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스 확진자 검역 과정의 거짓말
이번 메르스 확진자 검역 과정에서 드러난 여러 이슈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바로 ‘거짓말’이다. 환자 본인은 귀국 전 따로 처방을 받아 수액까지 맞을 정도로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열’과 ‘오한’을 감지하고도 방역 당국에는 메르스의 주요 증상이라든가 대증 치료받은 부분을 빼놓고 얘기했다. 그러면서 정작 부인에게는 마스크를 하고 나오라 하고 다른 차량을 이용하는 등 충분히 메르스 가능성을 인지했다. 그럼에도 사실상 고의가 의심될 정도로 보건 당국에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
부인 역시 남편의 메르스 가능성을 인지했음에도 따로 방역 당국에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삼성병원에 근무한다는 지인 또한 의료인으로서 충분히 메르스 가능성을 인지했으나 즉각적으로 보건 당국에 신고하지 않았다. 보건 당국의 조사가 시작된 뒤 환자를 태웠던 택시의 기사는 다른 승객을 태우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해 방역 당국의 초기 대응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니 이미 한 차례 메르스로 인한 홍역을 전 국가적으로 겪었음에도 모든 단계에서 방역을 어렵게 할만한 ‘거짓말임을 자각하고 시도한’, 그러니까 고의적인 거짓말이 감지된 셈이다. 이를 두고 한국 사회의 ‘거짓말 쉽게 하는 세태’에 분노하고 안타까워하는 여러 반응을 볼 수 있는데, 나는 사실 이게 한국인만 특별히 더 이기적이고 특별히 더 거짓말을 잘해서 그렇다기보다는 일종의 사회 시스템에 대한 신뢰 문제에서 기인한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난번 메르스 사태가 한창일 때, 공교롭게도 중동 경유 귀국행 비행기를 두 차례 정도 탄 적이 있다. 시기가 시기라서 그런지 이전에는 보기 힘들었던 기내 검역 설문서 작성이 있었다. 그때 기내에서 오갔던 다른 한국인 승객들의 대화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기침, 발열 이런 거 절대 체크하지 마. 귀찮아져.
증세 있어도 절대 있다고 쓰지 마.
아무것도 체크하지 말고 입국장에서 물어보면 무조건 괜찮다고 해.
공교롭게도 이번 메르스 확진 사태에서 드러난 태도와 별반 다르지 않다. 자신들의 ‘거짓말’이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 수 있는지 알면서도 ‘거짓말’을 서로 종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저 확진자와 확진자 부인과 지인, 그리고 택시 기사만의 특별한 케이스가 아닐 수 있다는 얘기다.
언뜻 봐서는 그래서 집단 이기주의, 집단 거짓말의 문제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저 이면에는 ‘제대로 해봐야 나만 손해 본다’는 생각이 깔렸다. 그러니 ‘공익을 위해 행동해 봐야 나만 손해 보는 게 한국의 시스템’이라는, 우리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깔린 것이다. ‘별일 아닐 수도 있는데 괜히 보고했다가 귀찮아지면 나만 손해’라는 생각이 보편적으로 관측되는 건 이른바 ‘저 신뢰 사회’에서 잘 보이는 현상이다. 비단 사회 전체 같은 큰 규모의 집단뿐 아니라 저러한 현상은 작은 단위의 집단에서도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만연하면 관찰되는 현상이다.
