행위에 가깝다.
식욕억제제의 두 번째 종류는 신경흥분제 계열의 약물들이다. 다들 그런 경험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실 테다. 바짝 긴장해서 무언가에 몰두하는 중에는 배고픈 줄을 모르다가, 집중하던 일이 마무리되면 급격히 배가 고파지지 않던가. 이를 응용해 인위적으로 신경을 흥분시키고 그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식욕을 억제하는 방식의 식욕억제제가 펜터민이나 펜디메트라진 성분의 약들이다. 다이어트 한약이라고 불리는 마황이 들어간 한약도 이 분류에 속한다.
그냥 조금 업 된 상태로 지내면 되는 것 아니냐는 안일한 생각을 하셨다면, 이 약은 의존성이 있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다. 어떤 경우는 한 달 정도만 복용해도 의존성이 생기고, 보통 세 달 이상 복용하면 의존성이 생겨 한국 식약처에서도 3개월 이상 복용하는 것은 자제하라는 권고를 한다. 그런데 세 달 약 먹으면서 체중 줄인 사람이, 세 달이 지난 이후에는 약을 먹지 않아도 체중 조절이 될까?
결국은 약을 끊었다가도 다시 처방을 받고, 나중에는 의존성이 생겨 끊고 싶어도 자의로 끊기가 힘들다. 게다가 이런 약들은 지속적으로 신경을 흥분상태로 유지하는 역할을 하므로, 복용하는 사람의 정신 상태도 변화시킨다. 해외의 사례에서는 심각한 인지기능 저하가 발생하기도 했고, 국내의 경우 을지대 의과대학에서 2013년에 보고한 사례가 있다. 해당 논문의 일부를 옮기자면 이렇다.
내원 4일 전부터는 자신의 몸과 주변에 검은색 벌레가 보이고 벌레가 기어 다니는 느낌, 매캐한 냄새와 찍찍거리는 소리가 난다고 호소하였다. 이러한 증상으로 환자는 머리카락과 옷을 자주 털고 장시간 샤워를 하고 불안, 초조해하여 보호자와 함께 외래 방문 후 평가 및 치료 위해 안정병동에 입원하였다.
환자는 정신과적 기왕력 및 가족력은 없었고 물질 의존과 남용의 과거력도 없었다. 입원 당시에 생체징후는 정상범위였고 신체검진, 혈액검사, 뇌 자기공명, 뇌파검사, 마약류 약물 6종 검사를 시행했으며 모두 정상 소견을 보였다. 의식은 명료하였고, 지남력과 인지기능은 정상이었으며, 벌레에 대한 환청, 환시, 환후, 환촉이 있었다. 입원 2일째까지는 벌레에 대한 환각증상으로 장시간 샤워를 하고 환의를 자주 갈아입는 모습이 관찰되었다.
Quetiapine 150 mg을 경구투약하면서 경과를 관찰했고, 입원 3일째부터는 환각 증상을 더 이상 호소하지 않았으며, 입원 10일째에 퇴원하였다. […] 그로부터 5개월 후인 2012년 11월, 환자는 내원 2개월 전부터 귀신이 자신의 몸에 들어와 자신을 조종하고 사람들의 미래가 보이며 귀신이 말하는 소리와 냄새가 난다는 것을 주소로 보호자와 함께 외래에 다시 방문하였다.
- 을지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건강의학교실, 윤지애·박우리·유제춘·최경숙, 2013
이게 과연 미용 목적의 다이어트 약으로서 감당할 만한 부작용일까? 이런 내용을 보면 대체 왜 이런 약을 식약처에서 시판 허가해줬는지가 좀 궁금해지실 테다. 식약처가 다국적 제약회사의 로비에 굴복했다느니, 국민을 정신병자로 만들려는 음모라는 식의 주장은 접어두시라.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원래 해당 의약품은 미용 목적으로의 다이어트 용도로 개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만인에 대한 차별적 시선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과는 별개로, 비만은 신체적 질환의 일종이다. 비만은 고혈압의 위험을 높이고, 그로 인한 심혈관계 질환의 위험도 높이며, 당뇨 등의 대사성질환도 유발할 수 있다. 외양적인 호오와는 무관하게 비만 환자들은 체중 조절이 필요하고, 이걸 자의적으로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의약품이나 수술적 요법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렇기에 그런 중증 비만환자들을 돕기 위해서 식욕억제제가 개발된 것이다. 병적인 비만으로 인해 유발될 다른 질병들을 막기 위해 그 정도의 부작용을 감수하는 것은 benefit-risk 평가를 통해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 약이 의학적으로 비만이라고 볼 수 없는 환자들에게 사용되고 있으니 문제가 생긴다. 한국의 경우, 고도비만은 대략 BMI가 30 이상인 사람을 말한다. 한국 남성의 평균 신장이 175cm 정도이니 고도비만이 되려면 93kg 정도는 쪄야 하고, 한국 여성의 평균 신장이 162cm 정도이니 80kg 정도의 체중은 되어야 한다. 그 이하에서는 운동과 식이조절을 통해서 체중감량을 하는 것이 맞고, 저 정도 체중이 되어야 의약품이나 수술의 도움을 받는 게 리스크에 비해 이익이 크다는 말이다. 개인의 주장이 아니라 식약처가 2010년에 발간한 <식욕억제제 사용 가이드라인>에 나오는 기준대로 쓴 거다.
과거의 비극을 상기해보시라
우리는 하얀 피부를 얻기 위해 납을 피부에 바르던 사람들의 최후를 안다. 식욕억제제라고 크게 다를 것은 없다. 잘 쓰면 부작용 없이 살을 뺄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은 그 안에 날카로운 가시를 품었다. 일부 의사의 탐욕에 의해, 혹은 사회의 차별적 시선에 의해 식욕억제제를 복용하려는 유혹을 느끼는 분이 계시다면, 과거 유럽 여성들의 비극을 한 번 상기해보시면 좋겠다.
원문: Coldtongue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