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교육박람회에서, 학교방문 일정으로 핀란드 야르벤빠(Järvenpään Lukio) 고등학교에 갔다.
북유럽의 학교들은 건물 구조부터 우리와는 매우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우리의 학교들은 천편일률적으로 옆으로 길게 펼쳐진 직사각형 건물구조지만 덴마크-스웨덴-핀란드의 학교들은 저마다 다르다. 학교의 물리적 환경 면에서 이들 학교의 자유로운 분위기에 비하면 우리의 학교는 흡사 감옥을 방불케 한다 하겠다. 내용과 형식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법이어서 우리의 학교는 교육의 내용적 측면에서도 창살 없는 감옥과 다르지 않다. 나의 이 어법이 과연 사대주의에 터한 자학적 표현인지 이어지는 이야기를 읽고 독자들이 판단하기 바란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연상캐하는 핀란드의 고등학교
건물 입구에 들어서면 벽면에 큰 그림 액자가 많이 붙어 있다. 동사무소처럼 계도용 환경게시물이 붙어 있는 우리와 대조적이다. 그림 자체가 파격적이다. 그리고 그 형식(환경구성)만큼이나 이 학교의 모든 면이 파격적이다. 그러나 과격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교사들이나 학생들은 너무 온화하고 평화롭다.
이 학교를 들어서면 학교라기보다는 도서관 혹은 박물관에 들어선 기분이다. 고등학교가 아닌 우리네 대학교에서나 느낄 법한 그런 기운이 풍겨져 온다. 건물 내부의 분위기가 그러하고 학생들의 표정이 그러하다.
이들 학교에서는 우리 식의 홈룸(homeroom)으로서의 교실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공부하는 방으로서의 클래스룸이 있을 뿐이다. 최근 우리나라 중등학교에서 도입되고 있는 교과교실 그것이다. 이런 면에서 내가 속한 전교조도 이주호씨가 도입한 교과교실제 자체를 굳이 반대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비판은 그 선진된 형식이 아닌 내용에 포커스를 둬야 할 것이다.
화학수업을 하고 있는 교과교실에 들어섰는데 설명을 하고 있는 여자 분이 교사치고는 너무 젊어 보였다. 알고 보니 교사는 뒤에서 지켜보고 있고 학생이 급우들 앞에서 자신이 준비한 내용을 발표하고 있다. 설명이 끝나고 질의응답과 열띤 토론이 이루어진다. 우리 나라에선 특목고 교실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닌가 싶다.
한국의 대학교만큼이나 자유로운 핀란드 고등학교
자, 그러면 이 핀란드 고등학교의 교과교실제는 내용적으로 우리와 뭐가 다른지 보자. 핀란드의 경우는 고등학교인데도 우리나라 대학처럼 학점제로 운영하기 때문에 학생들이 듣고 싶은 과목을 수강신청 한다. 그래서 수업시간인데도 복도가 아닌 로비의 모양새를 띤 곳에서 나름의 일에 몰두하고 있는 학생들을 볼 수 있다.
우리 사고방식으로는 학생의 학교 일과는 쉬는 시간 아니면 공부 시간이고 공부시간에는 모든 학생들이 교실에 처박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 시간에 돌아다니는 학생들은 땡땡이치는 일탈자로 간주된다. 그런데 이 학교에선 공부시간과 쉬는 시간의 구분이 없다. 공부시간인데도 쉬는 학생이 보이고, 쉬는 시간인데도 공부하는 학생이 보인다. 우리 같으면 대학교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다.
그리고 수업이 없는 학생들은 자유롭게 학교 울타리를 벗어날 수도 있다. 우리의 대학생이 그러하듯 말이다. 핀란드의 고교생들에겐 우리의 대학생들이 누리는 자유가 부여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고3과 대학교1학년의 차이는 고작 한 끗 차이인데, 왜 우리네 고등학생들은 이토록 인신을 구속당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걸 창살 없는 감옥이라 표현하는 나의 어법이 과도한가 아니면 감옥을 방불케 하는 우리네 교육현실이 과도한 것인가?