군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더 잘 알 것인데, 군대가 바로 그런 대표적인 케이스다. 흔히 얘기하는, ‘군에서는 너무 못해도, 너무 잘해도 손해 보니까 눈에 안 띄는 게 최선’이라는 얘기는 보상과 처벌이라는 점에 있어서 군의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만연한 것이다. 나는 자가 검역에 대한 저런 반응들 역시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본다. 즉, 개개인의 도덕성 문제에 앞서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불신의 결과라는 얘기다.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불신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불신은 결국에는 ‘원리 원칙이 통하지 않는 사회’ 혹은 ‘정도보다는 꼼수가 더 잘 통하는 사회’에 대한 경험에서 기인하는 것일 테다. 절차나 법을 지켜봐야 내게 돌아오는 건 손해뿐이고, 오히려 그걸 지키지 않은 이들이 이익을 보는 걸 사회 집단 전체가 오랜 기간 겪으며 경험하다 보면 결국 집단 다수가 사회 시스템을 신뢰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시스템을 지켜봐야 손해인 사회에서는 자연스럽게 자기 보호 본능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 타인에게 피해를 줄 가능성을 충분히 인지하고도 거짓말하는 배경에는 저런 부분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그런 ‘경험’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나는 잘못된 정치라고 본다. 정상적이지 않은 과정을 거쳐 권력을 획득하고, 그 권력을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유지하려 하는 이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의 권력은, 결국 절차와 시스템보다는 권력자 개인 혹은 권부 일부에 대한 맹목적 충성으로 유지된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법과 절차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고, 그걸 여러 해에 걸쳐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경험하면 앞서 얘기한 것처럼 사회 시스템을 불신하게 된다.
그런 사회에서는 최고 권력뿐 아니라 일견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작은 권력 하나조차도 모두 사유화되고, 그 사유화된 권력들은 욕망과 결합되어 시스템을 일탈해 사적 이익 추구를 위해 쓰이는데, 그러다 보면 사회 구성원들은 결국 사회 전체에서 ‘절차와 규정보다는 이익 추구가 우선’이 되는 게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것을 학습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런 불신을 원천적으로 개선하는 길은 ‘제대로 된 학습 경험’을 심어주는 것밖에 없다. 그 학습 경험은 다름 아닌 ‘우리 사회에서는 원리 원칙, 절차와 법을 지키는 이가 결국에는 덜 손해를 본다’는 경험의 공유일 것이다. ‘절차나 규정 지켜봐야 손해’라는 학습 경험이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불신을 만들어 왔던 것처럼 거꾸로 ‘절차나 규정을 지키는 것이 이익’인 학습 경험이 만들어져야 사회 전체에 만연한 시스템 불신을 제거할 거라는 얘기다.
‘적폐’를 얘기할 때 흔히 각종 비리를 저지르고 권력을 사유화했던 이들에 대한 ‘인적 청산’만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절대 끝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적폐’는 저런 ‘잘못된 사회와 그 잘못된 사회에서 비롯된 잘못된 이익 획득이 정당화되는 것에 대한 경험’이다. 그 경험이 살아 있는 한, 인간은 조금만 힘들어져도 끝없이 그 경험을 되살려 줄 수 있는 권력이 나타나는 것을 원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절차와 법을 지키는 길은 결국 사회 전체의 신뢰 비용을 감소시켜 모든 구성원의 이익이 된다. 하지만 그걸 경험해 보지 않은 사회에서는 당장의 불편함이 크고, 그래서 당장의 불이익이 크게 다가오기 때문에 ‘할 수 있게 되면’ 또 다시 적폐를 향해 욕망이 꿈틀거리게 되어 있다. 당장 내가 손해를 보는 상황이 되면 정의고 신뢰고 뭐고 간에 보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적폐’ 정권을 만들어 내는 우리 사회의 진정한 ‘적폐’는 바로 저 잘못된 학습 경험이다.
‘잘못된 이익 획득이 정당화되는 것’에 대한 학습 경험이 무너지고 ‘원칙과 준법을 지키는 것이 결국에는 가장 손해를 보지 않는 것’이 보편화되어야 또 다른 적폐가 나타나는 것도 막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진짜 ‘적폐’가 해소되고 새로운 학습 경험이 만들어져야 앞서 얘기한 것과 같은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불신에서 기인한 이기주의’도 사라질 수 있게 된다. 그게 진정한 적폐청산이자 재조산하(再造山河)다.
