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란 자신과 다름을 견딜 수 없는 이들을 일컫는다. 그들은 자신과 다른 취향, 다른 윤리기준, 다른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이들이 단지 존재하는 것만도 참을 수가 없다. 자신과 다른 이들의 존재 자체를 곧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 모독이라 느끼고, 그로부터 박탈감과 증오심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꼰대가 ‘자기 자신’이라 느끼는 것은 자기 안에 새겨진 폭력을 지시한다. 그는 자기 안에 새겨진 폭력이 모독당하는 걸 견딜 수 없다. 그가 세월을 거치며 당해온 그 폭력이야말로 자신의 존재를 떠받치는 유일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가 당했던 폭력, 가부장질서의 억압, 편견과 선입관의 강요, 획일화된 윤리기준과 인생관의 요구는 그를 지금의 ‘자기 자신’으로 만들어놓았다. 그는 자신의 내적인 소질, 진정한 취향, 자기만의 흐름에 따른 삶, 스스로 정립한 기준 등을 배척당한 채 살아왔다. 대신 집단의 논리에 따라 강요된 삶을 살아왔고, 그로 인해 만들어진 자기 삶의 역사가 다른 이들에게도 강요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내가 당한 폭력은 너도 당해야만 한다.’ 그것이 꼰대의 본질이다.
물론 친절한 사람의 조언은 꼰대의 충고, 지적, 강요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조언은 타자를 자기의 획일화된 기준에 포섭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타자의 입장에 서서 자신을 지우고 그와 하나가 되어 함께 고민하는 일이다.
조언하는 자는 상대를 자기의 기준에 맞추어 자신의 편견을 강화하려는 지배의 욕망을 지닌 게 아니라, 정확히 그와는 반대로, 자기를 삭제하는 희생, 그로써 오히려 자기가 조언하는 상대방으로부터 박탈감마저 느낄 수 있는 상태를 자처한다. 비록 나의 삶은 보잘것없지만 그래도 당신의 입장에서 같이 생각해보고 당신이 나아갈 수 있는 아름다운 길의 여정을 도와주고는 물러나는 것이다.
꼰대는 자기와 다른 기준을 가진 이들을 비난하면서, 동시에 그에 대한 증오심을 품고 집착한다. 그가 자신의 기준을 거절하는 걸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꼰대는 나아가 자신과 같은 기준을 가진 이들과 연대를 형성하여, 다른 기준을 가진 이들을 끊임없이 배척하며 자신의 기준(폭력)을 강화해야 안도한다.
반면 자신과 다른 기준을 가진 이들에 비교적 무심하여 그저 지나칠 수 있는 사람은 꼰대보다 모든 면에서 나은 사람이다. 그는 세상의 다양성에 대해 인정할 줄 안다. 적어도 자기가 길든 폭력을 타인에게도 가해야 한다는 가학성에 물든 인간은 아니다.
그보다 더 나아가서 타인의 기준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기준과 비교해보면서 나은 기준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가장 멋진 태도를 지녔다고 할 만하다. 그는 아무리 자기가 오래 길든 기준이라도 그것이 옳지 않다면 당장이라도 포기하고 새로운 기준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강하고 열린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폭력에 길든 이들을 연민하면서도 그들이 가진 것 중에 가치 있는 부분은 없을지 고민해볼 것이다. 그리고 누구와도 당당하게 기준을 공유하며 매번 더 나은 기준을 향한 여정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가치는 지키고 집착하며 강요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매번 새롭게 생성하며 더 나은 것으로 만들어가야 할 무엇이다.
원문: 정지우 문화평론가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