감옥을 운영하는 소장이나 그것을 지키는 간수들이 죄수들에 품는 관심사는 오로지 그들이 어디에 처박혀 있는가 하는 것일 뿐 얼마나 건설적인 일에 몰두하는가 하는 것에는 신경을 끈다. 우리네 학교장이나 교사가 학생들을 향해 품는 관심사도 이와 다르지 않다. 즉, 쉬는 시간에 학생들이 교실에 처박혀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할 뿐 수업 시간에 그들이 엎드려 잠을 자도 별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 한국의 학교 풍속도가 감옥과 뭐가 다를 것인가?
그런데 이 핀란드의 학생들은 삼삼오오 앉아 조용히 담소를 나누거나 로비 곳곳에 설치된 컴퓨터에서 자료를 찾거나 탁자에 앉아 책을 펴 놓고 공부를 하고 있다. 1천명이 되는 학교인데도 소란한 기색이 전혀 없다. 그러면서도 표정들은 하나같이 밝고 활기차다. 솔직히 이러한 정중동의 모습들은 그 수준면에서 우리네 대학생들보다 성숙한 것이라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중딩이든 대딩이든 한국 학생들은 틈만 나면 스마트폰 질을 해대지만 여기서는 그런 아이들을 한 명도 못 봤다.
점수를 신경쓰지 않아도 PISA 최상위권에 속하는 핀란드 교육
2013년 PISA(OECD 국가간 학업성취도 평가)에서 핀란드의 성적이 약간 떨어졌다고 핀란드 교육계에서 모종의 위기의식이 감도는 분위기지만, 예르벤뺀 루끼오 고교의 교장선생님은 별 신경을 안 쓰신다. 그분의 말씀으론 핀란드가 떨어진 것이 아니라 중국과 대만 그리고 한국과 같은 아시아 국가들이 상대적으로 앞섰기 때문이라 한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학생들에게 공부를 죽도록 시킨다. 그리고 그 학업 과정이 학생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가는 여정이 아니라 ‘시험’이라는 특수한 목적에 맞추어 주입식 또는 문제풀이 위주로 진행되다 보니 공부란 게 재미있을 수가 없다. 학생들은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죽도록 공부하면서 지성인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찍기 선수’, ‘정답 고르는 자동인형’으로 길러진다.
물론 이 공부 방식은 시험이라는 기제에는 탁월한 효력을 발휘한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 법, 시험이라는 것은 시험문제를 많이 풀어본 학생이 잘 풀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 세 나라의 PISA 성적이 높은 것인데, 핀란드나 스웨덴에서는 동북아시아 국가의 학력이 높은 주된 원인 중 하나로 유교주의에 바탕한 문화적 특성을 꼽는다. 참으로 지하에 계시는 공자님이 통탄할 노릇이다.
공자가 <논어>에서 “배우고 때로 익히면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또는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할 때 그 배움은 ‘호모아카데미쿠스’로서 인간의 속성을 말한다. 그런데 오늘날 유교문화권에서 공자의 후예들이 과연 즐겁게 공부하는가?
공자가 말한 도(道)가 도구적 지식 또는 천민자본주의적 스펙을 뜻하던가? 유교적 가치로서의 공부의 본질에 더 가까운 쪽은 오히려 북유럽의 학생들이 아닌가? 우리 학생들은 “배움으로부터 도주”라는 말 그대로, 공부를 마지못해 하고 또 너무 과중한 학업 부담에 지칠대로 지쳐 있지만, 핀란드 학생들은 공부를 정말 재미있게 한다. PISA 성적과 무관하게 이렇게 다른 두 나라 학생의 모습은 그대로 두 나라의 미래를 말해주지 않을까?
영어뿐 아니라 언변도 뛰어난 핀란드 학생들
계속해서, PISA 결과를 무시해도 좋을 만한 결정적인 이유를 이 학교에서 우리가 만난 몇몇 학생의 모습에서 발견하였다. 우리를 수행한 한 학생은 장차 대학에서 국제학(International Study)을 전공하기 위해 한국의 고려대학교에서 유학하기를 희망한다.