결국에는 또다시 ‘정치’다
저런 잘못된 학습 경험을 가진 이들이 상당수인 사회에서 ‘원칙과 절차의 준수’란 귀찮고 손해 보는 일이다. 눈에 보이는 인적 청산이야 내 일이 아닌 데다가 큰 범죄 사실이 눈에 보이니 청산해야 할 적폐로 인식하고 지지할 수 있지만, 당장 엄청난 비리나 불법은 아니나 나에게는 피해가 되는 일들에 대한 ‘원칙론’은 짜증스럽고 불합리하게 여겨져서 대단히 이뤄내야 할 당위성을 인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발달한 사회일수록 욕망도 다양하고 층위도 깊고 넓다. 그리고 그런 사회일수록 저 ‘원칙론’은 어느 한 부분에서 모두의 욕망을 건드리고 모두의 이기심을 공격한다. 누구에게나 공평무사한 원칙을 만드는 건 중요한 일이지만, 바로 잡는 과정에서는 모두의 이익을 건드리기 때문에 명과 암이 선명하지 않은 영역으로 내려갈수록 사회 구성원들의 반발도 커지기 마련이다. 그걸 깨부수지 않고서는 절대 ‘사회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높이기 어렵다. 이미 우리 사회는 ‘시스템을 지키지 않는 것이 더 유리한’ 시간을 학습해 왔기 때문이다.
그걸 해결하려면 정치적 유불리에도 흔들리지 않고 저 제대로 된 학습 경험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원리 원칙’ 혹은 ‘절차 준수’에 대해 거의 근본주의적인 수준의 노력이 가능한 정치가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그건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에 대한 높은 감수성을 동반해야 가능하다. 결국 ‘절차와 규정을 준수하는 것이 가장 손해를 보지 않는 일’이 된다는 것은 절차를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민주주의 감수성과 연결되는 일인 동시에 그걸 통해서 개인의 사익에 앞서 사회 구성원 최대 다수의 공익을 추구함으로써 사회의 신뢰 비용을 감소시키는 공화주의에 대한 감수성과도 맞닿아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현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보낸 많은 이들이 얘기한 ‘지지의 변’에 반드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있다. 바로 당 대표 시절, 어떤 정치적 유불리에 대해서도 계산하거나 협상하지 않고 우직하게 고구마 먹다 막힌 것처럼 답답할 정도로 ‘원칙’만 고집하며 당의 혁신을 꾀했던 모습을 지켜보며 그 ‘원칙주의’야 말로 우리 사회의 적폐 청산과 재조산하에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그 ‘원칙이 기본이 되는 정치’에는 저런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불신’을 가져왔던 학습 경험을 부수기 위해 당장의 불편함도 감수하겠다는 높은 수준의 시민으로서의 정치의식이 필요하다. 그런 시민의식으로 비롯된 지지가 없다면 정치는 고립되고 흔들리고 멈출 수밖에 없다. 그건 앞서도 얘기했던 것처럼 ‘조금 더 불편하고, 조금 더 손해를 볼 때’ 또다시 적폐 세력을 눈감고 용인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어떤 대단한 잘못된 불법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불신을 만연하게 한 오랜 학습 경험이 곧 적폐임을 인식하고 그 적폐를 청산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모두에게 필요하다. 그 의지가 우리 사회 시스템의 신뢰를 만들어 낼 때 저렇게 모두에게 피해를 주고 결과적으로 자신 역시도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져서 지불해야 하는 사회 비용을 높이는 ‘불신’을 막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정치’다.
덧
적폐청산을 두고 ‘적폐청산이 최우선’이라면서 절차나 시스템은 그 과정에서 어길 수도 있다고 하는 정치인은, 바로 저런 이유로 인해서 멀리해야 하는 인물이다. 진정한 적폐는 바로 그 ‘절차와 시스템을 무시하는 것’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원문: 손원근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