고3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대학논문 주제나 학업의 로드맵을 설정해 놓고 있었는데, 전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으로서 남한과 북한의 관계에 대해 연구하고 싶다고 한다. 그래서 이 학생은 자원해서 우리 곁에서 학교에 관한 이모저모를 브리핑해주는 역할을 맡은 것이다.
학생과 우리가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방편은 영어였다. 그런데 핀란드 학생의 영어실력은 정말 뛰어나다. 모든 핀란드인이 영어를 잘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핀란드 곳곳에서 만난 사람 가운데 나이 든 분들은 영어가 매우 서툴렀다. 그러니까 나이가 젊을수록 영어실력이 좋았는데, 이는 핀란드 학생의 영어실력이 순전히 교육의 결과임을 말해준다.
학생들이 영어를 잘 할뿐더러 언변도 하나같이 뛰어났다. 주어진 주제에 관하여 조리있게 자기 의사를 개진해 가는 능력은 영어실력과는 별개의 것이다. 학교장이 우리 앞에서 브리핑을 하는데 영어가 서툴러서 막히자, 이 아이가 교장을 돕는다. 교장선생님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교장의 약점을 카버해주는 아이의 태도에서 우쭐대거나 하는 모습은 전혀 엿볼 수 없다.
충격적인 것은, 이 학교가 핀란드에서 결코 특별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이 학생이 특별히 똑똑한 아이도 아니라는 것. 이러한 총체적 역량은 결코 PISA 점수 따위로 환원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의 교육, 핀란드의 자율성을 배우자
정리해보자. 왜 핀란드 학생들은 일과시간에 교문을 개방해도 바깥에 나가 사고를 치거나 하는 일탈행위를 범하지 않는 것일까? 쉬는 시간에 핀란드 학생들이 차분하게 휴식을 취하거나 생산적인 활동에 몰두하는 반면, 우리네 학생들은 과잉행동을 일삼는 것은 왜 일까? 이것은 국민성의 차이일까?
핀란드 학생들은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자율성을 누린다. 그러면서도 누가 억지로 시키지 않아도 자기 책임을 다하는 모습이다. 흔히 말하는 ‘자율과 책임의 조화’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학생들에게 핀란드 식 자율을 부여하면 책임은 없고 방종으로만 흐를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DNA의 문제일까? 말도 안 된다. 기성세대의 그러한 식민지적 사고가 청소년의 식민지적 습성을 자아내는 것이다.
내용과 형식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참다운 형식이 참다운 내용을 견인하고 그 역 또한 마찬가지이다. 교육혁신은 형식과 내용이라는 수레의 두 바퀴가 나란히 굴러가야 제대로 구현될 수 있다.
교과교실제든 자유학기제든 형식과 더불어 내용에 있어서도 교육주체에게 진정한 자율성을 부여해야 한다. 핀란드처럼 학생들이 스스로 이수하고자 하는 강좌와 교사를 선택하게 하자. 대신 적절한 성취수준을 정하여 어영부영 시간만 때우는 학생들은 (대학교처럼) 진급에 있어 불이익을 받게 하자. 이렇게 하면 게으르고 무능한 교사들은 궁지에 몰릴지 모르지만, 현재 바닥에 추락해 있는 교사의 권위는 회복될 것이다. 대학교수들이 그러하듯 말이다.
개인과 구조, 교육주체와 교육제도 또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러나 형식과 내용 가운데 후자가 선차적이듯, 교육주체와 교육제도 가운데 후자가 더 중요한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존재양식이 의식을 규정하지 그 역은 아니기 때문이다. 교사를 무시하고 수업시간에 엎드려 자도 시간만 때우면 학점(?)을 받아 진급하는 학생의 존재양식, 학생들에게 최선의 가르침을 선사하기 위해 조금도 노력하지 않고 시간만 때우면 월급 꼬박꼬박 나오는 교사의 존재양식, 이런 구조 속에서 교육개혁은 불가능하다.
왜냐면, 비합리적인 존재양식은 저급한 의식을 규정하고, 나아가 저급한 의식은 그대로 저급한 교육현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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